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 시인 / 언니네 이발관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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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선 시인 / 언니네 이발관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옵니다 장미는 시들고 언니가 이발관으로 들어갑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고 아홉시 뉴스가 목이 마릅니다 거품키스라고 말하고 언니는 빈 총을 거울뒤에 둡니다 거미는 줄을 타고 내려옵니다 어머나 이런 아기를 어디서 주웠어요 불나방이 알엔비를 노래합니다 스타성은 없었다니까요 기타를 팔아야 리듬엔 블루스와 잘 수 있지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옵니다 사각턱을 사과처럼 돌려 깎을까요 귓밥엔 가윗밥을 먹일까요 어두운 데를 잘라 수척한 길이를 만들죠 손끝에 남은 냄새만큼 외로워야 할테니까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옵니다 풍선껌을 불어요 스웨터 속으로 넣기도 하죠 바람빠진 풍선으로 쉐도우 복싱을 해요 신음은 흘리지마세요 얼룩은 눈물처럼 따라다녀요 누구도 죽이진 못해요 총알이 떨어진지 오래 되었으니까 언니가 거울 뒤에서 웃어요 날마다 이발관이 자라고 있어요 언니가 거미를 삼켰습니다 이발관이 언니를 삼켰습니다.
김혜선 시인 / 녹턴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피아노를 치네. 스물세 명, 할배 할매 늙은 개 두어 마리 왔다 갔다 하는 섬마을 폐교 운동장에서 하릴없던 양귀비꽃이 변소 벼르박에 그린 노란 눈 염소가 말라가던 미역이 귀를 세우고 쇼팽을 듣네.
마요르카 섬을 울리는 바람소리 상드의 치맛자락에 스치는 밤공기 찻물은 끓어 넘치고 올리브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쇼팽이 듣네.
달빛이 밤바다에 물수제비를 뜨면 날아가 낯선 별, 내 지하방 천장에 박혔네. 누워도 누워도 낮은 방은 감귤처럼 뭉그러져 꿈속까지 얼룩은 번지는 지하방은 아편 먹은 유령선처럼 떠돌고 나는 떨어진 별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들었네.
올리브 잎에 떨어진 빗방울이 피아노 위를 구르네. 꾸덕꾸덕 폐교처럼 말라가던 작은 섬이 귀를 열고 가만히 시간의 결이 멈추는 풍경을 듣고 있네.
김혜선 시인 / 내소사에서 쓰는 편지
친구여 오늘은 너에게 내소사 전나무숲의 그윽한 향기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너에게 내소사 솟을 꽃살문에 관한 얘기 를 해주고 싶다 한 송이 한 송이마다 금강경 천수경을 새겨 넣으며 풍경소리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냈을 누군가의 소명을 살그머니 엿보고 싶다 매화 국화 모란 꽃잎에 자신의 속마음까지도 새겨 넣었을 그 옛날 어느 누구의 곱다란 손길이 극락정토로 가는 문을 저리도 활짝 열어놓고 우리를 맞이하는 것인지 길이 다르고 꿈이 다른 너와 내가 건너고 싶은 저 꽃들을 바라보며 저 꽃에서 무수히 흘러나오는 불법을 들으며 나는 오늘 너에게 한 송이 꽃을 띄운다
김혜선 시인 / 얼굴들
당신은 가면을 쓰고 빗속을 걸어 다닙니다 표정이 없으므로 불안도 없이 그러나 고개를 가로저으면 얼굴이 흘러내립니다 젖은 얼굴이 벗겨지고 가면의 입속에서 백 년째 막다른 길이 흘러나옵니다 나는 가면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해요 당신의 말이 만져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쓸쓸해집니다 종이 빨대가 젖어 가는 동안 말은 전달 불가능한 것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망고 주스와 비는 고정된 실재도 아닙니다 말의 바깥이 없어서 가면이 녹아내립니다 당신은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가면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구하는 장소가 됩니다 당신은 왜 할 말이 없어진 계절에 두 개의 얼굴로 태어나고 사라집니까 난 왜 자꾸만 이름이 바뀝니까 불안 뒤에 버러진 말들과 사귈 수는 없을까요 당신이 오기를 바라지 않고 기다리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 당신이 오기를 바라지 않고 기다리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시집 『왜 오늘 밤은 내일 밤과 다른가요』에서
김혜선 시인 / 인형 뽑기
우린 여길 상실이라 불러 불빛이 꺼지지 않아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가 뒤섞여 있지 우리는 손아귀를 물어뜯는 연습에 골몰하곤 해 이빨이 다 부러지고 입술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눈알이 빠진 애들은 바닥으로 내려가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헤엄치고 헤엄쳐서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자유로운 변형 위험한 생각이나 살찐 파리가 되지 물 위에 앉은 애들과 그 위를 나는 파리와 교살범처럼 정교해진 손아귀가 포르말린에 담긴 상어처럼 떠 있는 여기 또다시 메타돈 같은 눈빛 하나 다가와 익사를 기다리지 썩지 않는 아름다운 상실을 꿈꾸고 있지
- 월간 《현대시≫ 2022년 12월호
김혜선 시인 / 잠깐 볼 수 있는
밤이 온다 연어처럼 구름을 몰고 온다 어둠에 덮인 버스 정류장으로 마지막 물살을 걷어차고 연어처럼 올라온다 몽롱한 밤 차가운 밤 문지를수록 살아나는 밤 숨지 않고 멈추지 않는다 모래를 밟고 걸었던 밤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야기도 없고 말도 없는 소리를 정류장 표지판에 붙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는 그림자를 붙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밤 혼자 미쳐 덜컹이는 밤 거친 물살을 뚫고 올라오는 연어를 낚아채기 위해 바위 끝에 앉아 있는 독수리처럼 피부와 눈동자가 붉어진다 사라진 종점을 찾고 있는 밤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차다 짙어 간다
-시집<나의 해적>에서
김혜선 시인 / 바그다드 편의점
꼬았던 다리를 풀어 어두운 시간 속으로 깊이 더 깊이, 꿈을 들고 다니는 여자 편의점을 털다 잡힌 남자랑 사귀고 싶어
연애는 아름다워도 될까, 부러진 손톱처럼 질문은 한없이 투명한 문장 같았고
어디로 가야 해? 얼굴을 지운 채 해가 뜨지 않아서 편의점 냉장고 안에서 폐기되는 시간들 없는 시간을 흘러가는 구름 연애는 아무 표정 없이도 끝낼 수 있다
나는 여자를 본 것도 같다 자른 사과의 단면에서 뚝뚝 떨어지는 통각들 서쪽으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옷장 속에 걸어 둔 여자의 빨간 치마와 압화처럼 묻은 속살의 감정 이미 겪은 일처럼 불안한 밤이 입을 맞추고 마침내 여자는 모든 증상으로 목을 맸다
-시집 『왜 오늘 밤은 내일 밤과 다른가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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