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현 시인 / 저기 한 사람 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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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현 시인 / 저기 한 사람
그래도 저기 한 사람은 우리의 음악을 열심히 듣고 있어요 열심히 합시다 색소폰 주자 애릭 돌피가 연주를 방해한 취객과 한판 붙으려는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에게 했다는 귓속말이다
재즈 피아노의 시인 빌 에반스는 연주 도중 자신과 피아노 건반 사이로 술꾼이 지나가는 사건도 겪었다는 기록을 읽는다 이런 열여덟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가끔 어쩌다 부득부득 떠오르는 말이다 오직 한 사람을 상상하며 시를 쓰는 것도 꿈이요 때론 슬픈 힘이렷다 열심히 함시다
-시인동네, 2016.
박세현 시인 / 가던 길
당분간 피해 있는 게 좋겠다는 새벽 문자를 받았다 눈치 있는 나는 얼른 몸을 감추고 잠수 타기로 했다 핸드폰과 카드와 화폐 몇 장 전철 우대권을 챙기고 집을 나왔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이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실은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지은 죄도 모르면서 달아나다니! 억울한 노릇이다 이왕 나왔으니 가던 길 먼 데까지 가보자 정말 무죄일까? 나는
박세현 시인 / 너무 괜찮다
너무 괜찮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다 어젯밤 불던 바람소리도 바람을 긋고 간 빗소리도 괜찮다 보통 이상인 감정도 보통에 미달한 기분도 괜찮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 괜찮다 웃어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다 웃지 않아도 괜찮고 울지 않아도 괜찮다 유리창에 몸을 밀어 넣은 빗방울이 벗은 소리만으로 내게 오던 그 시간 반쯤 비운 컵라면을 밀어놓고 빗소리와 울컥 눈인사를 나누어도 괜찮다 너무 괜찮다
박세현 시인 / 남애
내가 좋아하지만 내 것은 아닌 동해안의 작은 항구 남애 잘 늘 있겠지 파도는 모르는 가슴에서 잠들 것이고 항구 가까이 떠있는 고깃배는 거친 사랑으로 일렁이겠지 남애가 서핑 장소로 변했다면서 막말을 섞으며 서운해하는 후배의 구석진 순심을 귓등으로 흘린다 애끼는 건 왜 다 이 모양이 되어 남의 애를 태우는지 어디 이름이나 불러보자 남애
박세현 시인 / 무단횡단
주민증 제시하세요 왜요? 선생님은 무단횡단자입니다 건널목 아닌 데서 건너면 어떡한답니까? 경찰이다
집사람은 두고두고 말한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야
박세현 시인 / 문워크
허공의 평수가 넓어지는 가을 옛날시들을 찾아 읽으며 맑은 밤을 보냅니다요 잘 아시겠지만 나는 이제 낄 자리가 없습니다요 흐르다 멈춘 물소리에 섞이거니 키를 넘는 갈대 속에 끼어 모른 척 흔들리거나 길 떠나는 철새들 무리에 섞여 나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기도 합니다요 안 읽어도 상관없는 시를 읽듯이 안 살아도 되는 하루를 살았습니다요 앞으로 가는 듯 하면서 자꾸 뒷걸음이 되는 문워크 같은 하루 지난 밤엔 등이 가려워 뒤척이다가 그냥 잠들었습니다요 손이 닿지 않는 자투리 슬픔을 토닥거리면서요
박세현 시인 / 겨울 햇살 한 줌 쥐었다 놓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반주가 없으니 아무 때나 어디서나 연주할 수 있다는 뜻도 되겠지만 이 곡은 한 첼리스트의 버킷 리스트였던 것 프랑스 파리에서 400킬로 떨어진 시골을 지나가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이곳이 무반주곡을 녹음하기 위해 일생을 기다려온 장소라고 찍었다는군 900년 된 작은 시골 성당 풍수원성당은 아니었겠지만 먼지 사이에 숨었던 햇살도 바빴으리 그는 이름이 끝내 무반주 첼로 조곡 같다는고 믿었던 나의 편견을 천천히 납득하면서 나를 찾아온 겨울 햇살 한 줌 쥐었다가 놓는다
-시집 <저기 한 사람> 시인동네, 2016.
박세현 시인 / 진주목걸이
새벽에 시 한 편 뚝딱 물론 좋은 시는 아니고 방구석에 벗겨져 있는 내 양말짝 같은 시다 사는 건 개떡인데 시가 폼 나면 그게 겉멋이지 안 그렇소? 동지들 그렇소만 나는 겉멋이 사랑스럽소 나름 겉멋주의자이지요
땟거리 없어 굶으면서도 외출할 때는 화장하고 있는 멋 없는 멋 부리며 나가던 옛날 내 살던 이웃집 아줌마의 목에 매달려 외롭고 절박하게 반짝이던 가짜 진주 목걸이 같은 시
박세현 시인 / 사촌에게 보내는 편지
내 시를 읽었다는 문자 받고 웃었다 내 시는 맞다만 나도 읽지 않는 시를 사촌이 읽었다고 해서 놀랐다 시집을 주지 않은 형이 서운했겠지만 시집이라는 게 홍어를 닮아서 아무에게나 주는 건 실례가 되더라 숙모님이 그러는데 사촌이 주식으로 돈을 좀 만졌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추석에 내가 한잔 쏠게 집안에 부자가 생겼다니 내 일처럼 좋다 앞으로 내 시는 검색하지 마라 그건 나를 달래는 혼시다 혼술 비슷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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