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균 시인 / 납작한 공간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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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균 시인 / 납작한 공간
아주 두꺼운 책 밑에 바퀴벌레 한 마리 깔렸다.
얼마나 버둥거리는지 책이 조금씩 들썩들썩한다.
한참 동안 버둥거리다가 잠잠하더니 또 한참을 버둥거린다.
버둥거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시.
죽기 살기로 버둥대다보면 가끔은, 지긋지긋하게 짓누르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는가 보다.
두꺼운 책 밑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바퀴벌레 진저리치며 사라진다.
신미균 시인 / 가족
베란다 유리창이 다 닫혀있으면 집에 아무도 없는 거다
편지꽂이에 편지가 그대로 꽂혀 있으면 아직 아무도 안 들어온 거다
현관문에 피자집 광고지가 그대로 붙어 있으면 정말로 없는 거다
그래도 혹시나 벨을 눌러 본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혼자서 현관문을 딸깍, 열면 집안에 있던 냄새들이 와락, 안긴다
냄새만 안고 있어도 따뜻하다
신미균 시인 / 탈모 증상에 도움을 주는 A급 제안서
신경질 많게 프로그래밍 된 그가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졌다고 잔소리를 한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프로그래밍 된 내가 머리카락은 떨어지기 위해 있는 거라고 되받아친다
물건이 제자리에 없다고 투덜거린다 제자리에 없으면 옆자리를 보면 된다고 말한다 사과가 맛이 없다고 뱉는다 맛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갸웃거린다
별일 아닌 것들로 자꾸 충돌하더니 시스템이 느려지고 가끔 멈추기도 한다 이럴 땐 충돌을 일으킨 원인을 분석해서 프로그램을 재설정하거나 응용프로그램을 가동시켜야 한다
시스템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는다고 본전 생각에 잠 못 자고 고민하면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애면글면할 필요가 없다 얼른 갖다 버리고 새 프로그램을 구입하면 된다
요즘은 훨씬 더 좋은 것을 무료로 다운받는 곳도 많다
신미균 시인 / 쥐약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삼성문학상 공초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오늘의작가상 이상문학상 동서문학상 백석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맛있다
―시집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신미균 시인 / 폭탄 돌리기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오빠에게 넘깁니다 작은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깁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넘깁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사이 심지를 다 태운 불이 내 손으로 옮겨붙었습니다 엉겁결에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우리들 머리 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 ≪푸른사상≫ 2015년 봄호.
신미균 시인 / 창호지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큰오빠 집도 괜찮고 작은오빠 집도 괜찮고 시골에서 방 하나 얻어 혼자 살아도 괜찮고 양로원도 괜찮고 아무래도 괜찮다
네모난 물건을 싸면 네모가 되고 쭈글쭈글한 물건을 싸면 쭈글쭈글하게 되는 자식들이 접으면 접는 대로 구기면 구겨지는 대로 그대로 있는 여든도 넘으신 어머니
얇은 가슴 찢어지지나 마십시오
신미균 시인 / 대문
손만 대도 쓰러질 것같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대문
굳이 열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 열어 버리고 떼어다 팔든지 내버려 두든지 그저 처분만 바라고 있다
뒤로 돌아가 돌멩이라도 괴어주다 보면 어느새 은근히 몸을 기대오는
저승꽃 잔뜩 핀 시골집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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