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밥은 하늘입니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5. 08:00
김지하 시인 / 밥은 하늘입니다

김지하 시인 / 밥은 하늘입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은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김지하 시인 / 봄

 

 

봄이다

꽃잎 피었다

이파리도 함께 피었다

한여름 같고

목련

진달래 개나리

철쭉 라일락 복사꽃 능금꽃

한꺼번에 피었다

이게 무슨

봄인가

 

먼 우주에서

운석 날아온다는

불길한 소식

 

강물에는 붕어들

떼죽음

죽음

이게 무슨 봄인가

 

담배 끊고

찬찬히

내속

들여다봐야겠다

 

-시집 <중심의 괴로움>에서

 

 


 

 

김지하 시인 / 새봄. 2

 

 

삼월

온몸에 새순 돋고

 

꽃샘바람 부는

긴 우주에 앉아

진종일 편안하다

 

밥 한술 떠먹고

몸아픈 친구 찾아

불편한 거리를

어칠비칠 걸어간다

 

세월아 멈추지 마라

지금 여기 내 마음에

사과나무 심으리라

 

-시집 <중심의 괴로움>에서

 

 


 

 

김지하 시인 / 사랑 얘기

 

 

시귀신

정희가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라고

시집 제목을 달았다

 

금방

내 그물에 와 걸린다

 

즉각 수정한다

'모든 사랑은 짝사랑이다'라고

 

물론

안다

 

사랑이

얼마나 순정하고 고운 것인지

그것도 아주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얼마나 쓰라리고 병신스러운지

 

나는 그걸 안다기보다

그냥 몸으로 아파보았다

 

절충의 길은 없었다

 

첫사랑이 곧 짝사랑이었던 내겐

이런 경우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 / 절, 그 언저리

 

 

그 언저리 무언가

내 삶이

있다

 

쓸쓸한 익살

달마達摩안에

 

한매寒梅의 외로운 예언 앞에

 

바람의 항구

서너 촉 풍란風蘭 곁에도

 

있다

 

맨끝엔 반드시

세 거룩한 빛과 일곱별

 

풍류가 살풋

숨어 있다

 

깊숙이

빛 우러러 절하며.

 

 


 

 

김지하 시인 / 화개(花開)

 

 

부연*이 알매* 보고

어서 오십시오 하거라

천지가 건곤더러

너는 가라 말아라

아침에 해 돋고

저녁에 달 돋는다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

새파란 별 뜨듯

붉은 꽃 봉오리 살풋 열리듯

아아 '花開'

 

*부연: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로 처마 끝을 위로 들어올려 모양이 나게 한다. 남성 yang(阳) 이미지.

*알매: 기와를 일 때 산자 위에 이겨서 까는 흙. 여성 yin(阴) 이미지. 부연은 떠받들고 알매는 그 떠받듦을 받쳐준다. 모든 생명은 그러나 부연이 아니라 흙에서 태어남.

 

 


 

 

김지하 시인 / 거울 겨울 2

 

 

설운 것이 역사다

두려운 것 역사다

두려워도 피할 수 없는 것 역사

아하

그 역사의

잔설 위에 서서 오늘 밤

별밭을 우러르며

역사로부터 우주를 보고

우주로부터 역사를 보고

잔설 속에서 아리따운 별밭을 또 보고.

 

 


 

김지하(金芝河) 시인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본명: 김영일.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