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처 시인 / 박수치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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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처 시인 / 박수치다
그대는 햇빛과 몸 부비는 숲 속 물든 나무다 노래는 와삭와삭 잎사귀 뒤적거리는 바람을 길들인다
손바닥엔 마주치면 울리는 동굴이 있어 오랜 혈거에 핼쑥한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것이다 조상彫像처럼 말문을 닫았던 아, 어두운 몸이 방생하는 새떼 검은 잎사귀를 물고 화살처럼 날아오른다 부리를 부딪히며 뭐라뭐라 소란한 새들, 들리는가 겨드랑이를 비집고 빛으로 고물한 바람이 스며든다
조아리는 그대 머리 위로 군무群舞의 새떼들 내려앉는 소리
서영처 시인 / 문장(紋章)
몸 밖으로 가시를 발라낸 장미는 활어처럼 고운 살냄새를 풍긴다 얼룩이라곤 없는 뽀얀 꽃이 피어난다
식탁 가장자리 비싼 접시처럼 향기를 뿜어낸다
장미의 문장을 쓰는 가문이 있었다
장미의 생 이면에 창과 방패가 꿰어져 있듯 나의 생 이면에 승자와 패자의 기승전결이 녹슨 칼처럼 비스듬히 꽃혀 있는 것 같다
비는 종종 학생들이 시험지를 채우느라 다급하게 펜을 두드리는 리듬을 포획해 온다 허기진 닭들이 정신없이 모이를 쪼아먹는 소리와 흡사한
때로 경기병들의 말발굽 소리를 강탈해오기도 한다
비를 맞은 이파리는 찢긴 영수증 조각처럼 흩어진다 장미에 대한 어떤 예우도 없는 하루
비에서는 먼 항구의 비린내가 나기도 한다
계통수를 거슬러 올라가도 장미 속에는 어류가 없고 또 다른 장미가 있고 나아갈 수도 돌아올 수도 없는 미로를 만들고
장미는 요구한다 헌신과 서약을
양손 양발에 침을 꽂고 잠이 든 사람
신호등이 바뀐 듯 피어난다 -<계간 가히> 2024년 겨울호 발표
서영처 시인 / 언덕
전쟁이 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 것처럼 아이와 나는 급히 짐을 싸고 그 도시를 떠났다 말라버린 수로 위로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 검은 별들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밑도 끝도 없이 잤다 공항에서도 터미널에서도 근심의 먹구름이불에 짓눌려, 귀때기 새파란 놈이 다리를 떨며 창틈으로 휘파람을 불어대는 껄렁껄렁한 계절이었다 동파된 수도관에서 눈물 콧물 같은 것이 질질 흘러내렸다 하루 밤새 아이와 나는 하얗게 늙어 이가 뭉청뭉청 내려앉는 꿈을 꾸었다 새벽에 장작불이 꺼지듯 한 시절이 사라졌다 나는 쌀을 씻어 밥을 앉히고 마음을 앉히고 뜨물처럼 흐린 하늘 쌀낱같이 박혀 있는 별들을 본다 저 별빛은 아직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 오래된 과거 포화 속 천막을 치고 허무는 동안에도 밤이면 별이 총총한 언덕을 생각했다 우린 왜 거기 있지 않고 나는 여기 당신은 멀리 동굴처럼 울리던 컴컴한 트럭 안 쑥과 마늘을 앞에 두고 사람이 될 기회를 앞에 두고 당신은 내렸다 국경 근처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나는 기다린다 별모양의 총구멍 숭숭한 벽에 기대 이따금 머리칼을 들치면 흰 쥐처럼 소복이 들어앉아 소스라치게 하는 세월
서영처 시인 / 후미진 굴
