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허형만 시인 / 당신에게 매달리고 싶다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5. 08:00
허형만 시인 / 당신에게 매달리고 싶다

허형만 시인 / 당신에게 매달리고 싶다

 

 

하늘에 매달린 빗방울처럼

나도

당신에게 매달리고 싶다

 

매달리다가 동백꽃처럼 톡 떨어지거나

매달린 채 그대로 말라버릴지라도

 

당신의 눈에

가슴에 손끝에 매달려

영원히 당신과 함께이고 싶다

 

 


 

 

허형만 시인 / 만났다

 

 

숲길을 거닐 때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참나무

나를 위해 기도하는 멧새

나를 위해 기도하는 풀잎

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를 만났다.

 

오늘은 평생을 나와 함께 걸었던

그의 연약한 뒷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그를 살포시 껴안아 주고는

십자가 앞에 꿇어앉은 그를 일으켜 세워

나의 식탁으로 모시고

보림사 큰스님이 손수 덖어 보낸

우전차를 그에게 대접했다

그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낯설지 않은 듯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너무도 멀고 너무도 가까웠던

나와 그는

참으로 오랜 시간의 숲길에서

서로를 향해 걷고 있음을 알았다.

 

 


 

 

허형만 시인 / 한겻의 숲

 

 

아침나절, 이 숲

의 나뭇잎들이 온통 별빛이에요.

사람들은 한겻이라 햇발에 반짝인다 생각

할 것이나 아니에요. 그것은 편견 때문이에요.

하늘이 가까울수록 더 빛나는 저 이파리

를 보세요. 거문고자리의 직녀성과 독수리자리의 견우성

이에요. 주변의 별들이 은하수처럼 출렁이는 숲

은 지금 조용한 축제를 벌이고 있어요.

여기서는 밤과 낮의 구별이 없어요.

사람들만이 한사코 낮과 밤, 너와 나, 좌우

로 나눠요. 그것은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욕망

때문이에요. 보세요. 불꽃처럼 터져 오르는 공기

를. 저 별들의 숨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번지는 파동

을. 나는 지금 우주의 중심에 둥둥 떠 있어요.

 

 


 

 

허형만 시인 / 붉은 핀 하나

 

 

붉은 핀 하나

길바닥에 오도마니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어느 소녀의 머릿결에서 빠져나왔을까

날마다 산책하던 길

어제는 못 보았는데 오늘 새로운 손님을 만나다니

더 추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야 하므로

붉은 핀 하나

낯설지만 오래전 만났던 것처럼

손바닥에 꼬옥 쥐고 감싸주어 보는 것인데

어린애처럼 야생 나비의 날갯짓 소리에 귀 기울였을

머리핀을 잃어버린 소녀를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인데

그 소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가던 길 멈추고 찾고 있을까

붉은 핀 하나

 

 


 

 

허형만 시인 / 보체리 연꽃

 

 

 정진규 선생님이 계신 보체리에 갈 때마다 이태리 맹인가수 안드레아 보첼리를 떠올리곤 했지 나는 이 가수의 노래를 듣고 시「영혼의 눈」을 썼고 문학사상사에서 『영혼의 눈』 시집도 냈지 지금도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노라면 정진규 선생님이 손수 파고 키우셨던 안성시 석가헌 앞 보체리 연못의 그 밝은 연꽃들을 떠올리지 선생님과 나란히 서서 피어오르는 연꽃에서 문화연필 깎을 때의 향을 들이마셨던 기억을 떠올리지 지금 주인은 멀리 떠나고 안 계시지만 보체리의 연못은 주인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지.

 

 


 

 

허형만 시인 / 이제야 알았어요

 

 

우린 상상도 못했지요.

바이러스가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앗아가리라는 것을.

서로 손도 잡을 수 없게

서로 껴안을 수도 없게

서로 키스도 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어요.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랑이 얼마나 절실한지.

이제야 비로소 알았어요.

당신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를

비누가 얼마나 제 몸을 희생하는가를

지상에 깔린 햇살이 얼마나 황홀한가를.

그동안 잘 있는지 별 탈 없는지

안부도 제대로 못 전하다가

이제야 안부를 물어보고

서로의 건강을 염려해

두 손 모아 올리는 간절한 기도가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지

비로소 알았어요.

 

 


 

 

허형만 시인 / 파도

 

 

파도를 보면

내 안에 불이 붙는다.

내 쓸쓸함에 기대어

알몸으로 부딪치며 으깨지며

망망대해

하이얗게 눈물꽃 이워내는

파도를 보면

아,우리네 삶이란

눈물처럼 따뜻한 희망인 것을.

 

 


 

 

허형만 시인 / 녹을 닦으며

-공초供草14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물랐다

나는,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 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허형만 시인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와  성신여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73년《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청명』 『풀잎이 하나님에게』 『모기장을 걷는다』 『입맞추기』 『이 어둠속에 쭈그려 앉아』 『공초』 『진달래 산천』 『풀무치는무기가 없다』 『있으라 하신 자리에』 등. 시선집 『새벽』, 활판시선집 『그늘』 등. 평론집 『시와 역사 인식, 『영랑 김윤식 연구』 등.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전라남도 문화상, 우리문학작품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목포대학교 인문과학대학장 겸 교육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