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병일 시인 / 성벽을 걷다가 외 10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7. 08:00
이병일 시인 / 성벽을 걷다가

이병일 시인 / 성벽을 걷다가

 

 

나는 그것이 짐승의 털가죽인 줄 알았다

 

성벽 한쪽, 발라당 뒤집어져 죽은 짐승

구더기와 개미 떼와 딱정벌레 같은 것들

새까만 윤으로 번쩍거렸다

 

하도 심심해서

긴 막대기로 짐승을 뒤집어 밀쳐놓으려는데

붉으락푸르락 장수말벌 집이

고운 잠 깨우지 말라고 드나들었다

 

험한 꼴의 다른 이름은 죽음인가

무언가 안 되는 일이 많았기에

고약하게 아름다운 그것에게 돌을 던졌다

고압전류처럼 막막함도

삶이 되도록 감전시켜주니까

 

큰 추위에 얼어버린 너도밤나무,

오소리의 불행을 염하다가 죽었다

그래도 오후에 온 까막딱따구리는

죽음이 잘 뚫린다고 죽음을 밝힌다

하기야 제풀에 죽는 것도 있지만

독침 맞고 잘린 마디가 되살아난 것도 있다

죽은 것에서 나온 것과

산 것에서 나온 것이 걸핏하면 짝짓기를 한다

 

 


 

 

이병일 시인 / 나무는 나무를

 

 

나무는 나무를 지나 커다란 물항아리로 앉았죠

꽃과 열매를 다 잊고 골짜기에서 짐승과 한철,

겹겹 산 능선을 이루면서 지친 기색도 없다지요

나무는 나무를 지나 죽고,

죽은 후에야 그루터기란 이름을 가진다고 해요

 

온화하게 산과 강을 건너는 저녁을 삼킨 나무

오늘은 신발 벗어 두고 달의 핏자국을 만져요

나무는 천둥새를 쫓아온 사냥꾼인데요

뉘우침도 많아서 왜 여기에 왔는지 금방 잊고요

첫서리에 제 혼이 핏빛으로 지나간다고 잎을 벗죠

 

 


 

 

이병일 시인 / 당분간

 

 

폐허, 절로 외져 없었던 것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든다

 

날씨가 흐려도 목청을 높이는 사슴 떼가 청태를 뜯는다

 

여남은 뿔에만 골라 피는 봄빛이 흉터를 지우려 할 때

 

반은 희고 반은 분홍인 것이 그저 신성한 그 짓을 했다

 

다저녁 별자리와 뿔은 묵약도 없이 한 방향으로 자랐다

 

뿔에 난 꽃가지들은 쌀랑쌀랑 낙화도 없이 설경인데

 

당분간 몸이 되려고 하는 것들이 신열을 앓을 것이다

 

 


 

 

이병일 시인 / 라부여관

 

 

나의 피난처는 라부여관,

그런데 레바논의 백향목이 왜 생각날까

익힌 것은 깊고 잊힌 것은 춥겠지,

 

욕심은 나를 깨우고 잠들게 하고

핏줄보다 돈이 이끄는 대로

적과 싸우게 하고

총, 칼, 활이 내 관자놀이를 겨누게 한다

 

고흐, 까마귀 울음으로 칼을 갈아

귓등을 긋고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왜 피에서 해바라기 냄새가 나는지

왜 피로 죄와 믿음을 씻으려 하는지

 

오늘 수염으로 가득한 나의 얼굴은

까마귀가 되었다가

사이프러스와 밀밭이 되었다가

다시 새 피 얻을 몸으로 되돌아온다

 

왜 죄는 눈꺼풀이 없을까

나의 탄식소리로 말미암아

인중에 괸 침묵도 일렁거릴 것만 같다

격리와 고립은 한몸 같은데

얼음구멍같이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찔끔, 코피가 흘러나온다

라부여관, 신기하게도 죽음보다

고백을 듣는 방이 많았다

나는 종교도 없이 신앙심을 갖고 싶었다

캄캄한 것이 꾸물꾸물 밝아진다

 

-계간 『애지』 2024년 겨울호 발표

 

 


 

 

이병일 시인 / 물색과 작당

 

 

물소리 긷는 잉어가 수면을 갈아 낀다고 해서

봄밤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잉어는 제 몸에 잉걸불이 켜지면

봄밤이라는 것을 그냥 안다

 

