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배옥주 시인 / 시간을 갈아 끼우다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6. 08:00
배옥주 시인 / 시간을 갈아 끼우다

배옥주 시인 / 시간을 갈아 끼우다

 

 

남포동 시계골목

늙은 시계 수리공이

어제의 뚜껑을 열고

시간을 갈아 끼운다

키클롭스의 눈알 같은 확대경이

방전된 시간의 지층을 들여다본다

 

나의 신탁(神託)은 완성될 것인가

 

톱니바퀴 사이로

깨어나길 기다리는 시침과 분침

내 청춘은

어느 봄날에 염을 해버린 것일까

오리엔트에서 걸어온 태양의 사제가

주문을 외운다

팽팽한 접전의 시각

백발을 날리는 시간의 대장장이가

태엽의 혈(血)을 찌른다

 

그림자가 겹쳐지는 빌딩 너머로

한 줄기 빛이 날아들고

내 손목에서 채깍채깍 맥박이 뛴다

 


 

배옥주 시인 / 마로니에의 휴일

 

 

 ‘굴렁쇠처럼 눈물이 구릅니다’라는 첫문장이 뜬공처럼 굴러다닌다. 책을 엎어두고 마로니에 열매를 줍던 그때를 꺼내 굴려본다. 소파 아래로 떨어진 마로니에가 굴러간다. 배 위에 올려둔 둥근 쿠션이 마로니에를 따라 굴러간다. 쿠션에는 꾀돌이 제리의 혐의가 인화되어 있다. 톰에게 참회하는 죄의 목록이 굴러가다 잡힌 후, 긴 꼬리처럼 밟히던 감정이 정리되었다.

 

 딱지를 다 잃었을 때 작은언니는 메롱! 혀를 날름거렸다. 딱지에 맞은 딱지들이 뒤집히는 방향은 툭하면 할퀴는 큰언니의 고양이 손톱처럼 종잡을 수 없었는데, 일기장에 싸지른 다락방의 쥐똥들은 어디로 굴러갔을까?

 

 무너진 콘크리트 외벽 밑에서 사흘 째 구조하지 못한 영혼처럼 책장 밑으로 굴러들어간 마로니에가 보이지 않는다. 마로니에 열매를 줍던 대학로를 주머니에 접어두고 협잡꾼이 득실대는 소설책을 다시 펼친다. 회상에 고립된 벌레 한 마리가 책갈피를 갉아먹는 동안, 위층 아이들의 뜀박질이 휴일 반나절을 굴러다닌다

 

계간 『사이펀』 2022년 가을호 발표

 

 


 

 

배옥주 시인 / 검정들

 

 

미쳐 날뛰는 비닐봉지를

까마귀가 제압한다

 

현흑玄黑 동색을 숭상하는 날짐승들

그림자를 걸치고

두상을 파헤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사르고 있다

 

검은 건지, 까만 건지

말해! 말해보라고!

 

검정이 검정의 정체에 몰두하고 있다

 

대가리가 대가리에 빠져도

암흑에서 분별되지 않는 저 본색은 무엇인가

 

움켜쥔 발가락과

퍼덕이는 날갯짓과

부릅뜬 눈을 다 모은 부리도

불이不異를 모른다

 

용쓰는 까마귀 몸을

검은 비닐봉지가 삼키고 있다

 

날갯짓 소리는

곧, 암흑이 될 것이다

 

비닐봉지는 또 다른 암흑이 될 것이다

 

월간 『현대시』 2022년 8월호 발표

 

 


 

 

배옥주 시인 / 에밀레종의 맥놀이

 

 

애벌레에 한 입 베어 물린 복숭아는

통곡 크기로 둥글게 짓무른다

울음소리에는 원주가 있어

벌레 먹은 거푸집을 열면

애벌레가 비천의 날개와 주름을 바꾸고 있다

 

나방이 뒤뚱뒤뚱 나는 것은

복숭아 속살에서 얻은 몸과

제 몸속에서 얻은 날개가 엇박이기 때문

 

복숭아 잔털이 파동을 일으킨다

하나로 이어붙인 두 쪽은 입을 갖는 자리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종소리를 굽는다

쇳물처럼 달아오른 두 울음을

소리곡선으로 채워가는 맥놀이

 

가장 오래 쓰다듬는 음파보다

가장 먼 곳에 도착하는 목소리다

 

