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사윤수 시인 / 구름대장경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8. 08:00
사윤수 시인 / 구름대장경

사윤수 시인 / 구름대장경

 

 

위에 위에 허공 위에

그 위에 더 위에 구름나라

여기엔 구름이 산다

가없는 말발자국구름

하늘 솥 가득 수제비구름

긴긴 띠구름

구름 마을 구름집들

굽이굽이 구름굽이

사래 긴 구름밭

울울창창 구름숲

일파만파 구름파도

천 권 만 권 구름책

구름 안도 구름

구름 바깥도 구름

구름 아닌 것을 찾으려 한다면

구름은 허락하겠지만

나는 구름문을 열고 어디로 나서겠는가

이륙하기 전에 흩날려 보낸 문장들이

저기 구름으로 변해 있다

구름 나라에선 구름을 믿어야 한다

호호망망 오천오백 마일 로마행

나는 말[言]의 나라에서 왔으나

구름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전부가 구름이며 하나의 구름인 구름대장경

한 필 오려서 장삼 만들어 입고픈

 

 


 

 

사윤수 시인 / 쌀

 

 

어둑새벽 찬물에 세수를 하면서

뜬금없이 쌀 생각이 났다

쌀알은 왜 작은가

농사 손이 여든 여덟 번 가야

쌀이 되는 건 그렇다 하지만

자두나 복숭아만 해서

몇 개만 먹어도 요기가 되는 열매가 아니고

수박이나 호박만 하면

한 덩이로 여럿이 쉽게 나눠먹을 텐데

어쩌다 흘릴 때는 줍기조차 힘든,

곡신은 왜 곡식을 작은 알갱이로 만들었을까

더운 밥 지어서 더도 덜도 말고

먹을 만큼 딱 가늠하기 좋게

먹다가 남겨서 버리는 일 없어라 고

자디잘게 쌀을 주셨나

찔레꽃 이리에 비가 오면

개 턱에도 밥알이 붙는다 하였으니

그 식구까지 잊지 말라는 쌀의 말씀이겠지

쌀 한 대접으로 죽을 끓이면 마음이 열 그릇

밥이 얼싸안은 게 주먹밥

그러고 보니 쌀은

한 톨도 샛별처럼 빛나지 않던가

 

 


 

 

사윤수 시인 / 물봉선

 

 

운문사 개울가에 물봉선이 곱다

홍초, 잔대, 여뀌, 미꾸리낚시

고마리, 흰고마리도 맑게 피었다

 

들꽃 이름을 알면

늙었다는 뜻이라고 누가 말 했지

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 들꽃 이름도 안다

미숫가루를 좋아하는 꽃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목욕바구니 안 들고 오는 꽃

마트에서 물건 담아주는 까만 비닐봉다리를 괜히 모으는 꽃

공중 화장실에서 오줌 누고 나와 보니 남자화장실이었던 꽃

천연염색 옷 가게를 기웃거리는 꽃

백발 남자를 아시동생처럼 사랑하는 꽃

구름이 열여덟 때 나를 낳았으므로

어쩌다 내가 먼저 늙어죽으면

구름은 누가 묻어주나 생각하는 꽃

 

물봉선도 그랬다고 한다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못 본 듯이 마주쳤다

 

큰 이모 같은 물봉선화요,

하안거 끝나거든

내 집에 한 번 다녀가소

 


 

 

사윤수 시인 / 착차스

 

 

줄줄이 꿰인 짐승의 회색 발톱들이

반질반질 매끄럽다

안데스 라마들은 죽을 때

제 발톱이 잘 뽑혀서 악기가 된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 눈을 감으며 안간힘으로

제 생의 기억을 밀어 넣어 준 발톱의 안쪽이 깊다

흔들면

오래전에 살점과 물렁뼈가 빠져나간 흔적이

착-착-착 흔들리는 소리

흙바람 속을 저물도록 걸었을

착-착-착 찰찰 기억의 껍질들이 부딪치는 소리

찰찰찰찰찰

소리가 소리를 자꾸 흔들게 만드는 소리

그것은 살아서 이룰 수 없는 구음이므로

돌아오지 못할 협곡을 맨발로 건너간

라마 떼가 물끄러미 이쪽을 돌아본다

파란 잉카의 하늘이 짐승의 속눈썹에 젖어 있다

차르르 차르르르

야윈 뒤편에서 와락 안고 싶은 소리

맑은 물살처럼 뒤집어쓰고 싶은 소리

죽어서 나도 악기가 되고 싶은 소리

 

* 착차스 : 안데스 지방의 민속 타악기.

