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서 시인 / 불면증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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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서 시인 / 불면증 어두운 방에 하얀 양 떼들이 몰려와 놓쳐버린 잠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니고 있어 눈을 감으려 할수록 물 밖으로 뛰어나온 물고기처럼 더 팔딱팔딱 뛰어 카페인이 돋보기를 들이밀고 달콤한 잠을 태우고 있을 때 왜 몰랐을까 저 달도 카페인에 중독되었을지 몰라 밤을 세워야 하는 박쥐의 특명을 받은 것처럼 밤새 카페인을 창밖으로 퍼내고 있어
박민서 시인 / 그물의 세계
맨 처음 포획의 흔적을 무늬로 감고 있는 동물의 가죽에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동물들은 그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오랫동안 그 세계에 갇혀 버둥거리며 살아간다
맹금류들이 빈 그물의 그늘을 뒤적거리고 있다 몸에 갇혀있던 뼈가 하얗게 빛난다 누군가 몇 마리의 새를 그물로 쓰고 있는지, 새들이 날아간 뒤 총소리가 들린다 안전망이 없는 하늘 아래 그물이 되거나 그물에 걸려들거나 세상의 무늬로 보면 같은 몸이다
숲속 푸른 잎들이 어스름 저녁을 털어낼 때 빌딩은 사람의 그물이다 화려한 불빛은 새로운 그물망 사람들 갈라진 도로 위에서 사라졌다 모여드는 길들에도 바쁘다
마지막 포획의 그물에 갇혀 눈물 웃음의 무게로 무늬를 즐기는 사람들 내 옷의 줄무늬에는 슬픈 바코드가 새겨져 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가을호 발표
박민서 시인 / 상중喪中
문이 잠긴 식당 앞에서 물방울 맺힌 빈 식판 하나가 보인다 새벽 빗방울이 잠깐 스며들다 금방 마른 것 같다
오전 햇살이 현관 끝에서 알았다는 듯 되돌아간다
물수건 업자가, 가스차의 운전사가, 빈 냄비의 손잡이가, 벽에 걸린 빚쟁이의 빨간 도장이 추위를 껴입고 있다
길게 울리던 전화벨이 뚝 끊긴다
처음으로 빚쟁이가 말 한마디 않고 되돌아가고, 젖은 물수건들은 쥐어짜지 않아도 말라가고, 의자들은 휴가다
매일 문 앞을 서성거리던 고양이의 꼬리가 검은 리본 같다
몇 가닥 햇볕이 빈 그릇 앞에서 두 번 절을 하고 간다
박민서 시인 / 서랍 속에 번 아웃
내 서랍 속 멈춰 있는 손목시계들 옆에 매일 울음 울던 뭉개진 시간이 숨어 있다
짧거나 더 오래가는 거리의 방식과 안팎이 없는 불안의 방식이 들어 있다
손안에는 믿지 않는 손금만 가득해서 서랍 속 세상을 덮어버린다
지나온 날의 친절을 부수고 싶은 못과 망치가 필요한 서랍 빈틈에 메모지가 끼어 여닫는 일이 무겁다
수시로 뒤따라오는 그림자의 무게가 가득 들어 있는 공간에는 몇 번을 뒤돌아보게 만든 수화가 가득 차 있다
번 아웃이 찾아왔어요 그건 꼭 나쁜 건 아니란다 너와 닮은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열심히 달렸다는 징표거든 이제 몸과 마음을 쉬어주렴 눈사람이 다 녹도록 휴식이 필요하단다
서랍 속에 가득 찬 물건들이 틈만 나면 빠져나가려고 온몸으로 튕겨 오른다
-시집 「야간개장 동물원」에서
박민서 시인 / 아이스크림은 빛의 고리
진눈깨비는 빛을 부드럽게 부셔놓는다 그때 차가운 곳은 소통의 고리
당신의 목소리는 내일을 불러오고 입술이 마주치면 한여름이 숨어버려 얼음이 녹는다
최초의 설렘은 얼음이 어는 온도 매미의 수명이 길다면 어느 계절까지 구애할까
하필 목이 아플 때 소리는 헐거워지고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무대의 결말은 상관없다
심벌즈처럼 부딪히는 소리가 또 다른 고리다
얼음 위에 초콜릿이 쌓여 보이지 않는 질문들 왼손은 오른손에게 비밀이라 말하지만 콘컵 속 끝은 비워둔 창문이다
계절이 끝나는 순간부터 살아가는 속도가 다르다
부드러운 것은 햇빛에 잘 베인다 얼린 집이 사라져버린 저녁 오늘은 입안에서 실컷 녹아버리자 내일은 냉동고에서 견뎌야 할지 모른다
월요일이 슬픈 것은 이유가 없다 빛의 고리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말랑말랑해진 입술 같은 맛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박민서 시인 / 어느 오랜 기후
통조림 속을 흔들어보면 담장을 달리는 장미의 함성과 사과나무가 있는 정원과 그리다 만 집의 설계도가 섞여 있다
흔들면 흔들리는 것끼리 부딪쳐 모퉁이가 찌그러진 흔적 오래 두고 먹을 날이 있기는 할까
무균실이 쏟아질까 중력을 꽉 닫는다
어딘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상흔은 밖으로 나오고싶어 하는 공기다
뚜껑을 따면 찌그러진 맛이 날 거라 여기지만 그건 통조림의 안쪽이 물고 있는 연명이 아닐까
찌그러진 곳이 유일한 기둥인 듯 흔들림에도오랜 기후가 끌려 나온다
살균된 관습은 굴려가는 관습 빈 깡통은 더 요란한 관습으로 무한을 향해 간다
내려야 할 정거장이 사라지듯 유통기한 지워진 날들이 오랜 기후에 갇혀 있다
-『시산맥』2019-겨울호
박민서 시인 / 눈사람을 굴리고
엄마는 눈사람을 굴리다 나를 만들었다 가장 추운 나라를 택했고 어쩌다 보니 머리를 몸보다 크게 만들어 머리와 몸을 바꿔서 붙이고 엄마는 종이상자를 내 머리에 씌웠다 나의 균형은 그때부터 쉽게 날아가곤 했다
마당에 서 있는 눈사람을 엄마는 한 번도 품에 안아준 적 없다 아무래도 나에겐 숨 쉬는 그늘이 사라진 거
엄마는 나를 만지면 손이 시리다고 했다 엄마 입김은 엄마 손에만 닿았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새의 날개가 길게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는 내 옆구리에 나뭇가지를 박아놓고 사진을 찍었다
얼굴에 눈을 만들 때 엄마는 아빠에게 부탁했다 아빠는 내 눈을 실수로 흘긴 곳에 박았다 그 후로 나는 집 밖의 눈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은 아빠의 끗발을 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아빠의 팔 베개에 놓인 얼굴을 보는 날도 있다
엄마는 내가 녹아 없어지길 바라는지 한 번도 부르지 않던 햇빛을 부르고 있다 엄마의 꽃무늬 치마는 햇빛에 빛났고 나의 날씨는 너무 추워 엄마의 손을 잡고 싶었다 내가 굴러온 흔적을 보면서 서서히 야위어 갔다 눈 위에 내 발자국을 지워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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