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강영은 시인 / 가을의 중력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4. 08:00
강영은 시인 / 가을의 중력

강영은 시인 / 가을의 중력

 

 

날개에 실린 것이 하늘인 줄 모르고

잠자리는 날아가는 하늘을 두 날개에 묶는다.

접혀진 날개가 펼쳐지면 가을이다.

잠자리가 없어도 날개를 펴면 코스모스가 된다.

혼돈 속에 익어온 햇살이 씨앗을 내밀면

코스모스가 완성된다.

붕대를 모가지에 감고 걸어가는 사람이

코스모스처럼 웃으면 절반의 가을이 지난 것이다.

모가지 끝에 피어나는 우주와 하나뿐인 세상과

당신과 보낸 가을 중에서

어떤 법칙이 코스모스의 뇌 안에서 작동한 것일까.

얼룩진 손가락을 펴들고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신음하던 말을 쏟아낸다.

손에 든 그것이 지구인 줄 모르고,

눈에 든 그것이 우주인 줄 모르고,

내가 지닌 언어는 코스모스를 운반한다.

바람처럼, 햇살처럼, 바닥없는 것들이

바닥이 되는 계절이 가을이다.

잠자리를 펼치면 당신과 나 사이가 투명해진다.

그렇다 한들,

하늘을 붙들어 맨 날개에 대해

당신이 가진 코스모스 외에 어떤 비유가 필요한가,

이 맑은 가을날, 어떤 주석이 더 필요한가.

 

 


 

 

강영은 시인 / 숲

 

 너는 한 번도 나를 마중 나오지 않는다. 등을 돌리거나 달아나지도 않는다. 나의 그늘을 판단하거나 분석하지도 않는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생각의 숲을 이룰 뿐, 빗소리에 잠겨 걸을 때도 낙엽 진 길을 밞고 간 사람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칡넝쿨을 따라가다 보면 바람 부는 세상이 온통 굽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아, 만목의 자세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이 키 큰 교목을 죽이고 그렇게 너를 의지하다 보면 관목에 걸려 바둥대는 새처럼 나도 울게 되는 것일까,

 너는 수만 마리 물고기 떼를 이끌고 온다. 쏴아. 쏴아아~, 적도의 결계를 바꾸는 물결 소리로 윤슬에 빛나는 바다를 뒤집는다. 그럴 때, 나는 소리에 갇힌 섬이 된다,

 

 고단한 사막이 너를 등지고 걸어 나간다. 우연히 부딪힌 초라한 생각에 나는 그만 무서워진다.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길이 있다는 것 외에 너의 표정과 감정을 알지 못한 나는 너에게 닿는 길을 알지 못한다.

 

 안녕하세요? 마주 오던 사람이 손을 내민다. 섬배롱나무처럼 입과 귀를 연 우리는 서로의 나무가 된다. 외로움은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구나,

 

 노을이 지고 있었고 쏟아지는 어둠 속에 오래도록 서 있었는데, 흰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네가 있었다.

 

 너는 나의 육신을 흠향하고 나는 너의 침묵에 귀의한다. 너는 나의, 새로운 종교, 연둣빛 성전이 하늘거리기 시작한다.

​​

-계간 『시와 사람』 2023년 가을호

 

 


 

 

강영은 시인 / 수평선

 

​ 모래밭에 누워 쳐다보면 옥양목 저고리처럼 사뜻하게 하늘 끝에 걸려 있더라.

 일몰의 예촌망에 오르면 타닥타닥 타는 솔방울처럼 바다 끝에서 타고 있더라

 4월의 한라산 오를 때면 피다 지친 철쭉꽃처럼 꽃잎 떨구며 따라오더라

 범섬이 보이는 고갯길에선 독사처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흘러내리는 길을 지키고 있더라

 눈을 흘겨도 고개를 갸우뚱해도 어깨를 들썩이지 않는 수평선,

 잠자리를 옆으로 날려 보내도 너는, 언제나 눈높이에 걸려 있더라.

 세상의 모든 파도가 너의 감정이라 해도 가슴으로 우는 너의 수평에 기대어

 바닷가에 이르면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니,

 그 비결이 무어냐고, 내 사랑하는 이가 물으면 눈높이에 있다고 말해줄래?

