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은자 시인 / 양구 가는 길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6. 08:00
김은자 시인 / 양구 가는 길

김은자 시인 / 양구 가는 길

 

 

눈 내리는 강을 가로질러

그 마을에 가고 싶다

소외가 눈부신 곳 그림자 능선을 따라

단절이 부드럽게 익은 곳

불구의 계절을 몰락시키고

세 개의 계절이 존재하는

고독의 경계를 향해

절규처럼 떠나고 싶다

오래된 찻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다

낡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유로

찻물을 우려내는 곳

통통배 소리 물살을 가를 때

고독의 끝까지 나를 데려가 다오

슬픔도 달게 씹히어 비가 되어 내리리니

빙하기와 겨울 그리고 여름을

그늘에 뉘이고

풀잎의 숨결이 물처럼 저물어

작은 소리에도 귀가 열리는

 


 

김은자 시인 / 득음得音

 

 

 게를 잡고자브면 말여, 닭다리가 최곤겨, 작대기 밑둥지에 다리깽이 매둘어 달면 게아들 햇바닥 낼름낼름 아주 환장을 헌다니께 돈주고 떡밥 살것 있것냐? 다리깽이 하나면 넉끈헌디 닭 다리깽이로 게를 실금실금 끌고 댕겨뿔다 주둥지가 닭 다리깽이 물어 뻔지면 뜯겨 주는 츠윽! 흐다가 실그머니 실을 들어올려 쓰발, 냅다! 엎어치면 되는겨 만약 죽이자고브면 말여, 뜯기고 물리고 할 것 있겄냐? 뜨건 물이 최곤겨 아암 끓는 물과 뜨건 물은 다르재? 팔딱 팔딱 뛰는 게들을 목간하듯 휘휘 저음시롱 뜨건 물로 집중 샤워를 시키면 되아 기절혔다 싶으면 잽씨 다리 모강지를 분질러야 하능겨 홀라당, 게딱지 뛰껑 베껴내면 반은 끝장났지라 양념 게장을 담그고 자브면 말여 질 먼저 감별을 혀야 혀는 겨 칼로 내리쳐서 알싸! 허면 게장감이고 쥐죽은 거메로 먹통같으면 국거린건 알재? 모름지기 게는 재랄을 쳐야 쌩으로 먹어도 맛난디 파 마늘 고춧가루 간장 붓고 달달한 것 좋아하면 설탕 자금자금 묻혀서 깨깟한 유리그릇에 내뻔져 두면 이놈 찔리고 저놈 찔리고 피 찰찰 흘려 감시 히히 그래도 자식 목구멍 생각허면 살생도 즐겁지라 이

 

 


 

 

김은자 시인 / 벽과 감옥과 탈주

 

 

비겁한 내 속의 모범수에게

 

 네가 감옥이다 너를 구속하지 않았지만 너는 간수와 죄수의 1인 2역 모범수로 늙어간다 부디 문제수로 태어나 감옥에 불도 지르고, 동료 죄수들과 멱살잡이도 하면서 깜깜한 지하 병동 밤새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구멍을 파다 발각되는 고독한 몽상가가 되길, 고립과 갈등에 벽이 무너지리라 벽이 무너지는 순간 형은 면제 된다 위험한 종신형 위태로운 것은 늘 아름답다

 

네 속의 찬란한 씨앗에게

 

 사는 것이 옥살이라면 탈주하는 방법에는 발아라는 변용이 있다 자신이 만든 투구를 녹여내어 유쾌하게 변질되어가는 행위 그, 놀라운 춤으로 너는 새가 되기도 하고 꽃이 되기도 한다 꽃은 피어난 것이 아니라 찢어진 것이다 오, 눈부신 상처의 힘이여 그것은 날개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눈부신 알몸의 욕망에게

 

 오류, 맘껏 살고 싶다 나는 본시 먼지였다 꽃잎보다 가벼워 그 어떤 것 하나도 품거나 소유하지 못해 바람보다 자유로웠다 욕망이라는 돌을 줍기 시작하면서 나는 무기징역수가 되었다 꿈은 고립에서 시작된다 감금의 시초 탈주를 꿈꾸는 알몸이여, 그것이 내가 사는 사유다

 

 마비에서 나를 건진 것은 욕망이다 탈출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꿈이다 탈주와 욕망의 이중주 나는 생산적인 욕망에 늘 목마르다 ‘나’라는 벽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부딪치고 낙태해 버리는 예식에 갈증한다

 

 

탈주를 위하여

 

 은밀한 처형보다 공개처형을 원한다 잘린 목을 저잣거리 한복판에 매달아 놓고 욕심을 증언하라 나는 맨발이다 맨발의 영역은 무엇을 부수느냐에 따라 무한대다 그 광활한 벌판에서 나는 별이다 먼지였던 기억에 안 보이는 흙의 나라

 툭툭, 날개를 털고 벼랑을 오른다

 

 


 

 

김은자 시인 / 유목의 피

 

 

사막의 노래가 들려요 그건 내 속에 유목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징표 나는 사막의 언어를 버리지 못했어요

자막도 없는 콘크리트 땅에서 모래로 변한 기억 하나가

조상이 버리고 간 거대한 내륙에서 오래전에 지워진 천막을

말해 주었어요 오아시스를 찾다가 어디에다 집을 지을지 몰라

말 잔등위에 집을 지은

 

양들이 떼 지어 몰려왔어요 초원에 이른 걸까요

구름은 양떼의 털을 깎아 좁다란 통로를 만들고 하늘은 이내

내 등 뒤로 쏟아졌어요 혼자라는 사실에 쭈뼛 머리털이 섰지만

초원은 지나간 것들의 기록일 뿐

 

