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가림 시인 / 달팽이의 하루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5. 08:00
이가림 시인 / 달팽이의 하루

이가림 시인 / 달팽이의 하루

 

나에겐

단번에 피안의 기슭으로

훌쩍 건너뛰는

초월 같은 건

없다

나보다 무거운

집 한 채를 지고

낮은 포복으로 가는

진땀나는 하루

가도가도

첩첩 안개 진흙밭,

그래도 나의 촉수는

오늘의 미지를 더듬는다

나에겐

단번에 문지방을 뛰어넘는

높아뛰기 같은 건

없다

 

 


 

 

이가림 시인 / 팽이

 

 

내 몸을 쳐라, 더 세게

내 몸을 쳐라, 더 세게

내 몸을 쳐라, 더 세게

 

비틀거릴수록

더욱 매섭게 내리쳐라

 

온몸을 휘어감는 채찍 아래

터지는 핏멍울

 

이 몸부림

이 현기증 없이는

한 순간도

홀로 꼿꼿이 서 있을 수 없어라

 

산다는 것의 비겁을

증얼거릴 사이도 없이,

산다는 것의 설움을

소리 죽여 울 사이도 없이,

스스로의 둘레를 핑핑 돌고 있는

숨가쁜 목숨

 

끝내 오고야 말

황홀한 죽음 같은 정지(靜止)의

그 뜨거운 땅

한복판에

거꾸러지고 싶어라

 

내 몸을 쳐라, 더 아프게

내 몸을 쳐라, 더 아프게

내 몸을 쳐라, 더 아프게

 

-시집 『슬픈 반도』 《예전사》에서

 

 


 

 

이가림 시인 / 콩돌 기슭에서

 

 

55년 동안

등 돌리며 살아온

남녘 사람 손 하나와

북녘 사람 손 하나가

맞잡은 날

장산곶의 꽃게들도 어리둥절해져

백령도 어부들의 그물에 마구 엉겨 붙었습니다.

콩돌 기술의 자갈들이

온몸으로뒹굴며

닳아지며

자갈자갈 자갈자갈 밤낮으로 불러대는 소리

한사코 귀먹은 척

엎드려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2000년 6월 13일 부터 15일까지 2박 3일간 평양에서 열린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에 성사된 정상회담 후에 쓴 작품.

 

-시집 「콩돌기슭에서」 (시와시학사,2000)

 

 


 

 

이가림 시인 / 풀등

지난 여름

대이작도에 갔다가

초록 바다의 등뼈 같은

풀등을 보았다

섬 사람들은

밀물 때엔 사라졌다가

썰물 때엔 나타나는

시한부 모래섬이라 했다

하지만 내겐

언뜻 잔등을 드러낸

거대한 바닷동물 베헤모의 유영(遊泳)이거나

숨은 백상어의 포복(匍腹) 같았다

하루에 한번씩

그렇듯 유유한 물결에 실려 왔다가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는 신기루,

그 풀등이

바다에만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시장에서건,

골목길에서건,

지하철의 군중 속에서건,

무시로

내 앞에 다가와 아른거리는

희미한 옛사랑의 안개꽃

하루의 썰물 때엔

한사코

내 안에 그늘을 드리웠다가

가뭇없이 지워지곤 한다

-계간 『황해문화』 2011년 겨울호 발표

 

 


 

 

이가림 시인 / 갈색 머리칼의 애인의 장난

 

무한히 조그만 질투에도 바람에도

불을 켜는 한마리 암캐이고 싶어요

당신의 입속에 발가락을 집어 넣고

당신의 입속에 긴꼬리를 집어 넣고

당신의 입속에 빨간 혀를 집어 넣고

아주 바보의 왕국에서나 있는 웃음을 웃으면서

몰래몰래 축축한 잠으로 가고 싶어요

밝은 곳에서 만져보고 싶어요 당신의

계단 그 아래 계단을 내려가

두레박줄이 닿지 않는 육체의 우물 속에

가라앉은 슬픔과 외로움을 만져보고 싶어요

항상 저의 가장 부드러운 데를 찌르며

「너는 나의 고양이야!」당신은 말하고

제 입술에 한 방울의 기쁨을 떨어뜨리지만

도대체 끝없는 바램의 끝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사랑의 얼굴은 무엇일까요

 

 


 

 

이가림 시인 / 하늘의 뿌리

 

 

위를 향해 가지를 내뻗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고 있으면

한없이 천국 가까이 다가가려는

하늘의 뿌리

목마른 성자의 기도하는 손 같아서

그 앞에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하늘에 뿌리를 박고

캄캄한 지옥의 심연 속으로

한사코 팔을 내뻗고 있는 것이리니

 

나도 겨울나무처럼

하늘에 뿌리 박고 서서

땅속 깊이

가지를 내뻗으리라

 

-경인일보 2017.7.14

 

 


 

 

이가림 시인 / 나누어진 하늘 아래서

 

 

나누어진 두 개의 하늘을

가로질러가는

가을 기러기떼 그림자

창호지에 얼비칠 때

시인이라는 자가

어찌 무심히 그 행렬을 그리고만 있으랴

 

사십 년 동안의 비에

쇠다리가 녹아버리고

억센 갈대 무성한 땅 멀리

흐르지 못하는 강이 괴어 있음을

시인이라는 자가 어찌 소리 죽여 울고만 있으랴

 

불같은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잉크

숨쉬는 펜으로

저 들판에 잠든 돌들을

깨어나게 해야 하리

 

저 언덕에 엎드린 풀들을

일어서게 해야 하리

 

저 골자기에 파묻힌 뼈다귀들을

소리치게 해야 하리

 

아아

저 찢긴 하늘가에 떠도는 아우성들을

얼싸안게 해야 하리

 

뚝뚝 흐르는 피의 잉크

부릅뜬 펜으로

 

-시집 <순간의 거울> (1995. 창비)

 

 


 

이가림 시인 (1943~2015)

1943년 만주에서 출생. 2살 이후부터 전주에서 거주.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루앙대학교대학원 불어불문학과 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빙하기」 당선. 시집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슬픈 반도> <순간의 거울> <내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별>. 산문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 에세이집  <미술과 문학의 만남>. 한국펜클럽번역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2015.7.14 루게릭으로 투병 중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