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성부 시인 / 이 볼펜으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3. 12:45
이성부 시인 / 이 볼펜으로

이성부 시인 / 이 볼펜으로

 

 

시를 쓰는 마음은 다른 마음과는 다르다고

사랑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우리는 배웠어 교과서에서.

 

이 볼펜으로

사랑을 적기 위하여

한 점 붉디붉은 시의 응결을 찍기 위하여

오늘 밤 나는 다른 마음이 되고 싶다.

좀 멀리 다른 데를 보고 싶다.

 

그러나 가령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아픔을 지켜볼 때, 그가 과연 견디어 낸 삶이

발버둥과 아우성이라고 느껴질 때,

그는 정말로 죽음을 죽고 있다고 발견됐을 때,

 

그리하여 그들이 잃을 수 있는 것은

죽음밖에 더 다른 것이 없음을 알았을 때,

죽음뿐으로 다른 삶이 태어날 수 있었을 때,

죽음은 새로움의 밑거름이 되었을 때,

 

그 크낙한 싸움의 이김을 보았을 때,

힘을 가졌을 때.

나는 다른 마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아아 다른 마음은 이토록 나를

얽매이게 하는구나, 나를 더없는 용기로 뭉쳐주며

그러나 나를 끝끝내 묶어버리는

시·문화·우리들의 사랑·교과서 따위.

 

형편없는 술은 쉽사리 사랑을 버리게 하고

쉽사리 삶을 깨닫게 한다.

교과서는 틀린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가르치지만, 그것들은 부지런히 말하고

큰소리로 외치지만,

 

이 볼펜으로 이 사랑으로 시로

나는 베트남으로 갈 것이냐 온갖 것 그만두고

대통령을 할 것이냐 술 마실 것이냐.

 


 

이성부 시인 / 귀향

 

 

해마다 봄으로 떠난 사람들이

낯붉히며 도망가듯 떠난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씩 돌아온다.

죽지 하나가 찢겨진 채

그리하여 그들은 돌아온다.

모르는 땅의 헤맴이란

얼마나 더디고 더딘 꿈이었던가.

만나는 사람마다 만남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 속에 주저앉고 마는,

모르는 땅의 모르는 몸들.

 

그리하여 그들은 돌아온다.

그들을 떠나 살게 한 어둠 속으로,

과거 속으로, 혹은 당겨지는 미래 속으로

사랑의 한 점

진한 언어를 찍기 위하여

그들은 보다 힘차게 돌아온다.

 

 


 

 

이성부 시인 / 그 산에 역사가 있었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1

 

 

오랫동안 나는 산길을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산이 있음에 고마워하고

내 튼튼한 두 다리를 주신 어버이께 눈물겨워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는 일이야말로 나의 넉넉함

내가 나에게 보태는 큰 믿음이었다

 

자동차가 다녀야 하는 아스팔트에게

서로 다 마음 안 놓여 괴로울 따름이다

그러나 산길에서는 사람이 산을 따라가고

짐승도 그 처처에 안겨 가야 할 곳으로만 가므로

두루 다 고요하고 포근하다

 

가끔 눈 침침하여 돋보기를 구해 책을 읽고

깊은 밤에 한두 번씩 손 씻으며 글을 쓰고

먼 나라 먼 데 마을 말소리를 들으면서부터

내가 걷는 산길이 새롭게 어렴풋이나마

나를 맞이하는 것 알아차린다

이 길에 옛 일들 서려 있는 것을 보고

이 길에 옛 사람들 발자국 남아 있는 것을 본다

내가 가는 이 발자국도 그 위에 포개지는 것을 본다

 

하물며 이 길이 앞으로도 늘 새로운 사연들

늘 푸른 새로운 사람들

그 마음에 무엇이 생각하고 결심하고

마침내 큰 역사 만들어갈 것을 내 알고 있음에랴!

산이 흐르고 나도 따라 흐른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먼 곳으로 우리가 흐른다.

 

 


 

 

이성부 시인 / 산길에서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발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이성부 시인 / 선바위 드러누운 바위

외로움은 긴 그림자만 드리울 뿐

삶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고즈넉한 품성에 뜨거운 핏줄이 돌고

참으로 키가 큰 희망 하늘을 찌른다

저 혼자 서서 가는 길 아름다워라

어둠 속으로 어두움 속으로 솟구치는

바위는 밤새도록 제 몸을 닦아

아침에 빛낼 줄을 안다

외로움은 드러누워 흐느낌만 들릴 뿐

삶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슬픔은 이미 기쁨의 첫 보석이다

외로움에서 우리는 살고 싶은 욕망을 일깨우고

눈물에서 우리는 개운한 사랑을 터득한다

산골짜기에 또는 비탈에

누군가의 영혼으로 누운 바위는

금세 일어나서 뚜벅뚜벅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성부 시인 / 시(詩)

 

 

생각을 깊게 하고

언어를 섬세하게 어루만져야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함부로 말을 주무르거나 천하게 다루거나

강간을 해도 시는 태어난다

그것이 우리의 시가 살아갈 험한 세상이다

우리가 무엇을 옳게 따져서

무엇 하나 옳게 만들어지는 것이 있더냐

시는 실패해도 완성이다

시는 갈보로 누워도 칼을 집는다

천하고 헤픈 웃음 벌여도

한번은 너를 찍고 나를 찍는다

마포(麻布)처럼

밟아야 살아나는 보리 이랑처럼

 

-시집 '전야(前夜)' 중에서

 

 


 

이성부 시인 / 빼재

 

 

바람과 구름이 쉬어 가고

사람과 짐승도 쉬어 넘는다는 고개

한낮인데도 어둑하여

어디 못 볼 데라도 본 것 같다

내 사랑은 가운데 도막이 잘려서

어디로들 사라졌을까

양쪽 얼굴은 울퉁불퉁한 바위벼랑이 되고

산을 도려낸 자리 고개 위로 자동차들이 오고 간다

산의 살을 째고 뼈를 잘라

찻길을 내었으니

우리나라가 이렇게 가도 잘될까 싶어

힘 빠진 내 발걸음 휘청거릴 수밖에

 

 


 

이성부(李盛夫) 시인 (1942~2012)

1942년 전남 광주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백주〉와 〈열차〉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 산 뒤에 두고』 『야간 산행』 등.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제18회 공초문학상 수상. 제9회 영랑시문학상. 2012년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 향년 7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