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후영 시인 / 잃어버린 하늘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9. 08:00
김후영 시인 / 잃어버린 하늘

김후영 시인 / 잃어버린 하늘

 

 

길을 잃은 새는 어제 떠났다

 

봄으로 위장한 바람이 쌀쌀하다

 

별과별이 빛을 나누고

서로의 언어로 새로운 별자리를 만드는 동안

옥빛 달무리 속으로 다정한 이름 하나 사라진다

 

수 세기를 거쳐 지우고 다시 쓴 굴곡진 모래위의 언어들

 

있는 듯 없는 듯 돌 틈에 핀 노란 꽃

 

지나간 것들이 한 편의 시를 만들 때

저릿한 심장 깊숙이 등 굽은 바람이 지나간다

 

웅크린 허리를 펼 수가 없다

 

가혹히 내쳐진 마음이 붉다

 

 


 

 

김후영 시인 / 닭과 꽃

그는 닭을 돌보고 나는 꽃을 돌본다

닭이 꽃밭을 헤집어 망가뜨릴 때마다 나는

부러진 꽃가지를 들어 호통치며 닭들을 쫓는다.

그렇게 마당을 몇 바퀴 돌고 나면

닭보다 먼저 내가 지쳐 꽃가지를 던지고 주저앉는다

그는 달걀을 거두고 나는 꽃씨를 거둔다

꽃씨가 발아되기 무섭게 꽃밭이 파헤쳐지지만

용케 살아남은 한두 포기가 꽃을 피운다

쇠락한 꽃들이 봄을 기약하며 잠자러 들어가면

꽃밭도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다

이때부터 꽃밭은 벌레를 찾아 여행하는 닭들의 성지가 된다

잠자던 꽃들이 뿌리 뽑혀 놀라 까무러치고

그 광경에 내가 더 까무러쳐 빗자루를 들어 또 닭들을 쫓는다

애초에 상생할 수 없는 존재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파헤쳐진 화단을 매만지며

닭만 보이는 사람과 꽃만 보이는 사람이 닭과 꽃을 위해 다툰다

 

 


 

 

김후영 시인 / 비극을 수선하다

 

 

임대아파트 상가 안

그녀의 수선 집은 일감으로 넘쳤다

몇 달 전 고쳐간 환경미화원 노씨의 점퍼 소매 단이 또 낡았다

미안해하는 웃음 안으로 빠진 어금니가 휑하다

 

그녀의 스무 살은 구토 나는 시절이었다

월급날 몇 푼 얻으러 나타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현기증을 느꼈던 날들

짐짝 같은 삶을 버리고 싶을 때마다 그녀를 잡은 건

바늘이 관통한 피 묻은 손톱이었다

 

그녀의 미싱은 의사였다

울화가 치밀 때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구멍 난 하루를 꿰맸다

어머니가 버려둔 저녁들을 꿰맸고

도박에 미친 남편을 꿰맸다

날개를 만들어 달고 싶은 유혹을

너덜거리는 외로움을 꿰맸다

아픈 조각들이 말끔히 수선 된 소매 끝에서 빛날 때까지 꿰맸다

 

서리 꽃 소복이 뒤집어 쓴 그녀의 머리카락위로

보름달은 지금도 얼기설기 누더기 얼굴로 떠오른다

 

 


 

 

김후영 시인 / 목욕하는 여자

 

 

중년 여자의 유연한 손놀림

때 타월이 날카로운 칼날로 변한다

쓱쓱 살가죽을 문지른다

허연 비계가 벗겨진다

앞 뒤 골고루 벗겨지는 껍데기

몸을 비틀 때마다 철퍼덕 떨어지는 고깃덩어리

천정위에서 지나간 시간들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매 맞고 쫓겨나 담 밑에서 흐느끼던 여자

여자를 감싸고 울고 있는 아이들

도려내고 싶은 기억하나가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 여자의 어깨위에 톡 떨어진다

몸서리치는 살덩이

지탱할 수 없는 무게 위에서

삼겹살 두 근을 잘라낸다

배에서 앞다리에서 갈비뼈에서 기억들이 떨어져나간다

웃어야 얼굴값이 높다던데

웃을 일 없는 여자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뜨거운 탕 속에서

출렁이며 흘러내리는 기억과 함께

여자, 온 살들을 비틀어 짠다

멍들어 잘려나간 시간들, 잘 숙성되었다

 

 


 

 

김후영 시인 / 시간, 소모성

 

 

낡아버린 계절의 허리 안으로 찬바람이 불어오던 날

쓰고 남은 시간들을 꺼내들고 수를 세던 여인이

일회용 비닐봉지 같은 하루를 톡톡 뽑아 병원 밖으로 던지고 있다

달리는 차들 사이로 날아올라 부풀려진 삶의 욕망

 

바쁜 외아들은 오늘도 병원에 오지 않았다

 

텅 빈 하늘로 이따금 지나가는 비행기를 숫자놀음에 포함시키고

창밖으로 날아드는 비둘기를 헤아리면서

점점 사그라져 가라앉는 공기 빠진 시간을 끌어안는 여인

 

기저귀를 갈던 간병인의 잔소리가 심하다

 

마음과 육체의 괴리 앞에서 뿌옇게 습기가 차오를 때마다

혼자 걸어 이곳을 나가겠다는 다짐을 헛말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그녀

 

그녀의 삶에 다시 한 번 사과 향이 배기를 기대하며 찾아간 병실에서

문득 마주친 흐린 눈동자

초저녁 창 너머 별 빛은 퀭하고

과일 몇 알 들고 간 손은 자꾸만 가려워 오고

 

 


 

 

김후영 시인 / 비극을 수선하다

 

 

임대아파트 상가 안

그녀의 수선 집은 일감으로 넘쳤다

몇 달 전 고쳐간 환경미화원 노씨의 점퍼 소매 단이 또 낡았다

미안해하는 웃음 안으로 빠진 어금니가 휑하다

 

그녀의 스무 살은 구토 나는 시절이었다

월급날 몇 푼 얻으러 나타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현기증을 느꼈던 날들

짐짝 같은 삶을 버리고 싶을 때마다 그녀를 잡은 건

바늘이 관통한 피 묻은 손톱이었다

 

그녀의 미싱은 의사였다

울화가 치밀 때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구멍 난 하루를 꿰맸다

어머니가 버려둔 저녁들을 꿰맸고

도박에 미친 남편을 꿰맸다

날개를 만들어 달고 싶은 유혹을

너덜거리는 외로움을 꿰맸다

아픈 조각들이 말끔히 수선 된 소매 끝에서 빛날 때까지 꿰맸다

 

서리 꽃 소복이 뒤집어 쓴 그녀의 머리카락위로

보름달은 지금도 얼기설기 누더기 얼굴로 떠오른다

 

 


 

 

김후영 시인 / 봄은 손수레를 타고

 

 

벚꽃이 환한 날

손수레에 벽돌을 실어 나르는데

바람결에 하얗게 흩날리는 꽃잎들

 

숨 쉬는 걸 잊은 듯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얼굴을 스치며 떨어지는 꽃잎들

 

문득

목장갑에 작업화를 신고 서 있는 모습을 자각하는데

쉼 없이 달려오느라 고단했던 일상을

슬그머니 만져주는 꽃잎들

 

머리카락 세어가듯

수레 안 벽돌 위로 쌓여가는 꽃잎들

 

 


 

김후영 시인

이화여대 국문과 박사과정. 2006년 계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공저 <21세기 문화현실과 젊은 소설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