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추인 시인 / 닿지 못한 주소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5. 08:00
김추인 시인 / 닿지 못한 주소

김추인 시인 / 닿지 못한 주소

 

 

저 소실점 바깥은 여백일 것이네

날마다 낯선 하루들이

날마다 날선 하루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소름 돋는 어제를 디밀어도

여린 것들이 날마다 행성을 떠나도

그대, 방싯 말을 거는 것은

비밀한 주소 쪽지 하나 쥔 때문이네

술패랭이나 혹등고래의 노래가 닿을 그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그

여백 너머의 주소 하나 틀어쥔 채

그대, 햇살 매단 자전거 바퀴살 씽씽

달리고 있네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 꿈을 달리네

 

-시집 《행성의 아이들》(서정시학, 2012)

 

 


 

 

김추인 시인 / 거울

-homo iousian-*

 

 

 비어서 가지런하구나 유리의 집

 그대의 화법을 배우고 싶다

 수수 만만 저 빛의 점들

 어떤 빛의 손이 닿아

 평면 위 3D, 입체의 좌표를 찍는 것이냐

 

 붉은 사과의 곡면과 번쩍이는 나이프의 빛 튀김까지 필사해

 옮긴 것이냐

 

 거울 속에는 칼을 든 내가 있고 살의를 숨긴 내 이중적 심상이 늑골 아래 감춰져 있음을 누구도 아는 척 않는다만

 

 그대는 흰 속살 드러낸 사과의 미각적 유혹을 아는 것이다 향그로운 홍옥의 맨살을 정확히 좌표 찍고 재현해 내는 것이

 

 일순간에 색들이 옮겨지고 살결의 각도를 따라 한 점 한 점 카피 되었을 거울의 점묘법

 

 복제된 허수의 내가

 유리의 스크린 속에서 씨익- 웃고 있는

 거울 속의 나는 메타버스 속

 나이면서 내가 아닌

 

* 호모이우시안: 유사본질의 인간

 

-격월간 『현대시학』 9~10월호 발표

 

 


 

 

김추인 시인 / 별 여행자의 니르바나

-homo viator-*

 

 

 행성의 사소한 밤을 위하여

 별이 빛나고

 바람이 서늘합니다

 아직 신성의 말씀은 멀고

 빛의 나라에선

 아무 메시지가 없습니다

 나, 선택한 바 없으나 모든 것이 나로 인했고 내가 되었습니다. 다중우주를 넘보는 나는 모래알 우주, 티끌

 

 좀생이별이 멀리서 웃습니다

 썩소는 아니고요

 빙긋, 빙그레

 두어 번 더 반짝였거든요

 

 머나먼 반짝임은 물리적 신성의 영역, 파동이 선행파를 밀며 넘으며 밀어가 닿을

빛의 문을 생각케 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만이 아득히 펼쳐진 평행우주의

 

 우리별을 타고 황도의 마지막 트렉을 도는 나는

 사막을 떠도는 에우리알레,

 서른한 번째, 최후의 윤회를 끝내면

 아무것도 아닌 ‘無’

 눈부신 빈 자리, ‘ ’일 것입니다 ‘無’조차 없는

 

*호모 비아토르: 떠도는 인간

 

-계간 『프랑스 시협』 2023년 가을호 발표

 

 


 

 

김추인 시인 / 판도라의 항아리

-homo duplex-*

 

 

 인간이 지나간 곳은 흔적이 남는다

 우리 욕망의 상자는 새로움, 혹은 호기심이란 이름으로 편리와 부富, 미래의 뚜껑을 불의 뚜껑을 틈만 나면 열어젖혔다 자연의 고요한 잠을 깨웠다

 

 우리 별다른 생각 없이 만들고 버린 것들이

 바람을 타고

 조류를 타고

 플라스틱 쓰레기가 쌓이는 해안

 우리 매일 마시는 생수통이며 고추장통 라면봉지, 폐기물들 해류를 타고 온 글로벌 쓰레기들의 바스라진 미세플라스틱이 입으로 피부로 역류해 오고 있다

 

 6차 대 멸종은 이미 시작되었고 매일 백여 종이 사라진다니 여린 것들 기다려 주지 않고 삶의 행간을 내려선다니

 오늘도 재난 문자를 받는다

 코로나에 대한

 미세먼지에 대한

 먼나라의 재앙에 대한

 우리 욕망이 낳은 판도라의 경고음,

 핸드폰이 자꾸 운다

 

 인류 멸종, 어디쯤 줄 서 있을까? 임계점이 멀지 않다

 

*호모 듀플렉스, 이중적인 인간

 

-계간 『포에포엠』 2024년 봄호 발표

 

 


 

 

김추인 시인 / 플라스틱에게

 

 

진실로 그대의 잘못은 아닌데

우리, 죽음의 경계에 다가서고 있네

죽음이란 블랙홀로 달려가고 있네

손발 맞지 않은 세기의 정책이

무기력한 지성의 결단이

우리네 흐릿한 의식이

나의 삭고 낡은 나이가 어둠의 문 앞에 서있네

가볍고 예쁜

질기고 값싼

그대가 우리 행성을 알록달록 덮어가네

플라스틱, 그대의 본명은 ‘아세틸렌’

