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은유 시인 / 목련 후기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8. 08:00
이은유 시인 / 목련 후기

이은유 시인 / 목련 후기

 

 

신발이 둥둥 떠다녔다

꿈에서는 신발을 감추었는데

누가 내다 버렸을까

자는 동안 발이 무거웠다

 

물 속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니

누가 이름을 불렀다

많은 신발을 잃어 버렸는데

주워 담은 것은 부서진 구름뿐

그때, 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신발을 버리지 않았는데

누가 내다 걸었을까

결코 신발을 벗지 않았는데

어디든지 가고 싶었는데

 

놓아버린 유리조각과 깨진 물거품처럼

꽃이 폈는데 당신이 없다

잘 가라, 내 사랑

한때 당신이 전부인 적도 있었다

 

-계간 《다시올문학》 2016년 여름

 

 


 

 

이은유 시인 / 꽃소식

 

 

모란꽃 필 때 놀러갈게

안부 물어볼 사이도 없이

모과가 모란으로 잘못 읽히고

꽃소식 듣기도 전에

자꾸 사람이 지고

꽃이 지네

짧은 날,

일찍 지는 꽃이 불안한 걸 보니

아무래도

사람이 그리워지는 모양이네

 

- 시집 <태양의 애인> / 시인동네·2015

 

 


 

 

이은유 시인 / 나에게 오는 계절

 

 

새순이 돋고 잎이 나고 무성해진 잎사귀들이 무수히 반짝거리는데

수만 가지 설렘이 저토록 나부끼는 것을

그걸 여태 몰랐습니다

잎사귀가 커질 때마다 두근거렸던 것을

가지를 다 덮은 잎사귀들이 풍성한 머리를 흔들 때마다 벅차오르던 것을

그걸 여태 몰랐습니다

바람에 몸 뒤척이는 잎사귀들은 수많은 종소리를 냅니다

종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뭇잎의 움직임을 보았습니다

나뭇잎이 내는 종소리들

비에 젖는 잎사귀들

빗방울이 아니고서는 잎사귀가 자라는 모습을

바람이 아니고서는 나무가 내는 그 소리를 보고 듣지 못했을 겁니다

빗방울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 잎사귀의 떨림이 느껴집니다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잎사귀들의 종소리가 들립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기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걸 여태 몰랐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오는 계절이었다는 것을

 

 


 

 

이은유 시인 / 생의 간극

 

 

그곳에서는 차마 먹지 못했다먹을 수 없었다

세 개의 모서리와 꼭짓점을 이루어 만든 삼각김밥

생의 지점에 들어와 죽음의 문을 나서는

이승의 운명을 넘나드는 것 같은 삼각김밥

삶과 죽음이 맞물리듯

죽음의 모양, 그대의 무덤이 되는 것일까

그대 떠나고 없는 날

조문객들이 밤을 지새는 동안 먹었던 컵라면을

그날에는 먹고싶지않았던 컵라면을

오늘은 왜 삼각깁밥과 먹고 싶은 것인지

어느 먼 여행지에서 돌아와

휴유증을 앓듯 생각나는 것들, 먹고 싶은 음식들

이상도 하지

부랴부라 먹고 있는데도 맛은 하나도 없는데

자꾸 그날이 떠오른다

자꾸 그곳이 생각난다

꾸역꾸역 넘어가는 것이 상처일까 그리움일까

돌아갈 수없는 그때를 오래 살고 싶은 것일까

굳이 돌아보지않아도 저절로 돋아나는 뜬금없는 미각처럼

지워지지않는

지나고나서야 삶을 가르치는 오랜 흔적

생의 사이사이 무슨 일들이 있었나

머물고 싶은, 또 한 생이 지나가고 있다

삶의 그림자인 죽음

지금 조금씩 삶이 완성되는 죽음을 씹어 삼키고 있다

삶의 이면인 죽음을 첨첨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은유 시인 / 신발 밑창에 나뭇잎을 묻혀왔다

 

 

나뭇잎을 묻힌 채

발은 무거운 것을 질질 끌고 지나쳤다

가벼운 것을 밟고 지나쳤다

맑은 물과 바람을지나치고

사찰을 지나치고

학교 담을지나치고

자택의 정원을 지나치고

척박한 날들이 불면으로 야위어가던

이따금씩

먹이를 탐색하러 오는 쥐와

서식했던 골방도 지나쳤다

무공해의 식물은 시들어가고

누군가는 병들어 골골했다

죽음을 묻혀오고

죄를 묻혀오고

썩어버린 식물의 주검은 육체보다 무겁고

숨 쉬지 않는 돌의 입김은

얼음창고의 수증기처럼 섬뜩했다

나뭇잎을 밟고 서 있는 무거운 생

내 생의 가벼운 담론은 나뭇잎을 밟고 지나쳤다

 

 


 

 

이은유 시인 / 지하철

 

 

서민의 교통수단인 지하철.

꿈을 이루러

생계를 위하여

목적지로 향한다.

 

평소에 소중함을 잊었다가도

파업으로

고장으로

늦어지면 종종걸음이 된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위로를 받고

답답함은 핸드폰으로 풀고

하루의 시작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고맙다! 지하철!

 

 


 

 

이은유 시인 / 햇빛의 말을 들었다

 

 

햇빛이 비치는 창가에 앉은 건 햇빛의 이끌림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햇빛에 초대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둠과 내통하다 잠시 햇빛을 염탐했을 뿐

아마 초대받았다고 해도 불청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햇빛은 어깨 위로 어지럽게 내리쬐었다

젖은 마음을 널어 말리던 살균 소독의 날들

아무것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던 때가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햇빛이 내시경처럼 뚫고 들어오는데도 피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햇빛이 무어라 소곤거리는 것이었다

그날 햇빛의 말을 들었다

각도를 달리하며 내리꽂히는 말들

햇빛의 수다에 귀가 따가웠다

햇빛이 얼굴 위로 쏟아질 때는 달콤한 졸음에 잠기기도 했다

햇빛이 왜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는지 알겠다

어느 날엔가 이곳에 앉아 햇빛 한 모금 받아먹고 출렁거린 사람 있었을 것이다

그가 흘린 눈물 한 방울 한 숨 한 가닥 햇빛 속에 묻어 있었다

서서히 실어증 걸린 시간들이 몸 푸는 소리를 냈다

오래도록 이 자리에 앉았다 간 이의 숨소리가 깊었다

햇빛이 그 말을 전해 주었다

 

-시집 『태양의 애인』에서

 

 


 

이은유 시인

1968년 경기도 안성 출생. 본명: 이은옥.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 『이른 아침 사과는 발작을 일으킨다』 『태양의 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