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소연 시인 / 초록의 폭력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8. 08:00
이소연 시인 / 초록의 폭력

이소연 시인 / 초록의 폭력

 

 

아무데서나 펼쳐지는 초록을 지날 때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떤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지

 

초록은 왜 허락없이 돋아나는가

 

귀가 없으므로

 

초록은 명령한다

초록은 힘이 세다

 

초록에 동의한 적 없습니다

초록을 거절합니다

초록이 싫습니다

합의 하의 초록이 아닙니다

 

"문란하구나"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초록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나를 떠메고 가는 바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오후

웃음을 열었다가 닫는다

 

툭 불거지는 질문처럼

아, 내가 지나치게 피를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이소연 시인 / 빨래집게

 

 

보통 젖어 있잖아요

우리가 만지던 생각들은

실패한 휴지로 쓰레기통이 넘칠 때

난 왜 그게 욕조 같죠?

내가 사는 동네는

걸핏하면 대야에 담가져 있고

그래도 숨이 멎지 않는 것들을 너무 많이 봐왔어요

누구도 쉽게 죽지 못합니다

젖은 빨래처럼 세상 밖으로 꺼내진 나도

그냥 덮어둘 수는 없어서 페이지를 넘기며 살아갑니다

가끔 귀여운 것들을 안으며 꾸역꾸역

작고 알록달록한 양말들을 집게로 집으며

버리고 갈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요

쓰레기통 앞에서 고꾸라지며 들어요

주워, 네 거잖아

그러면 한 번쯤은 뒤집어 말리고 싶은 것들이 생겨요

탁탁 턴 질투의 어깻죽지를 집어 넌다든가

지체되는 밤을 소매부터 뒤집어 본다든가

밤을 널었더니 새벽 첫차를 기다리고 있다든가

걱정 말아요

방학동에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마 지겹도록 살 거예요

 

-시집 『거의 모든 기쁨』 아시아, 2022.

 

 


 

 

이소연 시인 / 무덤 곁에서

 

 

삶의 마침표 하나 여기 찍혀있다

 

길 끝에서

길을 찾아

누워 쉬는 무덤속... 평안하신가

그래도 한때는

용광로처럼 달구어진 가슴으로

희망을 노래하던 언덕이 있었을 텐데

팍팍한 세상을 헤치고 걸었을 다리며

무너진 사랑에 가슴 태웠을 심장이며

삶의 무게에 짓눌렸을 어깨며

(이젠 다 내려놓아)

이생의 짐들... 가벼우신가

 

한끝 차이로

혼자만의 섬,

혼자만의 산,

혼자만의 바다 위에 햇무리 서는

 

어느날 문득 별자리로 돌아가 버린

비누방울처럼 가벼운

존재의 위대함이여

 

남은 자들은

서둘러 그대의 이름을 비석에 새기었고

세월은 또 그 이름들을 지우고

 

 


 

 

이소연 시인 / 콜리플라워

​콜리플라워가 암에 좋다니까 사 오긴 했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 꽃양배추보다는 사람들이 더 좋아"

댈러웨이 부인은 이 말을 다른 말과 헷갈리고

나는 이 말을 누가 했는지 헷갈린다

조난 당한 사람들이

들판에 쌓인 눈을 퍼먹는 장면을 봤다

콜리플라워 맛이 난다

진동벨이 울린다

암 걸린 애가 커피 가져와

암에 걸리면 맘에 걸리는 말이 많다

아픈 건 마음밖에 없네

눈 뭉치 속에 숨겨 놓은 돌멩이를

믿고 싶다

흰빛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가 한 말들이 맘에 걸려 있다

아파트 화단에 10 층에서 떨어진 이불이 걸려있다

엄마가 동영상을 보냈다.

