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성준 시인 / 그대가 있음으로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7. 08:00
박성준 시인 / 그대가 있음으로

박성준 시인 / 그대가 있음으로

 

 

어떤 이름으로든

그대가 있어 행복하다

 

아픔과 그리움이 진할수록

그대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별과 바다와 하늘의 이름으로도

그대를 꿈꾼다

 

사랑으로 가득찬 희망 때문에

억새풀의 강함처럼

삶의 의욕도 모두

그대로 인하여 더욱 진해지고

슬픔이라 할 수 있는 눈물조차도

그대가 있어 사치라 한다

 

괴로움은 혼자 이기는 연습을 하고

될 수만 있다면

그대 앞에선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고개를 들고 싶다

 

나의 가슴을 채울 수 있는

그대의 언어들

아픔과 비난조차도 싫어하지 않고

그대가 있음으로 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감당하며 이기는 느낌으로

기쁘게 받아야지

 

그대가 있음으로

내 언어가 웃음으로 빛난다

 

 


 

 

박성준 시인 / 과제

 

 

 우리에게 아주 덕망이 높았던 교수는 돌연 강의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여러분께서 지금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을 해왔다 목소리는 낮았고 매우 단호했기 때문에 몇몇 여학생들은 그걸 폭력으로 받아들이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갸우뚱 교수를 올려다 보았다 종이를 찢을 때마다 벌레소리가 들린다거나 손금에 서식하고 있는 새에 대해 말해야겠다는, 혹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가벼운 농담조의 이야기들은 그 덕망 높은 교수의 재미없는 위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어떤 실천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수십 년간 강단에 있으면서도 없었던 일이다 썩은 과일은 술이 되고 술을 마시면 씨가 없는 과일처럼 결국에는 조용해지듯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강의실 안에서 교수는 누구든 말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를 작정했다 개중에 용기가 있던 학생이 제 말 속에 사투리를 억누르며, 그럼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정해진 답을 물었으나, 그런 종류의 빗겨나간 질문들로는 이와 같은 침묵을 깨기가 어려웠음으로 교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얼굴로 담배를 교탁에 비벼 꼈다 표현되는 것은 그뿐이었다 모두에게 필요로 하는 시간이 지났으나 모두에게 적당한 결과는 생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그 덕망 높았던 교수는 할당된 시간을 다 채우고는 짐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안심한 학생들은 차례차례 그 뒤를 따랐고 다음 시간은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왠지 모를 부채감을 가지고 희희덕거렸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교탁에 담배꽁초를 치우는 학생이 있었다 학생은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준 시인 / 저 바깥으로 향하는 한결같은 피의 즐거움

 

 

호스를 끌어다가 책장에 물을 준다

이제 더는 자라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게 마음이다

목소리 속에 공터가 있다면

공터를 지나가는 벙어리 대신 말을 앓다가

두 눈 딱 감고 몇천 년쯤 말을 앓다가

두 눈 딱 감고 몇천 년쯤 말을 앓다가

너는 이미 죽었다고

추문을 당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보다 더 많이 산 것 같은 책들이

다시 가볍게 말라가는 동안

종이는 나이테를 생각한다

울퉁불퉁 울어버린 공간만큼

뿌리나 그늘이 있었던 적을 생각한다

활자들이 부서지고 빻아지고 물 안에서 저자들이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가라앉고 또 문드러지고

배열을 바꿔 주인 없는 자리를 문 벌레들이

온몸을 기어 다녀도 그늘을 빌려 쓰는 이게

마음이다

물을 먹은 책들이 다시 가벼워지는 동안

종이는 무슨 말을 또 붙들고 있나

꼭 한 명쯤 불구를 만들어내는 가족력 때문에

언젠가 제 몫을 다해 미치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성격이 되어버린 병은 자주