보문호수는 둥근데 왜 모서리가 많을까

닫히지 않는 것이 수면이지만

수면은 물금으로 깨져있거나 붙어있다

잉어는 지느러미로 서서 걷기 시작한다

아가미가 믿는 것은

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갈대바람이다

조악한 그림자를 바투 붙여놓은 구름이다

 

호수의 공기는 미끄덩거리게 차갑지만

웅덩이를 골라 딛는 날쌘 물소리,

팔뚝만할까

장딴지만할까

산란이라는 말은 왜 비명으로 찢길까

호수를 한 바퀴 도니까

물이 물을 긁는 소리만이 상온이다

 

오늘도 아가미와 아가미는 알을 끌고 갈

밤의 잉걸불을 꿰기 위해

물색과 작당 사잇길에서 봄밤을 맞는다

감미롭게 끝장을 봐야 흐트러지는 알 빛들

촉촉 불탈 것만 같은데 척척 눈알이 생긴다

 

계간 『시와 편견』 2023년 여름호 발표

 

 


 

 

이병일 시인 / 쓰레기山과 코끼리

 

 

 코끼리 땅에 솟은 쓰레기山, 십만 평 쓰레기를 뒤지면서, 십만 평 플라스틱을 천천히 씹으면서, 코끼리가 똥을 눈다. 비닐조각이 항문에 붙어 꼬리는 곤혹스럽다.

 

 한때 코끼리는 코를 뭉게구름 속에 밀어 넣고 별과 무지개와 소나기를 집어먹거나 번쩍, 강줄기를 뽑아 골짜기를 반짝이게 했다. 지금은 극채색 주삿바늘과 손소독제, 양말과 구두, 전화선과 장갑을 먹어치우고 있다. 탈 없이 성장한다고 믿으면서

 

 공작과 개와 까마귀도 쓰레기山에 머리를 둔다.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부대끼며 빛나고 있는 것이다.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흐렸다 갰다 했다. 숨 가쁘게 왔지만 숨 막히게 혹은 숨 아프게 후대의 피는 훅훅 상했지만

 

 코끼리 콧등에 내려앉은 벌레만 쾌청했다. 쓰레기山은 홀로 버려진 코끼리를 부른다. 죽을힘을 다해 쓰레기를 먹는 제물을 부른다. 있는 힘을 다해 쓰레기山에 먹힐 제물을 부른다.

 

 저 코끼리는 풀과 나무를 끊고 씹고 부수는 어금니가 없어 쓰레기山에 왔다. 어금니 하나만 있어도 땅 그늘을 뒤집어썼을 텐데. 그러나 어쩌랴. 지금은 까닭 없이 눈을 찌푸린다. 똥이 똥을 밀어내는 내장의 기쁨이 없으니, 코끼리는 죽는다. 크게 죽어 미더운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친다.

 

월간 『현대문학』 2023년 6월호 발표

 

 


 

 

이병일 시인 / 허물 가진 것이 나는 좋다

 

 

우리는 허물 가진 것들을 보면

참, 독해

끔찍해

무서워

사막에 그슬린 돌덩이 같은 말을 한다

 

나는 허물 가진 것이 좋다

허물을 먹지 않고 사는 목숨은 없다

 

가재, 뱀, 누에, 매미

벗는 몸을 갖기 위해

끈끈한 허물을 가진다

숨을 갖기 위해

벗는다

몸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정말이지, 절망도 가둘 몸집을 가졌구나

허물 벗는데

여생을 모두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벗어도 벗겨내도 벗지 못한 허물이 있듯

히말라야 어느 고승은 정신이 허물이라고 했다

 

아하, 그렇다면 죽음도 허물이다

반 고흐, 칭기즈칸, 도스토예프스키

비석 뒤의 이야기로 반짝인다

 

한낱 이야기 앞에서

내가 공하게 믿어온 것들이 깨진다

다음이라는 것이 없는 몸들, 허물만 믿는다

 

계간 『애지』 2023년 가을호 발표

 

 


 

 

이병일 시인 / 죽순

 

 

 수상하다.

 습한 바람이 부는 저 대밭의 항문

 

 대롱이 길고 굵은 놈일수록 순을 크게 뽑아 올린다 깊숙이 박혀있던 뿌 리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푸른 힘을 밀어내고 있다 댓잎이 쌓여있 는 아랫도리마다 축축이 젖어 뾰죽 튀어나온 수만의 촉이 가볍게 머리 내밀고 뿌리는 스위치를 올릴 것이다.

 

 난 어디로부터 나온몸일까?