나의 여인이 어쩌고저쩌고하는 트로트 음악이 깔리고

꽃을 찍은 사진 위에 수놓은 건강상식

첫 페이지는 오이와 양파를 꼭 먹으라는

이런 건 도대체 누가 만드는 거야

나뭇가지가 휘어지는 밤

흰 눈을 퍼먹는 기분으로

동영상을 끝까지 본다

-딩아들하 2023년 가을호

 

 


 

 

이소연 시인 / 페미니즘을 너무나 잘 이해해주는

남자라는 괴물

 

 

 빨래 잘하고 청소 잘하고 요리 잘하는 남자가 있다

 그런 남자와 연애를 하고 급기야 결혼까지도 했다면

 그 남자는 아이마저 자기가 낳았다고 우기면서

 거실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 속으로 블라우스를 다려줄 것이다

 

 나는 열 시까지 침대 위에 뒤집어져 있겠지

 잠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잘 알면서

 남편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것이고

 그다지 특별난 것도 없는 여자를 위해

 무섭게 아침을 차리고 아이와 함께 출근하는 남편에게서 발각되는 페미니즘이란 의례

 

 나는 가끔 시어머니의 방식으로 신을 부른다

 주여……

 

 떨어뜨리기 좋은 약속들을 하나둘 청소기로 빨아드리면서

 반성할 일은 하지 마라, 아들아

 요즘은 네가 흘린 부스러기가 너무 많구나

 제왕절개로 낳았지 미숙한 일이었지 주여……

 

 반성은 고질적이다

 변기 위에 앉아 힘겹게 빠져나가는 구불구불한 오전을 떠올리면

 코끼리가 된 것 같고

 

 동물원에만 이해받는 코끼리에 대해서

 손의 일을 앗아간 코에 대해서

 손으로 짚은 바닥에 대해서

 장식용 주머니처럼 달린 남자의 젖꼭지에 대하여 구실과 처세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와 함께 입덧을 하고

 나와 함께 배가 불러오던 남자가

 급기야 내 옆에서 라마즈 호흡을 할 때

 나는 내 모든 태반을 옮겨 심었지

 할례를 하고 침대에 누운 순결한 나의 남자

 오, 나는 남자를 너무 사랑해서 내 모든 기관을 주었네

 도축을 일삼은 숱한 낮과 밤의 이야기로

 오래된 예언서를 써 두었네

 

 주여……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이 거룩한 아이를 가지소서 내게서와 같이 당신에게서도 나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나의 산통과 나의 내막을 나의 수축과 이완을 모두 드리오며 마땅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지금껏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남자의 등에 빨대 꽂은 여자로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임산부석 앞에 서 있다

 

 저녁엔 흘리지 않고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타코라이스를 먹었다

 턱밑으로 잘게 썬 양상추가 떨어져 내렸다

 

- 시집 <거의 모든 기쁨>(아시아, 2022)

 

 


 

 

이소연 시인 / 한 사람의 목소리

 

 

에밀리 디킨슨이 사랑이 죽은 이도 다시 죽일 수 있다고 말할 때*

나는 믿지 않았다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울대뼈 하나만 골라 바오바브나무 아래 묻는다는 이야기를

믿고 싶다 그러므로

한 그루의 불신에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스며있다

 

작은 새가 와서

바오바브나무에게 목소리를 달라고

석달하고 열흘동안 빙빙 돌면

 

작은 새의 목에선 흙냄새 난다지

그 새, 너무 작아 겁이 없다지

 

한때 사람이었던 때를 기억하는지

옛집에 들러 씨앗 하나를 떨어트린다

 

바오바브나무가 자라고

눈코입 달린 새가 된 한 사람

눈에 잘 띄기 위해

목청이 큰 바람새가 되었다는데

 

왜 아무도 듣지 못하는지

오래도록 불타는 땅에서만 그 나무 자라는지

어쩌다 해는 새까만지

나무에서 나온 말이 우물인지

우기는 벽을 뚫고 오는지

색은 얼룩에서 잠드는지

 

깨어나보니 반사광에 눈이 시린 오후 다섯시 반이었다

내 얼굴인지 새의 얼굴인지

어떤 짐승의 입에 물려 있었다

 

*에밀리 디킨슨 <Love can do all but raise the dead>로 부터 온 김복희 시 <사랑하는 신>으로부터.

 

-계간 『애지』 2024년 겨울호 발표

 

 


 

이소연 시인

1983년 경북 포항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同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거의 모든 기쁨』 『콜리플라워』. 산문집 『그저 예뻐서 마음에 품는 단어』 『고라니라니』. 현재 '켬'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