 

 


 

 

사윤수 시인 / 벽에 박힌 못이 흘러내렸다

 

 

 거듭 내리치는 우레와 불꽃을 품고 돌이킬 수 없는 절벽 깊이 박혔다 단 한 걸음도 허락되지 않는 견고한 부동의 곡예 실핏줄 균열마저 움켜쥐어야 더욱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므로, 피가 거꾸로 솟는 자세를 묵묵하게 버텨내는 것에 너의 지극함이 있었다

 

 벽의 지층에서 못의 뿌리가 갈래갈래 자랐다 어둠을 먹고 못은 붉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싶었을 것이다 이마가 은색인 족속이 저무는 나의 기슭과 마주칠 때마다 유난히 빛난다면 그것을 저녁별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나 못도 오래 박혀 있으면 누군가 거는 외투만으로도 그 사람 생의 무게를 잴 수 있다.

 

 裵湖의 음성 같은 가을, 등에 못이 박힌 사람들이 서성인다 등이 벽인 줄 알고 잘못 일어난 일일까 귀뚜라미 노래로 만든 목걸이를 못에게 걸어주자 굵은 첫 빗방울처럼 박혀 있던 못이 툭 떨어진다 시간의 어금니 하나 빠지듯 허공 아래 풍덩! 그토록 드팀없던 한 세계가 해탈 臥佛이다 빈 동굴 한 채 유적지 되어 벽에 서리다

 


 

 

사윤수 시인 / 하늘 전화

 

 

내일 아침에 배를 타고 나가려는데

누가 내일 풍랑주의보 예보 내렸다고 한다

어젯밤에는 모처럼 선물 같은 별이 무성하고

지금은 바람도 없는데 주의보라니

 

나는 성산항에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에 주의보인가요? 하고 물었다

 

여직원이 네, 현재는 주의보 예보예요, 한다

 

우도 신입생인 나는, 예보가 내리면

배가 못 뜰 가능성이 많은지

한 번 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앳된 목소리의 여직원이

다시 차분하게 알려준다

 

"그건 하늘만 알아요."

 

비바람 부는 날

우도에서 배 타고 나가려면 가끔은

하늘에 전화를 걸어봐야 한다

 

 


 

 

사윤수 시인 / 그 겨울 저녁 무렵 허공에

까마귀 떼가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날아들어

 

 

 수평선에 눈썹을 걸고 있던 그 겨울 저녁 무렵, 까마귀 떼가 허공에 해일처럼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모였다가 나부룩 흩어지고 싸목싸목 모였다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새 떼, 흩어질 때는 누가 해바라기 씨 한 움큼씩을 휙휙 허공에 뿌리는 거 같고 모일 때는 커다란 마른 고사리 덩이 같았다. 그러나 그 덩이는 식물성이라기보다 유리질로 비쳤다. 응집할 때마다 와장창창 부딪쳤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으므로 주검들이 허공에서 후두두둑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일렬 편대로 비행할 때는 수 백 마리 날갯짓이 허공의 살과 뼈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럴 때면 까마귀 떼가 까무룩 보이지 않았다. 허공의 비늘만 일제히 일어섰다가 차례로 쓰러졌다.

 

 허공에도 숨을 곳이 있을까? 아니면 까마귀들은 구름 속에 들었거나 산을 넘었을까? 그 순간 외각을 찢으며 다시 나타난 새 떼, 이번엔 검은 물줄기를 뿜어 올리듯 높이 솟구치더니 초서 갈필의 붓끝으로 내리 꽂는다. 오! 저게 다 문장이라면 똑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어 검은 색만으로도 변려체를 구사할 수 있겠구나.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까마귀 떼 군무는 어두워 오는 허공을 맺고 풀며 지칠 줄을 모르는데, 팔순 노파는 저 보름까메기들이 날아 오민 보름이 불거나 비가 올 징조인디 저거영 마농이영 보리영 뜯어먹음쪄, 라며 어벙저벙 방으로 들어갔다.

 

 까마귀 떼가 허공을 가를 때는 허공이 비단이며 까마귀 떼가 가위이고 까마귀 떼가 종횡으로 나풋나풋할 때는 추월적막 흑공단 같으니, 이 비단타령은 어느 게 비단이고 어느 게 가위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날까지 어둑시근 다 저물어서 이제 검은 새 떼는 소지(燒紙)한 재를 흩뿌린 듯 가물가물했으므로, 시나브로 또 어느 게 까마귀고 어느 게 어둠인지 나는 망막했다.

 

 섬마을엔 별들이 톳여(礁)처럼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細髮浪綾 黑浪綾)-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발이 아주 가늘고 얇은 비단, 검은 비단을 말함. 추월적막 흑공단도 비단이며 판소리 <비단타령>에서 차용,

* 톳여(礁) - 바다 수면 위에 드러난 바위의 윗부분.

 


 

​사윤수(史倫受) 시인

1964년 경북 청도 출생. 영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파온> <그리고, 라는 저녁무렵>. 2009년 한국문화 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