김영찬 시인 / 사랑의 아갈마agalma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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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찬 시인 / 사랑의 아갈마agalma
아무 준비 없이 어떤 예고 대안 없이도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을 감싸기 위한 검푸른 눈썹 위 푸른 눈높이에 집을 짓자
사랑이라는 집
사랑해, 사랑한다니깐, 이라는 우리말 언로에는 대명사가 없다 주어가 없다 목적어조차 따로 없는 완전 1형식문장 사랑해!
我愛你워 아이 니wǒài nǐ, 나(는)사랑(한다)너(를) ‘사랑’ 이라는 완벽한 완전자동사 대신 어설프게 부려 쓴 타동사 Love로, I love you
어떤 보살핌도 없이 잘 익은 홍시 같은 우리말 사랑은, 키 큰 감나무 가지 위에 까치밥처럼 드높다
홀로 드높아서 수줍음 같다 어떤 고고함마저 느껴지는 성스러움, 외로움에 기대어 고요히 ‘사랑해∼’,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 쥬 땜므Je t’aime 별다른 생각 없이 주어와 술어는 꼭 챙긴 뒤 막연한 벌판 낯선 대기 중에 멋진 별장을 짓고 달빛 쏟아붓는 사랑
대책 없이 그런데 그 사랑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게 필요한 거 맞니?
김영찬 시인 / 근본 없는 질문들
11살은 …… 수레국화 21년은 …… 지우개 31살은 …… 코끼리 41년은 …… 덜컹덜컹 도토리 51살은 …… 설탕물 타 마신 뭉게구름 61년은 …… 61살쯤 되면, 그 나이 그쯤 되면 강 건너 물수제비 물수제비 뜬 조약돌 그러니까 …… 71살은, 담 넘어간 고양이
담 너머 딴 데 갔다가 하릴없이 되돌아온 양자물리학상 실험실의 길고양이 냇가의 갯버들처럼 물 위에서 춤을 추는 춤추다가 물속에 빠져도 젖지 않는 달그림자 누가?
—내가, 내 나이가
물가에는 가지도 않고 물웅덩이에 발 디뎌도 윤슬처럼 물위를 석권하는 물결처럼 순수한 순간의 반짝임 내가, 내 나이가
주춤주춤 어느새 일흔하고도 한 살이 지났다 열심히 열일곱살배기그때와는 완판 다르게 영영 다른 대척점에서 나 그때 나 때는 뜨거운 라떼 커피처럼 나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말 안하고 그냥 쓴 커피 석잔 째 홀짝홀짝 혼자 즐기는 사람
쓴웃음 다스리다가 표정 그대로 팔뚝에 비룡문신이라도 새길까 타투, 타투 비룡飛龍을 새겼다가 금방 빼앗긴 여의주를 다투자는 게 아니라 온몸에 타작 타투타투 투쟁과 화해
기막히게 잘 나가던 17살 때의 재주 그대로 케톤냄새 푸석푸석 그 냄새 그게 뭐 어때서 본질적으로 기분에 따라 뭔가 크게 잘못 사랑에 덧니가 나나! 웃어넘기다가
‘반박 시 니 말 맞음’*에 말끝 흐리지 말고 줏대 세워 당당해지기 뭐 그렇고 그렇게 하찮은 논리
*반박 시 니 말 맞음 : 반박? 그렇다면, 네가 맞다 치고 언쟁은 사절하겠다는 요즘 세태의 에토스
계간 『불교문예』 2023년 여름호 발표
김영찬 시인 / 잊혀진 것들의 도린곁
나한테 속눈썹 하나만 선물로 뽑아줄래? 눈물에 잠겼던 눈썹이어도 상관은 없고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눈을 두 손 가리고 서로 모르는 척 너무나 먼 외지로 갈라섰다
바람 부는 길 어느 날의 일기장에서 불현 듯 긴 머리카락 하나가 걸어나왔다
검은 손으로 손금 어루만지면 기억보다 먼 곳에 꽈리 틀고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
찢청에 맨살 튀어나온 허벅지 하얀 속살에 저벅저벅 우악스런 손이 달려가 와락 안긴다
계간 『불교문예』 2023년 여름호 발표
김영찬 시인 / 밀코메다에서 쓰는 습작시
우리은하Milky Way Galaxy의 젖이 불어 해일로halo빛 모유가 안드로메다 성단의 허벅지를 흥건히 적셨다
