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정원 시인 / 아름다운 슬픔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8. 08:00
박정원 시인 / 아름다운 슬픔

박정원 시인 / 아름다운 슬픔

 

 

별 하나 지다

멀고도 먼

 

그래서 더욱 처절히 빛나는 별

 

나비 한 마리 날다

 

나비는 죽은 나의 어머니

별똥별처럼 가슴팍을 후려치다가

내 머리에 앉는다

 

이파리 떨어지는 가을날이다가

잊지 않고 찾아오는 봄이었다가

 

영정사진 속에서 내게

단단한 운석 하나 품어라 한다

벼랑 끝에라도 절집 한 채 짓고 살라 한다

 

머지않아 나도 검은 공중에 내걸리겠지

별꽃으로도 찬란히 내려와 눈물을 불러내겠지

 

지워지지 않는 별똥별 하나

품에 지니고 산다

 

 


 

 

박정원 시인 / 사라진 힘

 

 

꺾은 장미를 화병에 꽂아놓은 이튿날 저녁

화병 속의 물이 모두 사라졌다

잘라내려는 가위의 힘보다 잘리지 않으려고 버티던 힘이

체념보다도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끈끈함이

여기저기 화병 속 밑바닥에 눌어붙어 있다

살려고 바동거린 마지막 혈흔이리라

꽃보다 가시 색깔이 더 짙은 것으로 보아

피맺힌 절규는 저리 시뻘겋다 못해 날카롭다

여기까지가 내 길의 끝인가 알기라도 한 듯

목 떨군 향마저 깊다

죽음도 힘이 필요한 걸까

그러쥐었던 꽃대궁 색깔 또한 검붉은데

속 전부를 드러낸 장미의 힘이 핏빛으로 얼룩졌다면

얼룩진 핏빛 메마르도록 내몬 힘 또한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는 일

죽지 않으려는 힘을 보듬고 있던 화병이

더 허허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마른 꽃처럼 부귀영화가 바삭거릴 때

폈던 주먹을 다시 쥐어본다

 

 


 

 

박정원 시인 / 열무밭에서

 

 

떡잎 갓 벗어난 아기열무들 사이로

서릿발 들어선다

퉁퉁 불은 엄마 젖을 맘껏 먹어야 할

그 어린것들에게 몸을 낮춘다

여린 이파리를 들추자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열무

 

누가 놓고 갔는지 천국영아원 골목엔

아기 혼자 포대기에 안긴 채 울고

열무씨앗처럼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

아이를 잘 키워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연락처도 없이 사라진 아기엄마는

철도 모르고 열무씨를 묻었던

내 속 같았을까

 

돌아가는 모퉁이엔 온통 대못만 박혔으리

다시 그 젖은 사랑을 그리워할 저녁

꽁보리밥에 여린 열무를 썩썩 비벼먹으며

고추장 같은 한숨을 떨어뜨릴까

 

너무 늦게 심은 열무밭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박정원 시인 / 열무밭에서

 

 

떡잎 갓 벗어난 아기열무들 사이로

서릿발 들어선다

퉁퉁 불은 엄마 젖을 맘껏 먹어야 할

그 어린것들에게 몸을 낮춘다

여린 이파리를 들추자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열무

 

누가 놓고 갔는지 천국영아원 골목엔

아기 혼자 포대기에 안긴 채 울고

열무씨앗처럼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

아이를 잘 키워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연락처도 없이 사라진 아기엄마는

철도 모르고 열무씨를 묻었던

내 속 같았을까

 

돌아가는 모퉁이엔 온통 대못만 박혔으리

다시 그 젖은 사랑을 그리워할 저녁

꽁보리밥에 여린 열무를 썩썩 비벼먹으며

고추장 같은 한숨을 떨어뜨릴까

 

너무 늦게 심은 열무밭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박정원 시인 /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내를 버린 남자가 커피 볶는 집에서 백석을 읽는다

 

소나무부부가 손을 꼬옥 잡고 드센 바람도 좋아라 유리창 밖에서 응앙응앙 울고

 

가는 눈이 간간이 뿌려지는 전봇대에 앉아 갓 볶은 커피 향을 기웃거리는 직박구리 한 마리

 

강 건너 저편엔 천국행 열차가 산 그림자를 끌어내려 굼벵이처럼 지나가고

 

서서히 지워지는 마을들

하나 둘씩 불이 켜지는 만주 벌판의 집들

 

여자는 말없이 백석과 동침하려 이불을 펴고

마침내 도착한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연신 스마트폰에 담아내는 남자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세상한테 지는 길이라네 내가 좋아서 버리는 거라네

 

눈도 푹푹 나리지 않는데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않는다

 

 


 

 

박정원 시인 / 징

 

 

누가 나를 제대로 한방

먹여줬으면 좋겠다

피가 철철 흐르도록

퍼런 멍이 평생 지워지지 않도록

찡하게 맞았으면 좋겠다

상처가 깊을수록

은은한 소리를 낸다는데

멍울 진 가슴 한복판에 명중해야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는데

오늘도 나는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 산 정수리로 망연히

붉은 징 하나를 넘기고야 만다

징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한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모가지로 매달린 채

녹슨 밥을 먹으면서

 

 


 

 

박정원 시인 / 빗방울로 사는 법

 

 

그녀를 안아 본 사람은 안다

그녀가 왜 둥근지를

 

지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나뭇가지를 감고 올라가는 사위질빵의 여린 새순처럼 동그랗게 몸을 마는 그녀

 

웅덩이에서 숨을 고른다

 

발버둥을 쳐봐도 그녀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허우적거릴 때마다 그녀의 동그라미는 더욱 견고해진다

 

나는 동그라미를 빠져나오기 위해

간사한 내 혓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동그라미를 애무한다

 

내가 즐기는 동그라미를 빠져나오기 위해

간사한 내 혓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동그라미를 애무한다

 

내가 즐기는 동그라미에 나를 즐기는 동그라미가 침대 위에 겹쳐진다

둥근 바퀴 하나가 산산조각 내놓고 가면 둥근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 낸 동그라미를

이내 동그랗게 동그라미를 쳐놓아 또 하나의 바퀴자국을 남긴다

 

그녀의 둥근 몸을 닮아가는 나는

그녀의 달콤한 젖무덤처럼 점점 더 동그랗게 말린다

 

그녀와 나는 왜 동등하지 않나

왜 수시로 동침하면서 함께 살지 못하나

 

둥근 그녀를 안으려면

둥그런 바퀴로 굴러야 한다

 

모서리에 찧은 멍이 오래 간다

각이 진 빗방울일수록 웅덩이 속을 뒤집어놓는다

 

바퀴에 눌린 피멍 하나가

웅덩이 속 하늘을 찢어놓고 간다

 

 


 

박정원 시인

1954년 충남 금산 출생. 1998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세상은 아름답다』 『그리워하는 사람은 외롭다』 『내 마음속에 한 사람이』 『뼈 없는 뼈』 『고드름』 등. 제10회 푸른시학상 수상. 2007. 제7회 시인정신작가상 문학상.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시문학회 회장 역임. <함시>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