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영숙 시인 / 흘러가는 시에게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9. 08:00
정영숙 시인 / 흘러가는 시에게

정영숙 시인 / 흘러가는 시에게

 

 

지금껏 쓴 시는 비듬이다

죽은 세포다

어디로 흘러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벼 한 포기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황톳물에 떠내려가고 없다

굶주린 이에게 밥 한술 떠먹여 주지 못하고

헐벗은 이에게 찬바람 막아줄 외투 한 벌 주지 못했던 시

 

처음 잡았던 붓은 어디로 갔나

가슴을 관통하던 활

하얀 눈 위 붉은 피를 흘리며 내달리던 사슴

새벽의 하얀 종잇장을 붙잡고 아침을 밀어내던 뿔 같은 펜대

몽당빗자루 되어 사라졌다

밥알 같이 써진 시들, 눈꽃처럼 허공에 사라지고 없다

 

남은 살과 피로

펄떡이는 심장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낚아채자

지는 꽃은 지는 대로 강물에 흘려보내자

죽은 사랑은 무덤 속에 묻자

 

한 알의 볍씨가 새 눈을 뜨고

황톳물에 젖은 내 발밑에 돋아난다면

붉은 심장을 훔쳐 간 내일의 새에게

흰 종잇장을 하늘에 펼쳐주리라

푸른 대궁에 소금꽃, 하얀 쌀알을 달고

그를 기다리리라

 

 


 

 

정영숙 시인 / 맥문동 꽃

 

 

우리 집 화단에

엄마가 심어 놓은

보라색 맥문동 꽃

일제히 피어 흔들리는데

먼 길 간 우리 엄마도

다시 피면 좋겠다.

매년 다시 피는

보라색 맥문동 꽃처럼

 

(2022년 월간문학 8월호)

 

 


 

 

정영숙 시인 / 고망(古莽)의 나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래한 50일 동안

나는 고망(古莽)의 나라에 들어 밤낮없이 잠만 잤다

해와 달이 없으니 여기가 저기고 저기가 여기였다

흰 구름에 실려 가는지 바람에 실려 가는지

애드벌룬처럼 하늘을 둥둥 떠다녔다

머릿속을 비워버리자 몸은 공기처럼 가벼워졌다

팔뚝은 시냇물을 안은 미루나무 방죽이 되고

머리칼은 종달새 날아오르는 푸른 보리밭이 되었다

누군가 부는 버들피리 소리가

가슴에 들어와 알록달록 꽃을 피웠다

이 나라에는 없는 생소한 말, 꿈밖에서 들리는 환청 소리

코로나라는 헛말은 무구한 꽃향기에 묻혀 달아났다

블랙홀 속으로 사라졌다

말간 우물 속 하늘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새 눈이 열렸다

해와 달을 가슴에 달고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초록 들판을 펼치던 50일간의 꿈같은 나라, 지금 여기​

 

 


 

 

정영숙 시인 / 불멸의 독서

 

 

귀밑 간질이던 산들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내 가슴에 묻혀 있던 말

수십 년이 지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온 최초의 문자들

오디세우스가 먼 길을 돌아와

페넬로페에게 사랑을 고백하듯

강물에 젖어 희미해진 문장들을

흰머리의 내게 읽어주고 있다

꿈같은 시간들을

다시 살고 있는

 

-시집 『나의 키스를 누가 훔쳐갔을까』에서

 

 


 

 

정영숙 시인 / 태양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너를 처음 만난 순간

너는 내 사전 속 프롤로그에 쓴 시

주황색 오렌지 노란색 아침바다 불타는 장미였다

지중해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오딜롱 르동의 〈이브〉처럼 카페에 앉아 있는 천진한 여인

탁자 위에 얹힌 오렌지주스 잔이 엎질러지는 순간

누가 천 일의 사랑을 예견할 수 있었을까

그녀 가슴을 찌르고도 남을 수천수만 불타는 가시를

수천 년 역사의 철제 궤짝 속에 녹슬어가거나

이제는 재가 되어버린 문장들

흐르는 물결 속 반짝이는 햇살 흰머리에 이고

푸른 심연 속 침묵으로 잠겨드는 늙은 여인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나던 태양은 사라지고 없어도

이제 그녀는 노트르담 성당 성화처럼 고요하다

사제의 옷자락 같은 지중해의 물결 위로

참회의 저녁 종소리 번진다

남은 백지에 마지막 물그림자를 그려 너에게 띄우는 정유년 새해

내 가슴속 낡은 사전은 너에 대한 상징이었을 뿐

이제 더 이상 펼치지 않을 것이다

 

-시집 『나의 키스를 누가 훔쳐갔을까』에서

 

 


 

 

정영숙 시인 / 회전문

 

 

바람과 유리창이 술래놀이를 하는 건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으나

우리가 같은 문에서 돌고 있다는 것

 

내가 그의 꿈을 꾸는 날은

내 바람이 그의 창을 흔들어

그에게서 전화가 오는 날

장독대 뒤에 숨은 그의 머리칼이

내 바람인 술래에게 꼼짝없이 잡힌다

 

사월은 술래 되기 좋은 날

벚꽃이 코티분처럼 바람에 날리면

기차역 앞,방앗간 집 그가 밀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우리 집 골목길을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 들리고

수양버들이 긴 머리칼처럼 연둣빛으로 늘어지면

그가 부는 피리 소리,우리 집 사립문을 넘어

앞마당 댓돌 위에 와서 멈춘다

 

내 속에 숨은 바람이 그의 창을 흔들어

잠든 그를 깨우는 사월

나는 계속 술래놀이에 빠진다

꿈에서라도 그를 놓지 않으려고

쉬지 않고 회전문을 돌고 있다

 

 


 

 

정영숙 시인 / 모란 한 송이에 담긴 기억

 

 

예술인 마을<서정주의 집>뜰에

모란 한 송이,늦은 봄볕으로 몸 말리고 있다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고양이 같이

고운 입술…스며라,배암!”*

젊은 날 그의 가슴에 파고들던 진분홍빛 순네 입술

허옇게 바래져 가고 있다

저 말라가는 모란 빛은

그 겨울 새벽 서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떠나가던 마지막 이승 빛이다

아직도 탐스러운 자태의 모란 꽃송이는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冬天」하늘에 심으려던 그의 마지막 바램이다

 

*서정주 시「화사(花蛇)」중에서

**서정주 시「동천(冬天)」중에서

 

 


 

정영숙(鄭英淑) 시인

경북 대구 출생. 가톨릭대 영문과 졸업,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지상의 한 잎 사랑』 『물 속의 사원』 『옹딘느의 집』 『하늘새』 『황금 서랍 읽는 법』 『볼레로, 장미빛 문장』 『나의 키스를 누가 훔쳐갔을까』 등. 2001년 문예진흥 기금 수혜. 2012년 목포문학상, 2015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여성문학회 회원,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