나 쓰는 책도 가방도 커피 잔도 옷가지도

다, 다, 석유와 석탄의 연금술이라고

그러니까 탄소가 행성의 대기를 무겁게 끌고 가겠는데

여린 목숨들이 사라지고 있겠는데

마약 같은 그대를 끊자 하고

집안의 용기를 다 내다 버렸는데

사흘 안 가 집안 곳곳 다시 들어앉는 그대여

폴리에스티렌 옷을 뻗쳐 입고 나가는 나,

나 그대를 끊어내지 못하네

1회용 컵 커피를 받아들고 환하게 웃는

나와 너의 슬픈 구도

잠시만 더 사랑하자

차차 방도가 나올 거야

우리는 계속 미루고 있네

이제는 뚝! 참으로 끊는다 해도 늦은 이때에

 

-계간 《미네르바》 2022년 여름호 발표

 

 


 

 

김추인 시인 / 과녁

 

 

 밭고랑 독새풀 하늘 쪽으로 깃을 풀고 있습니다

 

 허공의 거기를 과녁으로 아는지

 두렁밭 콩대도 엉겅퀴도 바라보는 곳입니다

 

 저 빈곳을 향하여 무모하게 쏘는 화살촉들 눈물이 묻어 눈부시고 하늘이 되지 못한 구름송이들 늦은 노을에 물이 듭니다

 

 강물도 물들다가 저물다가 머리 풀고 다시 하늘로 오르는 그곳입니다

 땅에 발 딛고 선 것들은 다 과녁 하나씩 붙들고 꿈을 꾸는 듯합니다

 

 공이 골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김추인 시인 / 봄, 그 발긋거리는 것들

 

 

무희들이 돌아올 시각이다

이정표 하나

안전표지 한 조각 없이

무사귀환 할 수 있을까

하늘빛도 물빛도

파릇한 옹알이 눈치 챘지만

자고 깨면 새로 당도한 풋것들의 북적거림에

등달아 마음이 뜬다

취재라도 하듯

카메라를 치켜들고

봄의 경계를 쑤셔보지만

번번이 그들 착지시점을 놓친다.

 

푸른 드레스 밑 흰 맨발이 보고 싶다

한밤중 세상의 잠 속을 빠져나가

가만가만 서로를 부르는 소리 듣고 싶다

오늘밤 눈꺼풀 아래 초막을 치고 엿보면

푸른 족속들 흰 발꿈치가 보이지 않을까

춤추는 토슈즈 얼핏 드러나지 않을까

 

발치고 울타리 치고

제 살비듬 하나도 들키고 싶지 않던 여자가

웬일로 웬일로

철 이른 뜰 앞에서

스륵 치맛살을 내린다

꽃무덤 둘, 라일락 꽃숭어린가 싶은데

깜박깜박 커스 비슷한 것이 뜨고 있다

내부로 가는 여자의 통로가

좀씩 열릴라는지

어쩔라는지

 

 


 

 

김추인 시인 / 목향木香

-생명의 환幻

 

 

 악기장이 새끼 목수는

 다듬어지고 있던 벽오동 옆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무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입되는 생멸의 시간

 숲의 큰 작은 불안세계를 덮으며

 벼락 맞은 오동은 명금을 약속했다

 

윽고 가얏고가 제 울음을 짚어내는데 천년 나이테를 비워낸 나무의 울림통이 소리를 머금었다 토하는 가얏고가 톱날 같은 대팻날 같은 캄캄하게 헤집고 가던 소리의 기억을 마른 목질 아래 눌러두었던 산조 가얏고가 온몸을 흔드는 떨림으 로 제 노래를 풀어내는데

 시김새가 기러기발을 줄줄이 꺾어 넘고 남지나해를 건너 두견 울음을 필사하던 손끝이 또 산맥 하나 더 넘어가는 동안 악공의 오음은 내내 진자줏빛이었다

 

 죽사리치는 견딤 없이 나무의 상처 속에서 어찌 용천하는 해율(海律)을 풀어낼 수 있으리

 

 한 아침이 지나고 또

 어느 먼 곳에서 오동 밑동 깊숙이 도끼날이 드는지

 전생의 숲에서 흐릿한 기억처럼 오는

 생목(生) 향(香)

 나무의 이야기는 끊일 듯 끊일 듯

 소년에게서 어린 목수를 꺼내고 있었다

 

-《현대문학》2013년 6월호

 

 


 

 

김추인 시인 / 중의적 말의 유목에 대하여

 

 

말들이 하이에나처럼 험악해지는 시절이라했다

허물고 덜어내고 되세우는 도시의 굉음 속

낮은 목책은 치장일 뿐

요즘 와 말이 슬쩍 나갔다 돌아오곤 한다

어떤 말은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다

 

어린 말이 처음 눈뜨던 광야가 있었다

그곳에 가면 내 말이 있을 것이다

풀을 뜯고 초원을 달릴 것이다

야생의 눈빛으로 더 먼 곳을 내다보며

 

믿지 않았지만 휘파람을 불었다

거짓말처럼 멀리서 흙먼지를 풀며 달려오는 말발굽소리

모래의 길 하나를 끌고 내 말이 돌아오고 있었다

세상을 짚어본 눈빛은 깊고 넉넉하리라

 

정강이가 튼튼해진 문장, 밀의 관절이 유연해 보인다

 

 


 

김추인 시인

1947년 경남 함양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프렌치키스의 암호』 『행성의 아이들』 『오브제를 사랑한』 『해일』. 2016년 제9회 한국예술상 수상, 2010년 만해‘님‘문학상작품상 수상, 2011년 서울 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6년 한국의 예술상 수상, 2017년 제8회 질마재문학상, 2021년 제7회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