* 광막한 우주에 우유통이 넘어진 것일까 젖통이 불어 모유가 흘러넘치는 밀코메다*의 메타포 빗소리에 무너진 나는 한밤중 잠에서 깬다 캄캄한 입술에 치닫는 밤의 시니시즘 강화 벽을 뚫고 쳐들어온다 냉소적인 장맛비 소리 할 말이 많이 쌓였었나 저 윽박지르듯 거센 말투 할 말 다 할 때까지 그냥 기다려드릴까요? 게재에 나는 시를 쓰면 된다 말장난을 즐기던 편자 없는 말이 격렬한 말장난의 박차拍車에 놀라 행간을 이탈하는 질주란 없을 거라고 글쎄요 말장난 때문에 말안장 벗겨져 말과 기수가 분리되는 말장난 중단사태는 얼마든지 흔한 빈출 사건 그만두자니 습작이 아쉬워서, 팔랭드롬palindrome 다시합래노시다! 아휴, 그게 아니죠/죠니아 게그휴아! '다시합창합시다' ―이 문장을 불투명 강화유리창에 붙인 다음 억지로 거꾸로 읽으려고 하지 마시오 문장을 바로 세워 똑바로 응시하시압! 거세당한 빗줄기가 조곤조곤 아카펠라 어쩌란 말이냐 졸음이 올 때까지 비에 젖은 때까치가 날갯죽지 털고 비상할 때까지 밤의 트로카데로 광장을 마냥 헤매랴 찌그러진 세숫대야로 맘브리노 투구를 쓴 밤의 파르티타 La partita de la nuit! 콰드라투라quadratura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방안房眼의 앙시법仰視法 선택하라 수탕나귀의 발길질에 아미그달라amygdala, 아무거나 달라고? 뇌의 편도체가 무너질 수도 있지만 NK세포로 무장할 것 그리고 파락호처럼 수플레soufflé섬의 라메킨ramekin에 대가리 처박으면 잘 익은 캄파뉴 빵이 구워져 나올 테니 우아한 유령들'의 울퉁불퉁한 리듬을 빌려와 사랑노래 사랑을 나누자! 오라 섹스타hora sexta, 6시간 만에 낮잠을 즐기기 위하여 밤잠 줄이자고 외치다가 목이 휘어 목이 쉰 빗소리의 몰락 침몰과 몰이해와 모략에 유의할 것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리얼리즘의 진상을 등기화motivation 하려고 자유 모티프free motif속으로 자진해 들어간 뒤로는 도대체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슬럼프에 빠진 밤 밤이 밤의 모서리에 또다시 빗소리를 모을 때 헤이, 이리 좀 와보시게! 밤의 하이와보게Haiwa Boge*, 어리석은 평화가 밤새 내내 나태해질 것이지만, 졸작 시를 파쇄기에 넣기 전에 쳇봇 ChatGPT 번역기에 쑤셔 넣어보라 국적 없는 활자들이 마구잡이로 맨살 섞는 밀코메다의 갈림길 거기 갖가지 평화가 혼례 붙어 어룽어룽 현란해질 것이다다의 다다다, 다다 *밀코메다Milkomeda: 우리은하Milky Way Galaxy와 인접한 안드로메다Andromeda 성단의 이름을 합성한 은하 이름. 초속 110Km로 접근 중인 두 은하는 50억 년 내외에 합쳐져 말코메다라는 하나의 은하 로 통합될 거라는 가설. *하이와보게Haiwa Boge: 일본의 平和ボケ. 평화의 멍때림. 평화가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나른한 일상에 위기의식이 둔감해진 상태. -계간 『상상인』 2024년 겨울호 발표
김영찬 시인 / 오늘밤은 리스본
하지만 오늘밤엔 리스본까지만
바르셀로나, 쌩 폴 드방스쯤이야 나중에 품어도 전혀 늦지 않지
북방의 주택가엔 주인 없는 개들만 어슬렁어슬렁 빠리의 쌩 제르맹 뒷골목에 나뒹구는 빈 포도주병들만 습관적인 휘파람 소리를 내더라도 오늘은 오직 리스본까지만,
몰도바 몰디브 몰라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렇더라도 결국 품 안에 끌어들여 일일이 쓰다듬게 될 무국적의 섬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야 없지
초저녁부터 야심한 밤까지 리스본의 불 꺼진 테라스에 기대어 고즈넉한 밤안개에 끈금없는 칵테일 여행 진한 압생트 쑥 향에 코를 처박고 뜨거운 섬이 하나하나 가슴 복판에 솟구칠 때까지 집에 갈 생각 배낭 메고 딴 길로 샐 생각일랑 아예 접어둘 것
그렇고말고 오늘처럼 과달키비르강江이 소리 없이 강물 수위를 높이며 시종일관 침묵을 고집할 때 리스본의 매력은 무섭도록 관능적일 수밖에
달콤한 밤공기가 맨발의 우리들을 달빛 젖도록 사주할 테니 그래, 우린 몰도바를 향해 출항하는 배를 기다리는 척
남은 생애를 몽땅 대책 없는 리스본의 창가에서 어기적거리다가 옹골차게 우량한 쌍둥이들이나 뭉텅뭉텅 낳게 된들 누가 어쩌랴
리스본까지만, 제발 더 멀리 떠나서 탈이 될 헌책방의 책들일랑 뚜껑 닫아버리고
오늘 밤엔 리스본까지만, 리스본의 품 안에 안겨서 오늘밤은 리스본 -계간 『시와 함께』 2024년 겨울호 발표
김영찬 시인 / 이것은 내 인생 시다운 시
누구나 비 오는 날 우산을 버스에 두고 내릴 수 있지 우산한테는 미안한 일 하지만 종점에 닿거들랑 누구한테든 낯가리지 말고 지붕이 되어주거라!
