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채종국 시인 / 화음이 있는 풍경 외 1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7. 08:00
채종국 시인 / 화음이 있는 풍경

채종국 시인 / 화음이 있는 풍경

 

 

바울의 친절한 편지를 읽고 있는 봄밤

슈만의 피아노곡이 주술처럼 평화를 부른다

 

연필은 언제나 한 줌 실언을 예언한다는

연희의 농담을 이해했을 때

상처투성이 내 시들은 절망이라는 흉터만 남겼지

 

폭설이 내리던 날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 먹으며 바라보던 눈꽃은

이별을 만끽하는 눈빛이었지

눈꽃의 영성이랄까

눈꽃의 자화상이 봄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새하얀 유혈 사태

겨울을 향한 싸움도 끝나 가는 걸

마중 나온 봄꽃의 인사를 보고 알게 되었지

 

시간여행을 끝낸 영혼은 이제

긴 풍경으로 서 있겠지

겨울도 풍경으로 남을 테고

연희도 고요한 풍경으로 봄비 맞을 준비를 하겠지

 

고요가 자리를 내준 빈집으로 너를 초대해야지

꽃들의 함성을 마당에 깔고

봄의 이유였던 너를 기다려야지

 

피아노 화음이 그날처럼 피어오르는,

 

 


 

 

채종국 시인 / 굼벵이

 

 

내게 기는 재주라도 있다면 굼벵이가 되고 싶다

느릿한 흙으로 만든 집 아래 볏짚을 펼쳐 활짝

당신의 뿌리 근처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뚱뚱한 아랫배로 돋는 날개마저 벗어던지고

한 생을 꼬물꼬물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

 

-월간 『 모던포엠 』 2025년 1월호 발표

 

 


 

 

채종국 시인 / 주사위 게임

 

 

1.

언제나 패배는 나의 일

원하는 너는 한 번도 보이질 않고

주문을 외우는 간절함에도

사랑한다는 탄성은 들리지 않았어

 

2.

모서리로 서 있을 순 없었어

비슷한 확률이라도 기대고 싶었어

바닥에 떨어질 땐 절망이 벽을 세우고 있었고

때마다 다시 주워 던지며 일어서야 했어

 

3.

희망은 언제나 샴쌍둥이

절망의 곁에 붙어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처럼 말이지

신기루는 아니라는 듯,

훔쳐보고 싶었지만 그게 답은 아니었어

 

4.

그렇게 가볍게 던지는 것인지도 몰라

가령 운명이라거나, 사랑이라거나

시시껄렁한 목숨을 걸었다는 도박 따위까지

견고한 놀이는 세상에 없는 거야

 

5.

손끝에 떨어진 순간

유빙처럼 불안 위를 떠다니겠지

불순물 섞인 미래를 뒤로

음각으로 새겨진 여섯 운명을 따라

알 수 없는 탐욕으로 서서히 녹아 들어가겠지

 

6.

확률이라는 운명을 담아

겜블의 숲속, 한 채의 성처럼 서 있어

평생 저 성에 갇혀 뒹굴겠지

잃어버린 아이들의 브루마블 게임처럼

 

-계간 『 맥 』 2024년 여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기미幾微

 

 

라디오 속, 계곡이 깊어졌습니다

 

커튼 속 어둠이 주름져 갑니다

 

매미의 울음이 암매장되었습니다

 

빌딩의 불빛이 조등을 매답니다

 

성당의 종소리가 연기처럼 가벼워집니다

 

나팔꽃 파란 연주, 서늘한 정오를 지납니다

 

담벼락 햇살 한 줌, 눈물과 바꿉니다

 

기차가 철교를 허밍처럼 지납니다

 

달의 상처가 뚜렷이 보입니다

 

가로등 졸음에 저녁이 깊습니다

 

바람의 살결이 파충류를 닮습니다

 

골목이 또 한 살, 잎새를 드리웁니다

 

강물의 바뀐 필체를 읽을 수 있습니다

 

