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규 시인 / 애프터글로우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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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 시인 / 애프터글로우
신을 배운 이후로 미안하다는 말보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다
세상 모든 곳이 다 오락이어서 캐릭터들이 죽는데 플레이어가 동전을 계속 넣었다
어느 주말 오후 흰 캔버스를 세우고 멍하니 그리워했다 있는 것들만 죽여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을 웃으며 안았다 손끝으로 상대방의 생명선을 끝까지 따라가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같이한다는 비극을 믿었다 우리가 금방 죽을 거라 했다
어젯밤 꿈에 눈이 부어서 오늘도 젖은 하루를 살았다 창밖엔 숲 이외의 것들만 조용히 번져서 우리의 기후가 같을까 무서워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 아무 일 없이 골목을 걸었다
와락 쏟아지다 터뜨려지는 파스텔이다
어두운 식탁에 앉아 찬 음식을 오래 씹어야만 하는 나이 무심히 낯선 여름이 굴러가고 두려웠다
지옥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안녕과 안녕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늘 끝 위에 몇명의 천사가 쓰러질 수 있을까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때쯤 결심한 것 같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남은 인생을 모두 이 천국에게 주자
최백규 시인 / 백야
그림자를 벗어 초원에 심었다
고요히 바람이 흐르는 사이 식물로 번져 자라났다
흩날리는 머리칼과 치맛자락이 영영 느려지듯이 어지러웠다 피가 잘 돌아 취하지도 못하는 한낮 마래서
가쁘게 달아나는 몸짓을 붙잡으려다 엎질러지고
물어서 갓 나온 아이마냥 말간 얼굴로 웃으며
영혼 속 별들이 부서질 때까지 안아주었다
우리가 피어나려면 그토록 무성히 아름다워야 하나
너는 두 눈을 감은 채 시퍼렇게 밀려오고 쓸어가는 파도가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는데
나는 열없이 시들 만한 고백을 채색하려 해봐도 숨이 희었다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나이였다 살아서 너의 모든 나날이 좋았다
최백규 시인 / 열사병
천사는 내 어깨에 선한 얼굴을 묻고 울다가 집을 나섰다 흰 볕 아래 잠들면 잠시나마 천사를 쫓아 멀리 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때에는 옅은 웃음이 어른대는 꿈을 자주 꾸었는데 그곳에서 천사가 말없이 머리맡을 지켜주었다 해진 손목의 맥을 헤아리는 손길이 맑아서 가슴께가 아려왔다 산안개에 베인 눈동자 속으로 노을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매일 밤 슬픈 줄도 모르고 흐드러진 눈빛을 따라 걷다가 돌아왔다
높이 깃든 젊음이 해사하며 언제까지나 바람이 부는 곳을 치어다보게 될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 해사하다: 하얗고 꽤 곱다.
최백규 시인 / 비의 바깥
멋대로 하늘의 심장을 가르고 찢긴 틈 사이에 물감을 휘갈기는 것은 정말이지 짜릿한 일이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찌른 채 도로를 달렸다
벚꽃의 수동성 비행운은 소리의 탄생 꽃피는 못과 끊어진 오케스트라의 차이 혀의 작은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긴 약속들 거스름돈 받으며 손끝 스치는 순간의 어린 감정 고장 난 라디오의 반복 재생
어제의 내가 바라보던 길 너머를 지나가고 있다 귓속으로 내일이 터뜨려졌다 거리의 사람들도 음을 따라 흔들렸다
펼친 우산은 계속해서 하늘로 오르고 싶어한다 나는 뒤집히지 않는 우산을 갖고 싶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깨문 다음 나누어 삼키고 너와 함께 비가 오지 않는 곳들로 떠나고 싶었다
너는 멀리서 비의 바깥으로만 손을 내저었다 빗방울의 색깔을 씹은 것 같아 혓바닥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흐트러지는 시야에 우산을 접는 너의 익숙한 손짓
귀에 얹은 이어폰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물감처럼 웃었다
최백규 시인 / 아담이 뱀의 혀를 물었대
마른 표정은 언제나 흠뻑 젖은 혀를 감추고 있어
아담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몰래 가져와 보는 건 어떨까? 아담은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누구나 깊은 곳에 무언가를 숨겨놓기 마련이니까 축축한 침대 같은 거! (느낌표로써 비밀은 비밀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판타지 속에 숨어 살던 아담은 젖은 혀들이 바싹 마를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 쓰러지겠지
누가 아담에게 뱀을 선물한 거야? 뱀의 혀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넘쳐날 텐데
너도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 봄은 노랑을 가장 먼저 뱉어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그 날도 너는 나를 의심했었지
피노키오가 이브를 먹은 사실은 알고 있니? 아담에게 집중하자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이제 하루 끝에 서서히 아담의 치마가 흘러내리면 쌓아가던 모래성은 젖어가고, 무너질 테니까
바싹 마른 혀들은 늘 그렇듯 젖은 표정으로 사그라지고,
최백규 시인 / 숲
비 내리는 병실에서 빛이 일렁이고 있다
우리는 서로 같은 아침을 바라본다
연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참을 연다
비를 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
미래를
사랑이라 믿는다
최백규 시인 / 열대야
사랑이 사랑도 아닐 때까지 사랑을 한다
네가 물들인 내 밤이 너무 많다
전국적으로 별일 없이 해거름이 옮아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야경을 바라본다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행복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울겠지
지난 주말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외지의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
가만히 쓰러진 기린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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