말言을 타진 않았어요 말은 내가 가야 할 곳에 이미 당도해

있었으므로 말의 엉덩이를 굳이 재촉할 필요는 없었어요

말 잔등 위에 집이 있는 한, 사람들은

뒷모습만을 기억하겠지요 다시 혼자,

 

그래요 혼자가 좋아요 나를 발음하지 못하는 바람은

발음기호도 없는 나를 버리고 순양처럼 멀리 도망가고

벌판의 폐부 한복판에서 나는 시들지 않은

유목의 글씨를 보았어요

한 손에는 마유주(馬乳酒)를 들고 또 한 손으로는

코무즈*를 튕기면서

넓은 들판을 달리는 어머니 ,

대륙의 말발굽 소리에는 씩씩한 젖이 흐르고

어머니는 사막의 길을 내며 음악처럼 달렸어요

짐승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은 어머니의 맨발이

나의 등짝을 향해 힘껏 활을 당겼어요

굵은 징표 하나 등에 박힌 채

나는 넓은 벌판을 둥둥 떠다녔어요

 

*키르키즈인들의 악기, 세 줄로 만돌린과 비슷함

 

 


 

 

김은자 시인 / 명기名器

 

 

바이올린을 턱 밑에 놓는 순간 사람과 악기는 한 몸이다

로키산맥 해발 3천미터, 더 이상 산림이 자랄 수 없는

수목의 한계선에서 소리를 훔쳐온 악공이 연주할 때 눈을 감는

것은 그 공인된 도적질을 묵인해주는 것이다 공범의 댓가는

소리를 찾아주는 거룩한 예식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비바람에 단 한 번도 무릎을 세워 본 적 없는 가문비나무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불러내어 내게 데려와 달라고

죽음이 없었다면 누가 저 비명을 거두어 가겠느냐고

죽음을 연습한 자만이 빛나는 생명을 꿈꿀 수 있다고,

피 흘린 것들은 모두 공명이 되어 있었다

 

 


 

 

김은자 시인 / 틈의 연대기

 

 콘크리트 틈을 뚫고 풀꽃이 피었다 한때 풀밭이었던 곳 수천 개의 풀씨를 뒤엎고 풀등 위에 집을 짓더니 구멍이 생긴 것이다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막아 틈 하나 없는 새집이 완성되었을 때

 새집에는 몇 년 동안 마당을 쓸어 놓은 것처럼 풀잎 하나 돋지 않았다

 

 풀씨들은 빛 한 줌 없는 지하에 갇혀 회로를 모색했을 것이다 모색이란 적극적인 것이어서 발광체의 그림자만 스쳐도 공복처럼 피를 토하고 몸부림치며 빈틈을 끌어안았을 것이다

 

 달빛이 인형 손톱보다 작은 창문 하나 긁고 갔을 때 풀씨는 틈을 뒤져 골목을 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방울보다 작은 조짐도 터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굽은 몸을 쫙- 펴고 죽을힘을 다해 밀어내고 틈을 벌렸을 것이다

 

 틈으로 틈을 벗어나는 꿈을 날마다 꾸었을 것이다

 

 말미를 빼앗길 새라 한쪽 발로 쾅쾅- 틈 위에

 못질을 했을 것이다

 

 이어져 있는 모든 이름은 틈의 탄생이므로

 모여 있는 모든 안은 간극의 속성이므로

 

 틈으로 밖을 접수했을 것이다

-시집 『그해 여름까지가 수선화』 (상상인, 2025) 수록

 

 


 

 

김은자 시인 / 마스카라의 이중생활

 

 

 길게 말하고 싶다는 말이다 짧고 간략한 세상에서 조금은 복잡해지고 싶다는 말이다 눈물은 길고 끈끈한 화장 아, 덧칠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들, 되풀이되지 않고는 이어 나갈 수 없는 것들 나는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거짓말을 해 본다 속눈썹 그윽이 눈빛 하나를 심으며 이 순간만은 내 말에 귀 기울여 달라고 짧고 굵게 애원한다 눈매는 거울 속에서 탄생한다 세상 모든 시선은 관객이 아닌 주인공이므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최후의 순간을 고백한다 울지 않겠다 한 올 한 올 젖은 눈꺼풀로 단단한 너를 지워갈 뿐이다

-시집 『그해 여름까지가 수선화』 (상상인, 2025) 수록

 

 


 

 

김은자 시인 / 황야의 고독사

 

 

 이제 고독을 부검할 시간,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고독을 가르고 파멸을 증명할 시각,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사체에 인사를 했다 예리한 칼이 사건의 그림자를 벗겨내려 고독의 한가운데 깃발을 꽂았다 고독을 엿듣기 위해서는 시점을 되돌려야 한다 숨을 세게 두드리자 멍이 입을 열었다 머리와 이어진 귀는 그새 혼자에 익숙해진 듯 자꾸 옆쪽으로 기울었다 촌음을 절개하니 상처가 말을 시작했다 누가 숨을 멈추게 했을까 무엇이 임종의 배경이었을까 고독사와 돌연사 사이에서 오가는 수많은 거짓말에 손톱 아래로 검은 물이 흘렀다 고독이 원활히 흐를 수 있게 고독의 심부를 베어 눈물을 꺼냈다 칼에 찔린 외로움이 말을 지운 숨에게 슬픔 한 덩이를 떼어 주었다 쓸쓸한 귀가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5월호 발표

 

 


 

김은자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대 졸업. 1982년 도미, 현재 미국 뉴져지 주에 거주.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월간 《시문학》신인우수 작품상 당선으로 등단.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 당선. 시집 『외발노루의 춤』 『붉은 작업실』. 산문집.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온다』. 제5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미주동포문학상,  환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시나리오상, 윤동주 문학상 해외동포 부문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