그것은 내 인생 필생의 시다운 시
리부리 무티libri muti 말 없는 책 거기에 말이 따로 필요하지 않아서 낙서로만 남게 될지라도 내 인생 참다운 시
나는 가끔 새 구두를 사 신고 꽃길이 아닌 비포장도로로 나서지 걷다가 흔하디흔한 개여뀌 꽃대 앞에 멈추어 서서 발뒤꿈치 들고 머리 위로 흩어져 사라지는 구름을 향해 손짓도 하지 그것은 별로 시인답지 않은 클리셰가 아니냐고 친구들은 말하지 하지만 그것은 잎자루가 짧은 여뀌꽃을 위한 최소한의 관심과 애착
푸른 도넛 속을 관통하는 바람의 길을 내주는 일이지
내가 쓴 시는 아무것도 아닌 헛기침의 가치 잠꼬대에 의미를 붙이는 일이지 어떻게 이 엉뚱한 편견을 무마할 것인가 그것은 악몽을 길몽으로 바꿔주는 퇴마사의 역할보다 쉬울 수는 없지만 악운을 피해 행운으로 건너뛰려고 in vain, 도로徒勞에 시달리며 일생을 낭비하는 악취미라 할지라도 하는 수 없지 그렇잖은가
악몽을 통과하는 방편으로 불가피한 수사법 최적의 문장을 찾느라 밤잠을 설치지
이면지를 구겨 코를 풀고 잉크와 시간을 낭비하더라도 행복에 겨운 일
인생을 즐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생의 절반을 허비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쁨을 찾아 일단 쓰고 보자고 나는 다짐하지
내 시를 읽고 흔한 겉치례로 밥 한번 먹자고 건성으로 말하는 이도 있지 그것이 실제가 되어 때로는 술 한 잔 쏠테니 어서 나오라는 사람을 위해 나는 또 쓰지 오늘이 바로 그런 날 쎄라비, 쎄시봉~ 시봉시봉 c'est la vie c’est si bon si bon 내 인생의 도린곁에 피어나는 꽃 한 송이 a poem in my life 필생의 시 운이 좋은 날은 운율 좋은 시를 한 편 건질 수도 있지 대박 날 수도 있는 일
내 인생의 희가극, 오페라 부파opera buffa와 같은 시의 전도여 쎄라비 쎄시봉 시봉시봉 그것은 내 인생 언제든 우연과 어깨 부딪쳐 시가 된다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시
‘내가 가닿을 수 있는 곳까지가 (바로) 너다.’* *최형심의 시, 「여름에 딸린 방」중에서. 단 (바로)는 제외 -계간 『시와세계』 2024년 봄호 발표
김영찬 시인 / 팽이
팽이는 박달나무가 최고라 했지 단단하기로는 서슬 퍼런 낫으로도 좀처럼 깎이지 않아 몇 번인가 헛손질에 상처 자국만 남는 팽이 깎기에 온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둥근 가지 적당히 잘라내어 돌려가며 비스듬히 깎다 보면 고만고만한 시선들이 둘러앉아 하루해 짧은 줄 모르고 군침을 삼키지 팽이는 균형이 잘 잡혀야 잘 돈다고 했지 빙글빙글 돌려가며 눈으로 가늠해 보고 어느 쪽으로 둘러보아도 쪼매만 어긋나도 안 된다 했지 윗면은 평편하고 둥글게 파 들어간 옆면은 저 옆집 순실이 엉덩이처럼 살집이 도톰하니 보기도 좋아 고만고만한 손가락들이 다퉈가며 어루만지려 하지 팽이는 팽글팽글 멈춘 듯 돌아야 한다고 했지 밑 부리에 자전거 베어링에서 뽑아낸 작은 쇠구슬 박고 새색시인 양 알록달록 단장 끝내고 한 뼘 대나무 마디 잘라내어 가늘고 길게 여러 가닥으로 가죽 허리띠 갈라 매듭진 채찍으로 쉴 새 없이 어르고 달래야 고만고만한 탄성이 어우러지지 동네 아이들 식전부터 몰려들어 저마다 팽이를 돌려 대는데 팽팽 팽팽 팽글팽글 팽글팽글 잘만 돌아가지 임금이가 설 식모 살다 애 배 갖고 왜 돌아왔는지 깔깔이네 큰 아들네미 까목소에 왜 들어갔는지 팽이처럼 돌고 돌아봐야 알 수 있다고 오늘도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지칠 줄 모르지.
김영찬 시인 / 낙타
낙타는 길 떠나야 비로소 자유롭다
먼 길 떠나지 않는 동물, 그건 똥 잘 누는 놈일 뿐
다리 꺾고 앉아 지난 일 되새김하는 놈들 보면 버럭 화가 나서 낙타야 가자!
네 푸른 안구에 비친 대추야자나무 숲이 물구나무 선 곡두의 허상이든 말든 로또 복권 쏟아져 세상이 비에 젖든 말든 낙타야, 길 떠나자
길에서 네 육봉은 사철 푸른 구릉 양떼들의 풀밭이 그 위에 있지
회오리바람에 눈알 쓰려도 모래 위로 길을 내며 걷고 또 걸어야지 ―낙타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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