​​

-계간 『시와 사람』 2023년 가을호 발표

 

 


 

 

강영은 시인 / 시인(詩人)

 

 

 천리 밖도 단숨에 낚아챈다는 검 한 자루 둥글게 허공을 베며 난다 차마 고도를 넘어 온 바람에 그리움의 날을 세워보지만 무디어진 칼날은 새털구름에 박혀 서럽게 운다

 

 사랑을 찾아 고도를 높였던 날들은 갔다 지금은 다만 허공무덤을 뒤지는 나날, 어디서 싱싱한 날것을 만날 것인지 양날에 걸쳐진 새벽이 빛을 잃을 때까지 붉게 물든 구름의 안쪽을 소리 없이 배회한다

 

 몇 개의 산을 베어넘겼지만 어둠을 가른 날개의 종적은 묘연하다

 

 날개란 더디고 느리게 가르는 검. 한 마리 검독수리가 굶주려 죽는 이유는 움직이는 모든 것을 찰나에 지나쳤기 때문이다

 

 천 개의 칼날에 토막 난 시공, 캄캄한 절벽에 정수리를 들이박은 하늘 한 귀퉁이가 숭덩 떨어진다 천문박명에 물든 부리는 벌어지지 않는다

 

 천야만야, 날을 벼리고 천길 벼랑 위로 솟구친 검 한 자루, 절대고독의 죽음을 가른다

 

 


 

 

강영은 시인 / 빈 가지에 나를 널다

 

 

지난 여름 자벌레가

갉아먹어 시들해진

모과나무 가지를 베어 버렸다

 

가지에 걸릴 때 마다

흔들리던 하늘

송두리째 내려앉는 오늘

 

눅눅해진 이불 호청을 뜯고

제 속을 집어넣은 내가

세탁 되는지

나는 자꾸 세탁기를 돌린다

 

코 끝에 닿는 싱그러운 바람 속

반듯하게 펴놓은 이불 호청처럼

모과나무 가지에 나를 걸어 놓는다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물관의

파릇한 기억......

 

딱딱한 나무껍데기를 뚫고

몇 방울의 수액을 흘려 보내는

초봄의 햇살을 움켜쥐었다

 

울컥 목울대를 넘는

빈가지 하나

나는 지금 뽀송하게 마르는 중이다

 

 


 

 

강영은 시인 / 청춘의 완성

 

 탁자 위에는 늘 물컵이 놓여 있었다

 

 너는 왜 물만 마시니?

 

 눈앞을 오가는 어항 속의 금붕어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너는 묻고 있었지만 물풀 사이 오버랩 되는 물의 눈동자, 일렁이는 네 눈동자는 작은 어항 같아서

 

 숨을 헐떡이며 목마름을 이겨내던 나는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였다

 

 청춘은 고상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은 음악 같아, 지하의 음악다방에서 청춘을 소모 하는 동안 금붕어와 나 사이 흐르는 건 베토벤도 슈벨트도 아니었다

 

 “어머니, 내 삶은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데 난 내 삶을 내팽개쳐 버린거에요”

 

 보헤미안 랩소디*를 칼 복사하던 가슴이 무대이고 악기이던 그때, 너를 기다리는 시간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레코드판 위를 도는 바늘처럼 너를 기다렸던 것 같다

 

 무수한 기다림과 스파링하는 동안 잃은 것과 얻은 것 중, 어느 것이 내 것이었을까,

 

 떨리는 손으로 물잔을 잡던 장면이 깨졌을 때, 미래라는 헐렁한 옷을 입은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출렁이지 않는 탁자처럼 물의 눈동자가 고요해졌을 때 나의 청춘이 완성되었다 푸름이 너무 깊어 물기를 뚝뚝 떨구던 그 시절,

 

 푸르다는 이유만으로 방랑자의 광시곡 외엔 가진 것 없는 나는 나를 용서했다

 

* Queen의 노래

​​

계간 『다층』 2022년 겨울호 발표

 


 

강영은 시인

1956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 제주교육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문예창착대학원 졸업 (문학석사).  2000년 계간 《미네르바》 등단. 시집 『스스로 우는 꽃잎』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풀등, 바다의 등』 『마고의 항아리』 『상냥한 시론詩論』 등. 2015년 세종 우수도서. 2012년 한국시문학상, 2016년 한국문협 작가상 2018년 문학청춘 작품상 수상. 서울과학기술대학 평생교육원 시창작 강사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복지위원, 『문학청춘』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