간밤에 환청을 데리고 들어오고

나는 마음 없는 마음자리에 맘에 들지 않는 그늘자리를 찾아

숨을 놓치고 싶은 그런 마음

물에 젖은 책들은 모두 선인장처럼

잎이 되지 못한 뾰족한 포기처럼

훌륭한 학살의 마음

황홀한 전쟁의 마음

행복한 야만의 마음

호스를 끌어다가 책장에 물을 준다 우연을 끌어다가

마음에 시간을 준다

선인장은 제 속을 적시는 대신 가시를 바깥으로 두고 있고

뼈 대신 가시를 품고 사는 물고기들은 물 바깥이

이미 죽음이란 것을 직감해 오래전

눈을 퇴화시켰다

두 눈을 딱 감고 몇천 년쯤 시간을 참아야

마음이 방치해둔 책에서는 버섯이 자라날까

악몽도 병균이라 꿈에서라도 버림을 받고 꿈에서도

식욕이 돌았다

무슨 말을 더 하고 싶다는 듯 낼름

책에서부터 혀를 내민 것들을 나는 가만히 만진다

 

 


 

 

박성준 시인 / 돼지표 본드

 

 

유리잔에 깨진 손잡이를 붙이다가

본드의 빵빵하게 부른 배를 만진다

벌러덩 뒤집힌 코를 잘 막아두지 않아

폭식성에 찌든 누런 군침들이 본드 입구에 말라붙어 있다

짧은 다리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길

돼지가 무거운 발을 내딛고 있는 걸까

누런 고무 화합물이 살 굽는 냄새로

목 비튼 지문을 간직하고 떨어져 나간다

돼지의 걸음 뒤로 유리잔과 손잡이는

서로 잊었던 시간을 지운다, 감정도 없는

축축한 살을 꼭 껴안고 있다

식탐이 말라붙은 환각 속에서

짧은 목으로 돼지가 먼 하늘을 되뇌어본다

머리 위에서부터 망명한 저 바람은

알프스 동굴까지 외치*-외치! 굳은 몸을 부르며

살찐 미라의 주검 직전 표정을 돼지에게 문질러놓았다

감긴 눈꺼풀 사이에서 잃어버린 웃음들이 흘러나온다

물렁물렁한 살 안쪽을 쭉 쥐어짤 때마다

식육점 갈고리에 두고 온 몸이 달그락거리고

흔들리는 오후 한때가 본드 주둥이 끝에서 굳어가고 있다

저 차갑고 허전한 육체

얼마나 맛있게 굳어갈 주검의 준비 과정인지

돼지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기꺼이 틈이 된다

유리잔과 손잡이 사이 얼어붙은 강줄기가

웃다 멈춘 순간의 눈꺼풀만큼이나 단단하다

 

* 외치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살이 찐 미라.

 

- 2009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박성준 시인 / 전자보다 후자를 위한 사교활동

 

 

 나는 일곱 시에 살다가 다섯 시에 도착한다

 너는 이름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만 갈색이 된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창문은 창문을 허용했고, 뒤를 돌아볼 때마다 자전거는꼭 시계탑 아래를 지나갔다

 

 기관차는 사각사각 연필을 깎는다

 여름이다 편지를 쓸 수 밖에 없었다

 

 너의 꽃집에서는 꽃이 자라지 않는다. 그러는 지금

 

 철로는 가까워지기 싫어 길이 되고, 내가 아는 여배우들은 모두 나를 몰라 아름다웠다

 

 내가 모르는 너는 지금은 늘 아름답다

 

-시집 『잘 모르는 사이』에서

 

 


 

 

박성준 시인 / 전한다

 

애칭을 불러줘도 너는 자주 토라졌지

애칭은 불러주는 사람이 정하는 거라고

 

나는 원하고 너는 원하지 않는 규칙들

나는 사실 네가 원하는 것을 잘 모른다

 

보여주고 싶은 부분보다

보이는 전부가 좋아서

 

또야, 또야, 나열할 때마다

너는 또 무언가 저질러 버리는

 

다시, 그런

또야?

설거지하다가 종종 그릇을 깨거나

좀처럼 베이기 힘든 종이컵에도 손이 베이는

꼭,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입가에 양념이 잔뜩 묻은 줄도 모르고, 꼭꼭 씹다가

가슴팍 언저리마다 반찬 흔적을 자주 남기던

 

또야?

또야, 하고 부르면 내게 눈을 흘기다가도

너는 다시 하던 것을 계속한다

해주고 싶은 것은 많은데 다 해 줄 수는 없어

오래 살고 싶은데 아프기만 해

 

이게 실패라면 실패일까?

