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 / 운수 좋은 날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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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 운수 좋은 날
단골식당에 12시 전에 도착해 번호표 없이 점심을 먹고 서비스로 나온 생선전에 가시가 하나도 없고 파란불이 깜박이는 동안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 "환승입니다" 소리를 들으며 (교통비 절약했다!) 버스에 올라타 내가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고 내가 누르지 않아도 누군가 벨을 눌러 뒤뚱거리지 않고 착지에 성공해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익숙한 콘크리트 속으로 들어가 배터리가 떨어졌다는 경고음 없이 현관문이 스르르 열리는 날
-<공항철도> (2021년)
최영미 시인 / 3월 3월이 전진한다 불퇴전의 용사처럼 앞으로 앞으로 겨울을 밀어내며 봄을 쟁취하려 맨 앞에서 싸우느라 거칠어진 손으로 나뭇가지의 눈을 털고 빛의 화살을 던져 얼음을 녹인다
겨울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얼어붙은 뿌리에 부활의 물을 뿌리고 찬바람 흙먼지 마시며 2월의 벽을 흔들어 새싹이 돋고 투박한 3월이 제 몸을 부수어 만든 길에 4월과 5월이 저만치 따라오며 저 잘난 척 출렁대며 깃발을 흔든다 봄은 내거야, 내가 봄이라고!
하얀 목련이 피었다 지고 벚꽃이 재잘거리는 4월이 오면 사람들은 까맣게 3월을 잊는다 어젯밤 꿈을 잊듯이
연둣빛 잎사귀들이 앞다투어 자태를 뽐내는 오후 더 따뜻하고 더 푸른 세상이 왔다고 초록 세상을 선포한 공화국의 휴일. 어른들은 외투를 벗어 팔에 걸고 아이들은 깡충거리며 싱그러운 속살을 내보이고 계절의 여왕이 오셨다며 환호를 바친다 커다란 휘장을 두르고 액자 속에 들어간 4월 한 번 싸워보지도 않은 4월과 5월에 찬사가 쏟아지고 아픔을 모르는 5월이 봄을 대표해 상을 받는다
5월 천하,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 사라진 3월의 명복을 비는 이는 없다
제 임무를 다하고 잊혀진 3월은 아픔을 참으며 겨울과 싸우느라 다치고 터진 생살을 꿰매고 다음 전투를 위해 제 몸을 추스르며 또 1년을 기다린다 조용히 죽은 듯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든 3월이여 봄을 열었으나 봄에 잊혀진 -시집 『공항철도』(이미출판, 2021) 수록
최영미 시인 / 공항철도
“최선의 정치란 훌륭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최선의 정치는 순리를 따르는데서 이루어진다.” -김시습 (金時習) 눈을 감았다 떠 보니 한강이 거꾸로 흐른다
뒤로 가는 열차에 내가 탔구나 -시집 『공항철도』(이미, 2021)수록
최영미 시인 / 돼지들에게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난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머니가 털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내가 못들은 척 외면하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꺽었다. 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인 없는 꽃밭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 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 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티는 계속되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때로 싸우고 때로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詩集 『돼지들에게』 (실천문학사) 중에서
최영미 시인 / 돼지의 변신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나는 슬프다.
-詩集 『돼지들에게』 (실천문학사) 중에서
최영미 시인 / 앵무새들
사람들은 나를 잊었다. 오래 나타나지 않자, 나의 친구들도 나를 잊었다. 오로지 나의 적들만이 나를 기억하고 앵무새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내 목소리를 흉내내는 그대는 앵무새. 내가 가는 곳마다 쫓아와 목청 높여 철 지난 운동가를 부르고 나를 따라 교회에도 가고 감옥에도 가고 연극이 끝난 뒤 미술관의 어두운 전시실에도 나타나는 그 목소리가 더 크고 그럴듯해 사람들은 그가 가짜라는 사실을 잊는다.
나의 친구들이 그에게 내가 없는 동안 어릿광대짓을 계속하라고 돈을 주었다.
그보다 머리 좋은 또 다른 앵무새는 조금씩, 표시나지 않게 훔치는 법을 안다. 내가 상점에서 그녀에게 선물할 물건을 고르는 동안 (나는 그녀를 좋아했었다!) 그녀는 내가 이미 오래전에 발표한 노래를 도적질했다.
그해 시월 내가 강둑에서 방생했던 청춘의 빛과 그림자를, 내가 앉았던 자리의 허공 한 줌조차 훔치는 그 수법이 교묘해 아무도 그게 내 손바닥에서 나온 허공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의 적들이 그녀에게 왕관을 씌어주었다.
-시집 『돼지들에게』 중에서
최영미 시인 / 세기말, 제기랄
잔치가 끝난 뒤에도 설거지 중인 내게 죄가 있다면, 이 세상을 사랑한 죄밖에……
한 번도 제대로 저지르지 못했으면서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
비틀거리며 가는 세기말, 제기랄이여.
-시집 『돼지들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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