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시인 / 호박 넝쿨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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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시인 / 호박 넝쿨
둑길 비탈을 따라 서슬 시퍼런 호박넝쿨
알종아리 무심히 앗! 따거 금세 빨간 줄 섰다
검푸른 호박잎 사이 애지중지 여린 새끼를 품었구나 단도 날 하얗게 세우고 애호박 비스듬히 끌어안은 모성
힘겨운 비탈살이 멈출 수조차 없이 뻗어 가야만 할 그래서 더욱 질긴 마른 넝쿨, 어렵사리 견뎌온 내 어머니 같다
누구도 그를 보고 억세단 말 못 한다
박현주 시인 / 갈대
어쩌자고 한세월을 마냥 울어 지낼 터이냐
네 울음소리에 덮여, 한 말 가웃도 넘는 내 설움은 각시탈 뒤에 멈칫 서 있다
너의 골 깊은 서러움은 알고 싶지도 않은데 데 절반도 안 되는 나의 눈물을 자꾸 멀겋다 하지 말고
이쯤에서 둘이 그냥 생각 말고 나서서 아무 것이나 몸 얹어 놓고 잊은 듯이 흐르다가 턱 하고 어딘가에 걸리면
거기. 모조리 쏟아놓고 오자 마카 다 내던지고 오자
박현주 시인 / 밤참 먹는 남자
스산한 밤길 흐느적거리는 긴 그림자 끌고 모퉁이 돌아가는 남자 처진 어깨 위로 외등 불빛이 내린다. 무척이나 허기진 표정
한가했던 오찬의 풍요는 서랍 속 어느 파일에 끼워 두었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일은 기필코 마무리를 지으리라. 다시 시장기가 찾아 든다.
곱창구이집 연기는 그림자를 꽉 잡은 채 절대로 놓아줄 맘이 없고 이럴 때 눈치 빠른 친구 하나쯤은 있어도 좋으련만 모퉁이집 아지매 어묵 국물 맛이 일품인데 남자는 오늘도 배가 고프다.
박현주 시인 / 달맞이꽃
가까이 오세요 당신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요 깊고 맑은 눈을 보고도 싶어요 그리고는 새벽이 올 때까지 미뉴엣을 추어요 흐르는 은하수의 선율에 따라 박자 하나라도 놓치면 안돼요
내게서 눈을 떼지 마세요 당신의 사랑만으로 피고, 피는 애잔한 달맞이꽃 기다림은 나의 몫이고 떠남은 당신의 몫인 걸 애시당초 잘 알고 있답니다
밤이 깊어가요 조금만 더 가까이 오세요 조금만 더.
박현주 시인 / 어떻게 딸기가 익죠? 여덟 동 비닐하우스에 딸기를 따러 갔죠 처음부터 어두운 영혼은 딸기와는 좀 다른 말 어둡게 그냥 둬야 한다는 말을 그냥 둘 수 없어 파고들 흙 한 점 없는데 꽃 피고 열매 맺고 질 줄 모르는 딸기 공장에 갔었는지도 모르죠 차양에 잘린 바람이 딸기를 붉히는 곳을요 처음부터 어두운 시간은 다 시들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따는 것 같아서 병이 든 게 아닐까 딸기를 의심하면서 처음이 어디부터인지 알 수 없어 하우스와 하우스, 비닐과 쇠파이프와 포장재까지 텅 빈 몰골이 되어갔는지도 몰라요 생산하고 포장하고 배송하는 밤의 컨테이너를 맴돌기도 했어요 녹슨 쇳조각 같던 달이 살 올라 폭신한 슈퍼문이 되는 것도 보았어요 검고 늙은 상상을 털옷으로 걸치고 개가 지키고 집은 밖이 환할수록 더 어둡고요 울음이 아예 없다고는 못해요 아니라 아니라 해도 밤은 길고 문은 닫히고 개는 여전히 개의 밤을 보내요 봄엔 딸기가 속한 봄날이 익어가고
박현주 시인 / 반지
빨간 루비는 눈시울을 비춰주는 거울 깎아낸 보석이란 어느 부분을 확대하거나 일그러뜨리며 제멋대로지 손가락 위에서 반짝이는 너의 뒷모습
어느 날은 눈, 어느 날은 코, 어느 날은 비뚤어진 입술로 밤마다 다른 문 앞에 서 있지
네가 아니라면 한번 잡아보고 싶은 날개 닮은 어깨뼈
새벽 세시, 물고기의 울음 같은 것을 지나가지 가슴이나 허벅지에서 나온 것 같은
너와의 저녁 약속을 후회하며 어제는 진한 과즙 같은 오줌을 흘려보냈어
속옷 위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를 집어 변기 속에 넣었지 가볍게 떠오르는 그림자
낱글자 하나 방바닥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 같아 손바닥으로 쓸어보지 햇살 끝에 떨리는 손마디 가는 손가락 사파이어처럼 에머랄드처럼 둥근 링 위에서 반짝이는
내 손가락을 잡고 있는 위험한 거울의 법칙
박현주 시인 / 봄날의 칩거
너를 만날 수 없음은 맘에 춘빙(春氷)을 가두고 있음이다 천공으로 퍼지는 태양도 나를 가둔 창 밖의 사건일 뿐 차라리 네 푸른 수의라도 잠시 빌려 두를 수 있다면 독방이라도 외롭지 않을 꿈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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