애칭이 길어진다

 

전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캉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담벼락에 서생원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아무것도 되기 싫은 게 아니듯이

 

네가 자꾸 무엇이 되려고 하면

나는 내가 거기 없을까 봐 겁이 나기도 해

 

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망각하고

우물에 빠진 마음을 더 깊이 가라앉힌다

 

이제 내가 싫다고

떠난다고 부들부들 떨면서 집을 나간 날에도

너 대신 고요가 주저앉은 거실에서

나는

또야? 하고 허탈을 또 삼켰지

무선 이어폰 한 짝은 꼭 잃어버려야 하는 거라서

무선보다 유선이 편한 사람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서

이어폰 한 짝만을 발견하는 쓸모처럼

 

나는 또야?

겨우, 무섭도록 반복주의자

엉킨 실타래를 얼마나 다 풀어야만 또가 될까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할수록

너를 안아주려고 생겨난 두 팔은 자꾸 작아지게 돼

정말

빠뜨리면 죽는다는데

이름 대신 다른 게 빠진 그곳에서

나는 우물에 가만히 얼굴을 비춰보면서

또야?

하고, 그런 나를 전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너의 평화를

전수안무…… 바둑이와 돌돌이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이름과 함께

전한다

나는

 

너를 부르는 종이컵 수화기 줄 곁에

작은 떨림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3년 여름호 발표

 

 


 

 

박성준 시인 / 취약한 것

 

​넘어진 아이가 다시 엄마를 향해 뛴다.

정말이야? 아니

선생님 생각이 궁금해서요?

안개와 숲은 좋아하지만, 신호등은 아니기로 해요. 누구나 하고 싶다고 해서 다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잘할 수 있다고 해서 특별해지는 것도 아니다.

안개는 잘한다. 특별하게

정말이냐?

선생님 저는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해야 하는 일, 그래도 해야 하는 일

운전을 하다가 객사를 하면 어떡하지요?

청국장에는 건새우가 없었으면 좋겠지만 엄마는, 넘어진 적이 없는 엄마는

청국장을 잘 끓인다.

결국 간곡한 모든 것들은 꿈이기로 한다. 꾸미지도 못할 거면서

용기가 없었나?

정말이니?

넘어진 땅을 딛고 일어나는 손바닥은 땅보다 더 넓었습니다.

청국장이 끓으면서 방은 쿰쿰한 안개만 한가득

용서가 없었나?

선생님, 저는 이제 조금 특별한 숲으로 가요. ​

​​

-계간 『시현실』 2024년 겨울호 발표

 

 


 

 

박성준 시인 / 혼자의 힘으로는 전혀, 연금술

인간은 작은 것에 감동을 하고

신의 힌트는 그보다도 작게 흔적을 남긴다

 

신체와 닮은 음식이 몸에 좋다고

이렇게 많은 바닥에, 저렇게 많은 얼굴이 떨어져 있다니

 

차에서 피운 연탄불은 작은 빛으로 충실해진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연기는 서로를 잡아당기면서 팽팽해진다

 

호두를 먹으면 뇌에 좋고 감귤류 과일은 젖을 돌게 한다지

두 개씩 열리는 무화과는 고환을 닮았대

그 속내는 씨가 너무 많아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대

네 심장을 닮은 토마토와 같이

악몽이 지나가 축축한 눈동자와 같이

정말 그것들이 그 부위에 다 좋을까?

그래도 무화과라니

심장을 닮은 토마토가 피를 맑게 해준대

과일과 채소에 어디 중간쯤 걸쳐 있는 그런 마음이

대체 미워할 수 없어

꼭 네 심장 같은 것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도 미안하지 않게 된다

죄송하다고 해야만 이곳과 조금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더 멀리

다시 으깨지는 토마토

미워하지 않기로 한 마음을 닮은 토마토

 

더 이상은 강해지지는 않기로 한다

 

전봇대 뒤에서 빼꼼 얼굴만 내밀던 아이의 얼굴은

주렁주렁 포도알과 같이 포옹으로 뭉개진 얼굴이 되고

 

아무것도 열리지 않은 늦여름의 꽃에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과연, 큰 힌트를 얻었다

 

이제 당신이 우리의 등을 껴안으면

지구는 금세 작아질 것이다​

-계간 『시인시대』 2025년 봄호 발표

 

 


 

박성준 시인

1986년 서울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09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시가 당선되어 등단,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되어 평론가로 활동 中. 시집 『몰아쓴 일기』 『잘 모르는 사이』.  2015년 박인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