여자의 키보다 깊었다 클레멘타인, 내 사랑 클레멘타인, 그는 취한 듯 휘청거린다 왕버들 뭉게구름처럼 잎사귀 피어올리는 굴형 들릴 듯 말 듯 옛노래 들려온다 가을이 온다 깜박거리는 별들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리고 그는 굴형으로 내려간다 사수자리 피해 물고기자리로 날아가는 백조 물에 젖는 달 달에 젖는 굴형 밤 기차가 비명을 지르며 마른 강을 달려간다 간질하듯 드러누워 흰 자갈을 토해내는 강, 부글거리던 저 강의 발작은 오래 전 가련한 여자를 삼켰던 가책 그렇지 그렇지 노래를 채운 구름이 환하게 떠가고 강건너 캄캄한 클레멘타인의 집 '빛과 향의 길'이었다고 풀벌레 소리 속에 깜박, 코를 곤다 그는 구름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 바지를 툭, 툭 털고 일어나 코를 푼다 나뭇가지에 상의를 찢긴 채 비틀비틀 자갈길로 걸어 나온다 클레멘타인, 우물이 깊은 클레멘타인, 낡은 곡조 속에 처박혀 또 하염없이 잊혀져간다
*후미진 굴형 : 미당의 시 「내 영원은」에서
서영처 시인 / 폭풍우의 밤
악몽처럼 비 붉게 뿌린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숲은 우리에 갇힌 맹수들처럼 으르렁거린다 내 속의 고요가 반란을 일으켜 나뭇잎 시퍼렇게 흩어진다 비 들이치는 방충망엔 물방울 별들 무더기로 돋아났다 사라지고 고대 어느 왕국, 변방의 언어로 몸이 아팠다 알아들을 수 없는 전생, 먹을 두드려 넣으면 낱낱이 상형문자로 찍혀져 나올까
내 산란함이 점점 커져 오히려 적막한 폭풍의 진원지, 오랜만에 나는 격정을 켠다 나무들은 노여워하는 바람에 맞서 허리를 세운다 창살을 뚫고 빗속을 달려오던 얼룩무늬 보았다 심장이 찰칵거리며 기억해놓은, 맹수의 모습은 왜 내 바이올린의 등에 얼룩덜룩 새겨져 있을까
서영처 시인 / 황도(道)로 운명을 점쳤다
바람은 긴팔원숭이 떼처럼 창틀에 매달려 휘파람 분다 들판엔 이어달리기 하는 전신주들 미닫이에 떨어지는 햇살의 분포를 문살은 막대그래프로 정확하게 그려낸다
나뭇가지들은 자라나 방문을 도배해버린다 아침상 받는 동안도 사그라지지 않던 추위의 정체가 저 뿔들이었다 뿔들은 미닫이를 틀어 안고 슬픈 노래를 뜯는다
눈이 세상을 덮어버린다 행불자의 주검처럼 풍경은 흰 천 아래 뉘여진다 사라진 길을 더듬으며 트럭은 달려가고 모든 소리는 봉인된다 누구도 봉인을 열 수 없다
나는 열에 들떠 그림자의 기울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만 킬로미터의 장정長程에도 태양의 고도를 재며 돌아오는 연어처럼, 어둠이 부풀린 배를 안고 나는 옛집을 찾았다 흑점 인장 찍힌 산봉우리엔 오래도록 얼룩이 남았다
서영처 시인 / 피리 부는 사람
1. 시간과 시간 사이 뚫려 있는 구멍에 관한 이야기다 새와 쥐의 말로 채운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이야기다
이곳은 황량한 바람이 불고 검은 비닐봉지가 날아다니기도 한다 혈거의 흔적이라 하지만 실은 오래된 기억의 숲에 파둔 참호 같은 것
거기에 네가 숨어 있다 미래로 가기 위해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참호에서 떨고 있다 참호 밖에는 피리가 버려져 있다
2. 네가 빠져나온 자리에 그림자들이 잠입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그들을 추적하고
일렬종대로 가지런히 구획된 방과 방 최초의 에너지 어둠이 스며든다 일터에서 돌아온 사람이 민달팽이처럼 민망한 차림으로 저녁을 때운다
골똘한 생각에 잠긴 골목으로 시간의 발치에 차인 돌멩이 굴러가는 소리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봉인된 냄새가 흘러나온다
일식과 월식처럼 빛과 사람이 서로를 감싸안고
3. 구멍이 고스란히 얼굴에 뚫렸구나
노래는 끝임없이 생성되는 미래 빌려 쓰는 날들의 후회와 진실이 담겨있어
마음에도 바람이 드나든다
뼛속까지 뚫린 음관(音管)을 지니고 다닌다
네가 망각으로 통하는 함정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지 -계간 『시와 시학』 2024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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