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준 시인 / 기대의 무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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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 시인 / 기대의 무게
아들이 온다 맛있는 걸 사 온다 그는 기다린다
식탁 위에 놓인 과일과 빵 상한 우유 한 팩 한 입도 베어 물지 않은 채 옆 노인을 불러 과자를 내민다
우리 아들이 사 온 거요 그의 눈은 늘 창문을 향해 있다
울리지 않는 전화벨 오지 않는 편지 그는 기다린다
때때로 손을 들어 공중을 쓸어본다 무엇을 움켜쥐려는 듯 누군가를 어루만지려는 듯 누르고 지우고 다시 누르다
그는 기다린다 맛있는 걸 사 온다 아들이 온다
-한국의사시인회 제13시집 <무등산 나무의사>
김호준 시인 / 금새
공주 갑사 가는 길 계룡산 기슭에서 나는 대성암 뒤뜰 나뭇가지에 금새가 출몰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금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랫동안 육체와 정신을 옭아매는 힘을 지켜왔나보다 발이 묶인 나도 하산하지 못한 채 그 주위를 서성거렸다
남의 말은 듣고 싶지 않지만 나의 귀는 늘 내 세상 반대편을 향하고 있어 나의 발도 그 길을 따라나서기 십상이다
누구는 금새 한 마리 잡아서 신세 폈다고 하고 누구는 벼랑에서 금새를 쫓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유명을 달리했다네 녀석이 섣불리 날지 못하는 이유는 육중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깃 속 깊숙이 숨겨놓은 금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네 그러니 금새 사냥을 위해서는 나는 새들의 날개를 면밀히 관찰해야겠다
문제는 금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새의 종류조차 다양하고 자유자재로 변신을 한다는 소문도 있으며 하물며 실존이 불분명하다는 설도 있다
공주 갑사 가는 길 계룡산 기슭에서 나는 스스로 금새가 되어가는 인파를 목도하고야 말았다
-시집 <너의 심장을 열어보고 싶은> 시인동네, 2022년
김호준 시인 / 해부 1
나에게는 오래전, 죽은 자의 심장을 꺼낸 기억이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은 애초부터 우리가 원했던 바가 아니었으므로 그 심장 또한 새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돌이켜보니 거무튀튀한 외연, 체구에 비해 유난히도 작았던 크기를 제외하고는 특이한 점이 어디에도 없었다. 심장은 누군가의 기억도 추억도 울음도 울림도 아니었다. 무엇도 될 수 없는 감정의 끈이 셀 수도 없어 큰 줄기에 자잘한 분지까지 심장으로 향하는 길은 다른 생의 누설일 뿐이었다. 더 이상 흐르지 않을 혈류에 숨을 다하고 마는 운명, 안식조차 없는 유일한 육체는 심장뿐이다. 어느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의식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날카로이 벼린 빛을 쥐고 어둠을 세로로 열었다. 이따금씩 새겨지는 봉합선이 죽음을 비는 생존자들의 원죄라고 믿으면서 우리는 이전의 행위로부터 거세게 반항해왔다. 반성이 없는 이기적인 팽창. 멀어질수록 더 빨리 멀어져간다는 간격의 슬픈 법칙. 적출한 심장을 거두어 찬물로 씻어냈다. 이를테면 이 모든 소란은 바다 한가운데 뚝하고 떨어진 작은 모래알에 불과했다.
김호준 시인 / 사과
살을 푹 파낸 사과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눈물처럼 흘러나오던 과즙이 이제는 멎은 걸까 상처로 갈변하는 환자의 일상 창틀로는 나비 한 마리가 힘껏 기어오르는 중이다 사과의 속살을 노리고 있을까 허기를 채우고서 떠나겠지 굳어버린 팔 애써 벌려 환자 미소 보내자 촉촉하게 오므라지는 날개 펄럭였다 포개어진 서로를 진찰하듯
김호준 시인 / 응급실 4
가볍게 취해 있는 그의 말에 잠겨 가난한 코의 그가 숨 막히게 성근 수렁이고 어쩌면 그의 귀가, 연고 없이 파닥거리다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와 같아도 위독함 없이 스러지다 피는 자리 나 스스로 빼앗은 자리, 이곳에 점칠 수 없이 축축한 머뭇거림이 즐비해 있다 진자리처럼 자욱한 안개의 잿빛 아래 스산하게 젖어드는 처마 아래 그는 고드름을 애써 부러뜨리려는 사람들이 많아 슬프다고 말했다 가보지 않은 길이 소란스럽지만은 않은 것처럼 찬란하지 않은 길 걷는다는 것이 아픈 바람 아니므로 우리 둘만이 아는 발자국 누군가 잊어줘야만 할 그 상처에는, 마치 꾸며낸 증상처럼 잡풀들이 은밀하게 바동거리고 있다 마당가에 썩은 나무 밑동 가리켜 몇 번이나 먼 세월 작별 노래로 삼으리라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처럼 그는 며칠을 더 앓았다 얼마 뒤에 누군가 나의 더러운 가운을 좋아하던 그에 관해 물었을 때 나는 목 놓아 울 수도 없이 지쳐 겸손해졌다
김호준 시인 / 심폐소생
하루가 다르게 그늘이 움트는 중환자실에서 통나무처럼 굳어가는 어느 육신을 본다 죽음을 감싸고 있는 갈비뼈의 저린 숨 살갗을 찢고 나갈 것 같은 고동 소리가 들리자 우리는 예정대로 그 가슴이라는 배에 올라탔다 긴 여정을 위해 노를 젓는 사람처럼 명상에 잠기는, 그의 심장 속에 바닷물이 흐르고 있다 풍랑의 향방은 새어 나오는 심전도와 같이 다난하고 한 자루 목필로 적을 수 없는 인생사보다 긴 뿌리를 지녔다 뗏목 위로 범람한 물줄기에 지켜보던 아들만이 짧은 비명을 냈을 뿐 서로에게서 점점이 작아지고 있는, 안개 속에서도 눈이 멀지 않는 물고기가 떼 지어 바다를 건너듯 온몸을 맡기고서야 닿은 평지 배에서 내리자 수면은 고요해졌다 이윽고 비가 내렸다
김호준 시인 / 드레싱
선선한 가을 날씨가 찾아온 어느 날 아침 병실의 마지막 드레싱이 끝나고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수십 년의 상처를 덮어온 얇은 막을 나는 조심스레 벗겨냈다 죽음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의사의 몫 이 일이 익숙해질까? 다른 환자들이 흘러들어 올 이 바다 같은 병실을 오늘도 나는 지키고 있다 드레싱이라는 한때의 일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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