 

 대나무숲, 황소자리에서 쌍둥이자리로 넘어가는 초여름이다 땅속에서 는 어둠을 틈타 안테나를 내밀 것이다 난 초록의 빛을 품고 달빛 고운 하 늘에 뛰어오를 것이다 대나무 줄기가 서로 부딪쳐 원시의 소리를 내는 아침, 날이 더워질수록 물빛 속살을 적시며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가 초 승달이 보름달을 향해 갈수록, 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하늘에 닿을 때 까지 단전에 힘을 줄 것이다 대나무향이 하얗게 깔리는 밤, 튀어나온 뿌 리 마디마다 젖무덤처럼 불어올라 포개져있는 껍질을 열어젖힐 때, 댓잎 에 미끄러진 햇빛이 푸른 옷을 던질 것이다 나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이병일 시인 / 검은 구두의 시

 

 

이제 나는 어둡고 축축한 신발장 속에서

아무도 들여다보니 않는 검은 흉기가 되었다

 

융기; 이 무시무시한 물건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한때 나는 텅 빈 초원 속에서

스스로의 일생을 점칠 수 있는 뿔 달린 짐승이었다

분분히 몇몇 안되는 발굽들의 무리를 이끌고

풀의 낯짝 위로 건너오는 신성한 저녁을 응시했다

또 어떤 바람은 너무 쉽게 육체와 성욕을 버렸다고

말했다 나는 식욕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노을 속을

참방거리며 처음 지나는 벌판과 호수를 좋아했다

 

여러 번 접힌 꽃잎 속의 향기에 취할 때처럼

나는 악착같이 다가온 사냥꾼에게

고집 센 수컷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은 무서울 만치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이생에서 내생으로 너무 많은 길을 운반한 죄로

다시 탄탄한 근육을 가진 짐승으로 환생했던 거다

그때 한번이라도 나를 신어본 신사복들은

근엄한 야망을 피력하기 위해 물광을 자주 내곤 했다

검은 영혼을 가진 구두코 거울 속에서

나는 운명을 점지하는, 흉기가 되었고

계단의 각도에 따라 나를 찌르는 아침 혹은 저녁이

발바닥과 굽의 중심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병일 시인 / 희다​

 

한겨울보다 한여름에 죽는 것이 더 많다

훌러덩, 발라당 숨 까진 것만 죽는다

섭씨 42°C

팔공산의 사과나무를

강원도 홍천에 옮겨 심은 사람도 있다

기후 재앙을 피해

사과 하나만 믿고 높은 곳만 생각한다

고산지대가 좋다는 것은 짐승이든 사람이든

물러지는 일이 없다는 거

우박처럼 조악한 것도 없으니

뭐가 됐든 반반하게 얼굴 내밀고 있다

그런데 전기톱을 가지고 온 벌목꾼들이

소나무 참나무 잣나무들을 벤다

이대로 죽을 줄 알았던 참나무가

기어이 벌목꾼을 깔아뭉겠다

굴삭기로 들어올리는 죽음앞에서

물고 할퀴고 뜯긴 것은 지구밖에 없다

저기 저 벼락에 타서 죽은 산벚나무도

제 발등에 핀 꽃잎 줄기 하나로

깨지지 않은 죽음을 붙잡아 둔다

마치 발레리나의 발끝에서 피가 번지듯

언제나 불행 안쪽은 꽤 희다

 

 


 

 

이병일 시인 / 어머니의 작은 유언

 

 

얘야, 자두꽃이 한창이구나

불면의 신경 마디마디를 지우는

꽃비들이 희미하게 반짝이는데

벼락은 깜깜함에 눈먼 것들을 잘도 찾아가는구나

얘야, 생활이 편할수록 무르팍이 불편하구나

비를 켜는 악기, 먹구렁이 울음이 보고 싶구나

먼 데 있는 산사나무 그늘이 불어나듯

내 몸이 몹시 가려워지는구나

나는 캄캄한 무르팍 펴고

앞산에 나가 취 뜯고

들깨 모종을 해야 한단다

빈속이 허하도록

데면데면 놀아야 한단다

나는 흙으로 다시 오지 않으려

종교도 없이 지냈단다

얘야, 목이 마르구나

내게 이 빠진 호미를 다오

호미 끝엔 환한 세상이 와 있단다

 

- 시집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에서

 

 


 

이병일 시인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2005년 《평화신문 신춘문예》와 2007년 《문학수첩》신인상 시 당선.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나무는 나무를』 『처음 가는 마음』.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송수권시문학상 젋은시인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2014. 수주문학상 시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