까마귀 울음소리, 담장을 찢습니다

 

다시 새벽, 별빛과 내가 가까워집니다

 

숨소리가 바늘처럼 가늘어집니다

 

심장이 자꾸 입을 닫으려 합니다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계간『미래시학』 2021년 가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편지

 

 

수천 활자가 바다를 기억하고 있

빽빽한 청어목의 슬픔

마른 비린내가 문자가 되기 전

이미 반짝였을 문장

 

햇살을 풀어 놓은 그물에

펄떡이며 써나간 바다의 힘줄

 

작은 상자에 담겨

수메르 문자처럼 남아 있지만

멀어진 파도가 눈동자에 걸려 있다

 

바다는 은빛 칼을 휘둘러 쓴

수만 킬로를 가로지른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문자로 지상에 이르러

햇살과 물결을 엮어

바다를 동여맨 편지

 

우체국 소인 없는 트럭에 실려

누군가의 입속으로 읽혀 들어갈

은빛 레시피,

 

멸치의 생몰 연대를

 

계간 『다층』 2020년 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장미

─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흔한 꽃이지만 흔한 아름다움은 아니었어

흔한 이름이지만 흔한 네가 아니었던 거지

 

봄볕을 좋아하는 너는

마른 담벼락 같은 내게 뿌리 내렸어

 

함께 커피를 마시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손잡고

함께 살내음 울음을 듣던

깊은 잠행의 소행성

 

네가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너를 위해 내가 공들인 시간 때문일까?

 

그럴 거야, 네가 정말 소중한 건

내 존재에 호흡을 입혀 주었기 때문이야

 

공을 들인다는 건

내가 가꿔온 시간에 너를 꽃피운다는 말

 

흔한 꽃이라 말하지만 이미 넌

내 존재의 완성인 걸

 

네가 소중한 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너의 가시가

내 목에 걸려있기 때문이야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

 

계간『리토피아』 2019년 가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Emergency

 

 

지나는 구름이 내 폐를 그리네

바람에 서서히 부서지는 폐

숨을 쉴 수 없네

 

파란 문장 속, CO2

염증처럼 퍼지는 말

 

─ 폐에 구멍을 뚫고 말들을 빼줘야 해

비문非文이 차올라 호흡 곤란이 오네

 

─ 뇌로 호흡해야 해

운율을 살려 호흡기를 꽂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네

 

병신춤처럼 흩어지는 문장

뒤틀리는 행간에, 각혈을 하고

똑바로 누워 하늘을 보지만

부서진 장기들을 모을 수 없네

 

─ 심장을 만들어 줄까

환영처럼 들리는 말

다시 심장이 생기면

바람이 망가트린 숨결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외딴섬 몇 개, 뇌수를 떠돌고

전신 마취된 문장 호흡을 멈추네

 

동공이 멈춘 자리

펄떡이는 심장

 

희미한 문장 부호, 파르르 손을 떠는

 

계간 『시와 문화』 2019년 겨울호 발표

 

 


 

 

채종국 시인  / 둥근 별

 

 

별들은 가끔 이 땅에

후드득 쏟아지나 봐, 그것은 별들의 슬픔

온몸으로 후줄근히 쏟아져 내리다

오늘은 창가에 한 방울 별로 맺혀 흐르지

별과 별이 만나 더 둥근 별이 되기도 하지

수만 광년 떨어진 별 사이 거리도

바람 한 자락이면 서로의 중력으로 끌어당기지

가끔은 너에게 후드득 쏟아지던 나의 슬픔

별이고 별이던 내 맘이 너의 창가에 흐르고

너의 입술, 바람 한 자락이

한밤의 슬픔을 덮쳐 내게로 이르는 환희

별들의 노래가 너의 눈 밑에서 술렁대는 밤

동그랗게 일렁이는 별의 물결

사랑한다, 반짝이며 흐르는 네 눈가의 잔별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채종국 시인 / 부활처럼

 

 

 햇살이 혈관을 파고드는 봄날 아침. 부활절 종소리가 어둠을 밀어낸다. 간밤의 별똥별은 오늘 눈 뜬 꽃망울의 은총. 연두의 발성은 두 옥타브 높은 초록을 불러오고 어제 있던 나의 실패가 풍경처럼 강변의 외벽에 걸려있다. 배고픈 가마우지 강물을 떠돌고 은빛 물감을 월요일에 칠하지만 예정된 미래는 설렘으로 바뀔 수 없는 법.

