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우 시인 / 내가 머무는 세상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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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우 시인 / 내가 머무는 세상
길을 걷다가 문득 돌아보니 누군가 따라 걷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여 발끝만 바라보며 상념 가득한 모습이 참으로 나를 닮아 있습니다
양지쪽 흰 눈은 파르라니 몸을 녹이고 애써 바라본 하늘은 삼킬 듯 나의 몸을 파랗게 물들여 갑니다 함께 걷던 그도 간데없고 나도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돌아가려니 어디로 얼마만큼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녹으면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곳 파란 하늘과 또 다른 내가 있는, 내가 멈춰 서 있는 이곳이 내가 돌아갈 곳이고 또 나아갈 곳이라는 것을 못내 인정해야만 할 듯 싶습니다
가슴 가득 들이마셨던 맑은 공기는 가슴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눈으로 전해져 맑고 따듯한 세상을 바라볼 수도, 말할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머무는 세상이 가장 행복한 세상이니까요
정현우 시인 / 세례
잠자리 날개를 잘랐다. 장롱이 기울어졌다.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나는 본 적 없는 장면을 슬퍼했다. 산파가 어머니의 몸을 가르고 아버지가 나를 안았을 때, 땅 속에 심은 개가 흰 수국으로 필 때,
인간은 기형의 바닷바람, 얼음나무 숲을 쓰러뜨려도 그칠 수 없는 눈물이 갈비뼈에 진주알로 박혀 있다는 생각 그것을 꺼내고 싶다는 생각 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의 절반은 전염병에 눈이 없어진 불구로 가득했다.
창밖 자목련이 바람을 비틀고 빛이 들지 않는 미래 사랑에 눈이 먼 누나들은 서로의 눈곱을 떼어주고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귓속에 붙은 천사들을 창밖으로 털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정현우 시인 / 겨울이 오면 그리워지는 사람
두 손에 모라모락 한 찐빵 하나 들고 호호 불며 미소 짓던 너
발그레한 네 모습 떠올리며 웃음 짓는다
온 누리 흰 눈 덮인 날 널 다시 만나면 벙어리 장갑 끼고 눈사람 만들고 싶다
소나무 가지에 소복히 쌓인 눈 청설모가 신나는 듯 이리저리 흔들어댈 때 떨어지는 눈덩이 바라보며 함박웃음 지을 거야
깊은 눈에 발이 빠져 당황한 토끼를 볼 수 있을까?
흑백 영화 주인공처럼 이리저리 뒹굴며 마냥 행복에 겨워하는 너의 웃음소리
너의 차가운 두 손을 꼬옥 잡고 호호 불며 녹여줄 거야
오늘따라 왜 눈물이 날까 겨울이 오면 더욱 그리워지는 사람
정현우 시인 / 수저의 일
밥알을 넘기다 수저를 삼켰습니다. 우리는 수저 없이 밥을 떠먹습니다.
손이 없어도 나는 수목의 가장 슬픈 잎을 흔들 수 있고 밥상에 달그닥거리던 저녁을 훔칠 수 있고
모든 고백이 떠밀려오는 오후는 수저의 일. 아무 일이 없이 마주 앉아 뭇국을 떠먹는 일.
얼굴을 수저에 얹어보는 일. 혼자 앉은 식탁에 나란히 수저를 올려보는 일,
당신의 왼쪽 무덤에 심장을 비스듬히 대어 보는 일.
밥을 먹는다는 건, 고개를 숙이고 주검을 퍼먹는 일, 당연한 것들을 오래도록 잊는 일.
왼쪽과 오른쪽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나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수저는 겨울을 퍼다 나를 것이고
창가에 날리는 쌀알을 꼭꼭 씹어 먹고 싶었습니다.
정현우 시인 / 은신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나의 병을 모른다고 합니다. 병이 없다고 합니다.* 고백이 많은 이곳이 마음에 듭니다. 나는 누우면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부터 버려지는 바다가 되고 작은 틈을 발견하곤 합니다. 나의 잠에 열중하는 것은 가까워지는 가장 먼 환상, 실금이 간 얼굴을 만지면 나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의심합니다. 어머니 그곳에는 눈이 오나요. 이팝나무 아래서 재채기를 하면 독백이 될까요. 새벽이 오면 짐승의 밥으로 던져질 사람들이 있고, 내가 죽고 싶은 마음들은 콩잎들이 지는 겨울의 그 길을 흔들고, 모퉁이들을 지나 그림자들을 밟아보던 순간을 노래할 때, 어둠을 다듬던 뒷모습은 나를 반기던 눈빛, 강아지풀, 사랑이 죽는 곳에서 어둠의 꼬리를 숨긴 채, 나는 저수지의 푸른빛을 움켜쥡니다. 나는 버려지기 위해 되돌아오는 고독을 알지 못합니다. 괴로움은 꽃에서 심장이 멀어지고 줄기들만 무성히 자라 나의 은신처를 찾을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눈을 가둔 예언입니다. 진실은 먼 것들이 내는 상처로부터 서 있습니다. 나의 고백은 언젠가 하나로 사라지는 밤의 내부, 나는 버려지기를 기다립니다. 수취할 수 없는 다정은 추위를 떠도는 겨울의 잿빛, 어머니 그곳에 눈은 오나요. 나는 어디로 갈지 느낄 수 있고 나는 검은 바다로 누워 당신의 밤으로 들어가는 꿈도 없는 가벼운 잠, 깨어나고 싶지 않은 밤, 밤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 윤동주, 「병원」.
정현우 시인 / 연륜
강가에 모난돌은 흐르는 물이 다스리고
드넓은 바다는 어부가 다스리고
발아래 풀꽃은 땅이 다스린다
밤하늘의 어둠은 별빛이 다스리고
찬란한 태양은 하늘이 다스리고
저 높은 하늘의 구름은 바람이 다스리는데
사람의 마음은 누가 다스렸던가 그것은 흐르는 세월이었다.
정현우 시인 / 컬러풀
옥상 문을 걸어 잠그고 밥을 먹었다. 멸치의 눈이 친구의 눈빛 같았다. 땅거미가 사람들을 갉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투명한 가윗날 소리, 노을 속 색종이들이 살랑였다. 잔상이 길게 남으면 명암이 튀어 올라 실눈을 지그시 떴다. 맞은편, 미술실 토르소는 하얗게 부서졌다. 한 조각 어둠이 내 등을 밀 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색이 궁금했다.
난간을 붙잡고, 발밑으로 대답이 없는 어둠, 검은 호수가 몸속을 떠돌았다. 못은 나를 들여다보았고 감정을 옮기는 빛들의 통로, 무언의 물감 속에 있었다. 색칠되지 않는 마음은 기쁨도 슬픔도 잴 수 없던 두 팔 안에 가둔 시간. 살아 있으려는 색은 무엇일까. 눈가에서 정물이 쓰러질 때, 변성기로 굽은 순간은 투명을 통과하는 검은 깃들, 마지막을 거는 새들의 첫 비행.
물감은 왜, 검은색으로 이동되지, 모두 섞으면 거대한 검은색 마침표가 도달하는지. 청동색 토르소가 회갈색 비늘을 떨어드린다.
나의 보호색은 나의 적(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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