아기울음이 어미 울음을 삼키고 있다

 

계간 『애지』 2023년 가을호 발표

 

 


 

 

배옥주 시인 / 송정바다

 

 

여자가 바다라고 말할 때

사내에게는 바닥이라고 들린다

 

울적할 땐 이 바닥에 자주 와요

전 이 바닥에 길들어있어요

썰물로 가슴골이 드러난 백사장

맨발로 건너온 여자의 골은 깊다

새조개가 파고드는 뻘

어디까지가 바닥일까

갯벌이 발등을 드러낸다

 

사내의 관에 휘몰아친 회오리는

시들지 않는 바닥

 

사내가 바다라고 말할 때

여자에게는 바닥이라고 들린다

 

 


 

 

배옥주 시인 / 지워지지 않는 것들

 

 

락스를 뿌리다

몇 방울 검은 옷에 튀었다

화들짝 찍히는 크고 작은 눈빛들이

실뱀처럼 흔들린다

 

면봉에 락스를 묻혀 원둘레를 헤집으면

문을 열고 나온 기억들이

점, 점, 점 꽃잎으로 핀다

 

골목을 지나 담장을 지나

내 다리와 네 다리 사이로 키득키득

건너다니던 웃음

아랫배를 감싸 쥔 홀씨가

말문을 터트린 그날

관다발에서 뛰쳐나온 초록의 맥박이

공중그네를 타던 첫고백

 

검은 티셔츠에 작은 창들이 열려있다

창틀에 걸쳐진 징검다리 위로

지울 수 없는 한여름 밤이 건너간다

 

 


 

 

배옥주 시인 / 커튼콜

 

 

콜!

원터치로 무한 반복되는 유튜브에선

화면 가득 앵콜이 쏟아진다

서른한 번째 죽었다 살아난 에우리디체들이

붉은 장막을 걷고 달려 나온다

배경으로 펼쳐진 벌판과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화관 사이로

허물 벗은 뱀이 재등장 한다

 

앵콜! 앵콜!

손에 손을 잡고 기립하는 박수갈채가

최소한의 볼륨으로 되풀이되는 24시 편의점

재생되는 24시간과 24시간이

붉은 장막을 걷고 달려 나온다

바코드 건이 멍해지는 27시 81분

적요가 어둠의 실눈을 물어 뜯는다

담배연기가 자동문 앞에서 서성이는 한동안

무대 위의 커튼은 열렸다 닫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나기 한 장면이

붉은 장막을 걷고 달려 나온다

초박형 콘돔이 왜 품절인지

알 수 없는 야밤

가로수에 쓰러진 자전거 3과

목덜미를 드러낸 해바라기 5사이로

한 달째 방치된 먹구름이 재등장 한다

 

 


 

 

배옥주 시인 / 오후의 지퍼들

 

 

지퍼를 열자 여자들이 쏟아진다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수다들

아이들이 쏟아지고 남편들이 쏟아지고

루비똥이 쏟아지고 포르쉐가 쏟아지고

 

엘콘도파사 속으로 다시 빨려가 회오리치는

수다들의 향연

왼쪽으로 저었다가 오른쪽으로 저었다가

도덕이 쏟아지고 애인이 쏟아지고

주상복합단지가 쏟아지고 콘도가 쏟아지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 ‘오후 3시’

나른한 평화가 쏟아진다

저마다 속내 하나씩 지퍼 안에 감추고

벌어진 지퍼를 닫을 줄 모르는 지퍼들

에스프레소를 삼키며 재개발이 쏟아지고

마키아토를 저으며 주식이 쏟아지고

 

창밖엔 지퍼를 열어

오늘의 갈매기들을 날려 보내는 수평선

원피스 속, 어제보다 뚱뚱해진 욕망을 감춘 채

오후 3시의 지퍼를 열고

우아하게 걸어 나가는 지퍼들의 뒷굽

 

 


 

배옥주 시인

1962년 부산 출생. 부경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2008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2022년 《애지》 평론 등단. 시집 『오후의 지퍼들』 『The 빨강』. 공저 『김명순에게 신영성의 길을 묻다』. 평론집 『언어의 가면』. 연구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공간』 『여성과 문학』, 외. 요산창작지원금 수혜. 김민부문학상, 두레문학상 수상. 현재 부산작가회의 부회장. 부경대학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