 

 고난주간이 끝나가는 날.

 어둠의 역사 모퉁이를 돌며 평화를 빈다.

 

 창문의 감정은

 햇살의 위로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유리창 너머엔 부활처럼 햇살의 싹이 튼다.

 

-계간 『포엠포엠』 2024년 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잠이 너를 잠들게 할 거야

 

 

이제 그만 자야지

 

달이 여우 눈을 뜨고 있어

 

방 안 곳곳엔 피아노 화음들이 녹아내려

 

너를 다투던 사람들이 저녁의 뒤란에 잠들어 있어

 

부끄러운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좀 더 뻔뻔해질 수 있을까

 

밤새 골목의 휘파람이 바람의 살을 찢고 있어

 

별빛이 새벽을 할퀴는 소리에 나무들 숨을 죽이고

 

빈 가지에는 축축한 절망이 얼어가고 있어

 

녹지 않은 절망을 희망이라 부를 수는 없겠지

 

달이 여우 눈을 감고 있어

 

이제 그만 자야지

 

잠이 너를 잠들게 할 거야

 

-계간 『포엠포엠』 2024년 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빈방

 

버려진 의자 위에

잠이 들었다

 

손바닥만 한 아기 고양이

 

죽을 만큼 예뻤다

 

듬성듬성 쓰레기 새롭게 길을 낸

뒷골목 겨울 응달에

하얗게 누워 꿈을 꾸는 듯했다

 

바람이 눈을 슬고

응달이 몸을 내밀어

햇살에 자릴 양보하는

잠과 죽음이

하얀 털끝에 묻은 아침

 

녀석이 방을

비우는 사이

 

강물이 입을 열고

동백이 입을 열고

햇살이 입을 열어

세상 모든 초록을

반기는 중이다

 

문득,

영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햇살이

문상처럼 따뜻했으면 좋겠다

​​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채종국 시인 / 솔베이지의 나무

 

지녀온 것들을 버리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준비 중이다

 

뼈만 남은 몇 개의 손가락에 가을을 모아

파란 천 뒤덮인 마지막 계절을 향해

제祭를 올리는 중이다

 

11월은 숫자도 야위어 가는 혹성의 극지

 

바람에 발톱이 패이고

늑골이 서늘한 밤을 지나면

등뼈 하나로

죽은 목숨처럼 겨울을 견뎌내야겠지

 

파릇한 심장에 피가 돌 때까지

햇살이 놓는 혈관 주사에

손목을 내밀어야겠지

 

두 손에 아지랑이 꼬옥 쥐고

온몸으로 봄 지도를 그려야겠지

 

이제 막,

부활을 꿈꾸는 제사장처럼

마지막 남은 살점 하나 허공에 묻는다

 

제가 서 있는 자리, 꿈꾸는 자리

바스락거리는 가을 무덤 아래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채종국 시인 / 시나무

시를 쓰는 나무가 있다

연과 연 사이 가지를 펼치고

행과 행 사이 잎새를 드리웠다

생각 한 줄을 위해

생살 같은 잎을 버리기도 한다

몸통 사이 부름켜를 열어

계절을 열고 꽃을 피운다

뿌리 깊은 생각과 초록이 열린

수런대는 말을 가지에 매달았다

잎에 새겨진 문장엔 강이 흐른다

실핏줄 같은 문장 사이를

두근대며 속살거리는

여린 생명의 이야기가

파란 하늘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반짝이는 노래를 찾아

아름드리 대지를 펼치고

별빛 한 페이지와

달빛 한 줄을 몸에 새긴

들판의 생각 한 잎이

푸른 허공에 시를 쓰고 있다

-애지 2023년 가을호

 

