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현주 시인 / 호박 넝쿨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4. 08:00
박현주 시인 / 호박 넝쿨

박현주 시인 / 호박 넝쿨

 

 

둑길 비탈을 따라

서슬 시퍼런 호박넝쿨

 

알종아리 무심히

앗! 따거

금세 빨간 줄 섰다

 

검푸른 호박잎 사이

애지중지 여린 새끼를 품었구나

단도 날 하얗게 세우고

애호박 비스듬히 끌어안은 모성

 

힘겨운 비탈살이

멈출 수조차 없이 뻗어 가야만 할

그래서 더욱 질긴 마른 넝쿨,

어렵사리 견뎌온 내 어머니 같다

 

누구도 그를 보고

억세단 말 못 한다

 

 


 

 

박현주 시인 / 갈대

 

 

어쩌자고 한세월을

마냥 울어 지낼 터이냐

 

네 울음소리에 덮여,

한 말 가웃도 넘는 내 설움은

각시탈 뒤에 멈칫 서 있다

 

너의 골 깊은 서러움은

알고 싶지도 않은데

데 절반도 안 되는 나의 눈물을

자꾸 멀겋다 하지 말고

 

이쯤에서 둘이 그냥

생각 말고 나서서

아무 것이나 몸 얹어 놓고

잊은 듯이 흐르다가

턱 하고 어딘가에 걸리면

 

거기.

모조리 쏟아놓고 오자

마카 다 내던지고 오자

 

 


 

 

박현주 시인 / 밤참 먹는 남자

 

 

스산한 밤길

흐느적거리는 긴 그림자 끌고

모퉁이 돌아가는 남자

처진 어깨 위로 외등 불빛이 내린다.

무척이나 허기진 표정

 

한가했던 오찬의 풍요는

서랍 속 어느 파일에 끼워 두었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일은 기필코 마무리를 지으리라.

다시 시장기가 찾아 든다.

 

곱창구이집 연기는 그림자를 꽉 잡은 채

절대로 놓아줄 맘이 없고

이럴 때 눈치 빠른 친구 하나쯤은 있어도 좋으련만

모퉁이집 아지매 어묵 국물 맛이 일품인데

남자는 오늘도 배가 고프다.

 

 


 

 

박현주 시인 / 달맞이꽃

 

 

가까이 오세요

당신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요

깊고 맑은 눈을 보고도 싶어요

그리고는

새벽이 올 때까지 미뉴엣을 추어요

흐르는 은하수의 선율에 따라

박자 하나라도 놓치면 안돼요

 

내게서 눈을 떼지 마세요

당신의 사랑만으로

피고, 피는

애잔한 달맞이꽃

기다림은 나의 몫이고

떠남은 당신의 몫인 걸

애시당초 잘 알고 있답니다

 

밤이 깊어가요

조금만 더 가까이 오세요

조금만 더.

 

 


 

 

박현주 시인 / 어떻게 딸기가 익죠?

여덟 동 비닐하우스에 딸기를 따러 갔죠

처음부터 어두운 영혼은

딸기와는 좀 다른 말

어둡게 그냥 둬야 한다는 말을 그냥 둘 수 없어

파고들 흙 한 점 없는데

꽃 피고 열매 맺고 질 줄 모르는

딸기 공장에 갔었는지도 모르죠

차양에 잘린 바람이 딸기를 붉히는 곳을요

처음부터 어두운 시간은 다 시들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따는 것 같아서

병이 든 게 아닐까 딸기를 의심하면서

처음이 어디부터인지 알 수 없어

하우스와 하우스, 비닐과 쇠파이프와 포장재까지

텅 빈 몰골이 되어갔는지도 몰라요

생산하고

포장하고

배송하는 밤의 컨테이너를 맴돌기도 했어요

녹슨 쇳조각 같던 달이

살 올라 폭신한 슈퍼문이 되는 것도 보았어요

검고 늙은 상상을 털옷으로 걸치고

개가 지키고 집은 밖이 환할수록 더 어둡고요

울음이 아예 없다고는 못해요

아니라 아니라 해도 밤은 길고 문은 닫히고

개는 여전히 개의 밤을 보내요

봄엔 딸기가 속한 봄날이 익어가고

 

 


 

 

박현주 시인 / 반지

 

 

빨간 루비는 눈시울을 비춰주는 거울

깎아낸 보석이란 어느 부분을 확대하거나 일그러뜨리며 제멋대로지

손가락 위에서 반짝이는 너의 뒷모습

 

어느 날은 눈, 어느 날은 코, 어느 날은 비뚤어진 입술로

밤마다 다른 문 앞에 서 있지

 

네가 아니라면 한번 잡아보고 싶은

날개 닮은 어깨뼈

 

새벽 세시, 물고기의 울음 같은 것을 지나가지

가슴이나 허벅지에서 나온 것 같은

 

너와의 저녁 약속을 후회하며

어제는 진한 과즙 같은 오줌을 흘려보냈어

 

속옷 위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를 집어 변기 속에 넣었지

가볍게 떠오르는 그림자

 

낱글자 하나 방바닥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 같아

손바닥으로 쓸어보지

햇살 끝에 떨리는 손마디 가는 손가락

사파이어처럼 에머랄드처럼 둥근 링 위에서 반짝이는

 

내 손가락을 잡고 있는 위험한 거울의 법칙

 

 


 

 

박현주 시인 / 봄날의 칩거

 

 

너를 만날 수 없음은

맘에 춘빙(春氷)을 가두고

있음이다

천공으로 퍼지는 태양도

나를 가둔 창 밖의 사건일 뿐

차라리 네 푸른 수의라도

잠시 빌려 두를 수 있다면

독방이라도 외롭지 않을

꿈으로 만나고 싶다.

 

 


 

박현주 시인

경북 안동 출생.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0년 《시평》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