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인철 시인 / 말머리성운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6. 08:00
이인철 시인 / 말머리성운

이인철 시인 / 말머리성운

 

 

색색의 알약들

입에 털어 넣고

군의관 앞에서 군번을 외우는

몽롱한 초저녁

 

쇠창살 사이로

밤마다

허공은 창문처럼 열려

말 모양의 별자리 뜨고

우리는 밤마다 붉은 보라색 꿈을 꾼다

상무대 610동 정신병원에서

대가리 없는 말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말머리성운 속으로 도망친다

거기서 숨바꼭질을 한다

뿌연 성운 속에서 무엇으로든 몸을 바꿀 수 있다

번지는 마리화나 냄새

우리는 싱싱한 별을 뜯어먹는 망아지들이 된다

새벽녘

대가리가 없는 말들이 끄는 마차는

어김없이 병실로 되돌아온다

또다시 군번을 외우는 아침

우리는 말 울음소리로 운다

 


 

이인철 시인 / 반월부속

 

 

개업하고 첫 주문으로 대문이 들어왔다 파이프를 주문했다

돈부터 줘야 쇠파이프를 차에서 내려놓겠다고 한다

내려놓으면 돈을 주겠다 했다

보도블록에 내려놓은 파이프 위에 한 발을 올려놓고

지금 돈이 없다 대문을 만들어주고 받은 돈으로 파이프 값을 갚겠다 했다

-이 도둑놈의 새끼

강 사장은 파이프를 다시 차에 실으려고 엎드리는 순간

나뒹굴던 보도블록이 그의 뒷머리를 내리쳤다

 

강 사장이 머리를 잡고 도로 건너로 도망쳤다

뒷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신도시의 여름은 피보다 더 뜨거웠다

트럭은 도망가듯 그를 태우고 갔다

용접불꽃은 나리꽃으로 밤에도 피었다

 

일주일 후 50만원과 사과 한 박스를 들고 반월부속으로 갔다

강 사장 뒤통수엔 흰 반창고가 붙어 있다

슈퍼에서 새우깡에 소주 몇 병을 같이 마시고 친구가 됐다

 

철대문이 있는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잡이가

- 이 도둑놈의 새끼

 

 


 

 

이인철 시인 / 조각달을 보면 홍두깨로 밀고 싶다

 

 

해가 긴 여름 저녁

어머니는 흰 살 한 점 떼어 홍두깨로 늘린다

반상 위에 가난이 점점 넓어진다

가난도 꽉 차면 달이 된다

얇아진 반죽 아래에 반상의 굳은 피가 보인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만든 둥근 달을 접어

칼로 잘근잘근 썰어나간다

하얗게 쏟아지는 국수발들

어머니는 그 국수발들을 가마솥에 끓여

식구들에게 한 그릇씩 퍼준다

우리는 마당 평상에 앉아 국수를 먹으며

가난한 배를 불렸다

조각달이 뜨면 가끔은 홍두깨를 들고 나가

달을 둥글게 늘리고 싶다

 

 


 

 

이인철 시인 / 순창고추장

 

이슬을 닦고 장독뚜껑 열면

곰삭고 있는

하나

저렇게 붉으면

저렇게 뜨거우면

사랑처럼 단내가 풍풍 나는구나

강천산 단풍보다 더 싱싱한 색이 돋는구나

섬진강 한 굽이의 샘물 냄새

물씬

물씬

솟구쳐 오르고

양푼에 곰삭은 해 한 수저 떠넣고

붉은 밥을 비비면

칼칼한 입맛

고추씨 같은 별빛과

왕대나무숲 붐비는 바람소리

담 넘어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의 가는 손

들린다

뜨거웠던 시절에

은어떼처럼 되돌아오는

 

 


 

 

이인철 시인 / 죽음을 놓치다

 

 

모래사장에 뒤집어진 늙은 거북이

10년째 누워있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수면제 한 주먹만 구해 달란다

 

난 수면제를 사탕 봉지에 넣어 거북이 머리맡에 놓았다

거북이는 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리며

여러 날 눈물을 흘린다

 

거북이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무도 못 알아본다

수십 번 죽은 거북이는 응급센터에서

수십 번 다시 살아나서

모래 위에 호흡기를 끼고 누워있다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거북이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거북이

 

눈도 뜨지 않은 푹 꺼진 눈두덩을 보며

이제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병실 벽에 붙은 제약회사의 포스터

"생명 연장의 꿈"

 

-계간 《시와 함께> 2020년 가을호

 

 


 

 

​이인철 시인 / 테레사

 

광주가 고향인 김 이병 생일날

학교 선배인 위생병을 꾀여

심야에 티켓다방 아가씨를 불러들였다

그녀의 이름은 테레사

짧은 핫팬츠 노브라 민소매 옷을 입은 테레사는

그녀에게로 쏠린 몽롱한 우리 눈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위스키를 몇 잔 마신 발그레한 그녀는 상의를 벗고

군용베드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우리에게

출렁이는 유방, 고양이 눈 같은 유두를

번갈아 물려준다

유두를 빨며 우리는 잠시 그녀의 순한 아기가 된다

그리곤 목청껏 외친다

-이수근 일병 이상 없습니다

-장성수 상병 이상 없습니다

우리들의 거시기는 이상 없이 꼿꼿하게 텐트를 치고

테레사가 암말 같은 엉덩이를 흔들며 떠나간 병실

밤새 비린 물고기 냄새로 넘실거리고

그 속을 헤엄쳐 다니는 이상한 꼬리들

 

 


 

 

이인철 시인 / 끝없이 자라나는 그림자나무

 

광합성을 하며 빛을 빨아들이는 내 그림자

어둑어둑해지면

그림자가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해

금세 잭의 콩나무처럼 커져서 염소좌까지 벋어가지

그럼 염소별좌가 잠을 털고 일어나서

반짝반짝 빛나는 누런 이빨을 들이대며 그림자를 뜯어먹지

단단한 그림자를 씹다가

가끔은 이빨이 빠져 유성이 돼

그러나 내 그림자는 절대로 먹지 않아

나는 그림자를 키우려고 걸어다니는 나무의 뿌리

내게서 그림자가 더 자라지 않으면

나를 뽑아내고 새로운 그림자나무를 심을 거야

오늘도 나의 몇 그루가 뽑혀나갔어

 

 


 

이인철 시인

1961년 전북 순창 출생. 2003년  《심상》을 통해 등단. 시집 『회색 병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