 


 

 

채종국 시인 / 어쩌면

 

 

어쩌면 너는

 

일몰의 노을이거나

 

빌려온 시어이거나

 

풀잎의 심장이거나

 

행간의 폐허이거나

 

증오의 범람이거나

 

수억 년 적막이거나

 

심해의 수압이거나

 

지구의 기울기거나

 

성간의 먼지이거나

 

어둠의 입술이거나

 

고통의 영원한 회귀이거나

 

-계간 『다층』 2024년 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파랑주의보

 아침에 깨어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꿈결 간에 숨이 있었고 간밤의 피로가 달라붙어 있었다. 골똘히 눈을 감으니 잠시의 시간이 백 년에 잠기고, 다시 백 년을 흘려 햇살을 기다린다. 삐걱거리는 관절을 빌려 모두의 안녕을 빌고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정신 분열을 앓고 있는 오늘을 건너 무성한 빌딩들 사이를 쐐기처럼 기어다니면 무사함은 오간 데 없고 온몸이 후들거리는 저녁을 만나겠지. 강물에 쓰인 윤슬을 희망이라고 읽지만 반짝거리는 말들 속엔 왜 언제나 슬픔만 빛나는 것일까? 출렁거리는 절망을 품고 오늘은 건너려 하면 다시 또 하루가 백 년. 저녁 너머 나는 다시 볼 수 없는 계절을 바라며 언제나처럼 파랑을 기다리겠지.

 

 내일은 아무 일 없을까?

 깨어나 당신을 흘려보낼까?

 사이프러스 나무를 심고 별 하나를 기다릴까?

 

 곧 해가 지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금.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채종국 시인 / 필라멘트

 

 

 불빛이 가을을 건너는 중이다. 까마귀는 늙은 성당의 종소리를 쪼아대고 관악산 위로 숭어 같은 비행기 파란 물결 위를 펄떡거린다. 가을이 두려운 것은 내 심장이 고요에 닿는 까닭. 암막 커튼 사이로 출근처럼 기다리는 불안이 핸드폰 속으로 뛰어든다. 가을에 가을이 없다. 열병을 삼키는 것도 아닌데 온몸이 무감각해진다. 향기 하나로 계절을 들어 올리던 시절이 지나고 이제 맡을 수 있는 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람 따라 건너오는 여러 죽음의 냄새. 강변 윤슬의 눈빛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도 허리 굽혀 자본이 만든 코인을 굴종 속에 넣는다. 감나무, 가을 전구를 노랗게 밝히고 지나는 골목의 목소리마다 가을 주단을 밟는다. 숨은 생명에서 움튼 오솔길. 그 길을 따라 가을을 건넌다.

 

 가을에 가을이 없다.

 

-계간 『문파』 2024년 가을호 발표

 

 


 

 

채종국 시인 / 평생이라는 말

 

 

어릴 때 가장 긴 단어 같았던 말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던 말

비슷한 단어를 찾아보니

영원과 같은 말

 

어른이 된 지금은 가장 짧은 말

비슷한 단어를 찾아보니

찰나와 같은 말

 

영원과 찰나는 같은 말

순간을 영원으로 살 수도 있다는 말

 

나를 움직이는 평생이라는 말

 

순간 속에 영원이라는 말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말

 

순간 속에 영원이란 말을 심고 싶은 지금

한순간도 잠들고 싶지 않은

영원한 지금,

 

-계간 『사이펀』 2024년 가을호 발표

 

 


 

채종국 시인

1970년 광주 출생. 2019년《시와 경계》를 통해 등단. 2016년 신라문학대상 수상(시조).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전남지역작가 회원, 대중서사연대 회원,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