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문성해 시인 / 배경이 되는 일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19. 08:00
문성해 시인 / 배경이 되는 일

문성해 시인 / 배경이 되는 일

 

 

사진을 찍는 남녀의 뒤로 가다가

찰칵, 내 뒷모습이 찍혔네

 

순간 알았네

저이들 뒤에 선 홰나무나

능소화처럼

나도

배경이 되었음을

 

배경은

나를 최대한 평평히 말아넣는 일

나를 희미하게 탐색하는 일

저이들이 인화된 사진을 보며

나를 알아채지 못하게

 

나는 바위처럼 납작하게

나는 나무처럼 건들거리며

나는 구름처럼 둥싯거리며

나는 가장 나중에야 들통 나는 사람

 

그러나

언젠가 너로부터

배경이 되었던 날처럼

너무 갑작스럽지는 않게

너무 쓸쓸하지는 않게

 

저이들이 나와 홰나무와 능소화를 훌훌 접어서

손바닥만한 디카 주머니에 넣고

깨꽃처럼 웃으며 사라진다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에서

 

 


 

 

문성해 시인 / 기적

 

 

4월은 끝이 없어요

연둣빛 하늘 아래 당신의 이마는 시리도록 희구요

슬픔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에요

 

당신은 아름다움을 길게 늘여

오래 가지는 특기를 가졌고

나는 그것을 잠깐씩 탄신의 곁눈질로 훔쳐보는 취미를 가졌어요

 

언덕은 두루뭉술한 허리를 뾰족한 새싹들로 치장하는 재주를 가졌구요

대기는 지구라는 늘어진 풍선 속으로

연둣빛 날숨을 지치게 불어넣어 줘요

 

4월은 이렇다 할 취미나 특기 없는 자들에게도

눈곱만큼의 흥미를 가지게 해요

하루종일 놓여 있던 댓돌 위의 신발에겐 마당을

누워 있는 사람에겐 식은 죽을 내밀어 줘요

 

저수지 속의 물을 하루 종일 반짝거리게 하구요

냇가의 모난 돌멩이들을 둥글게 만들어요

새의 부리 속엔 곡물을 쪼는 딱딱함을,

민들레를 피운 돌절구를 근사한 화병으로 만들어요

 

구름에겐 마냥 부푸는 속치마의 주름을,

버려진 나뭇가지에겐 나아갈 방위를,

탈영병에게는 복귀할 초록숲 부대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긴 줄인

저 낡은 트렁크들에겐 받아들일 국가를 주세요 부디,

 

창가에 놓인 물컵처럼

하루종일 섭섭한 나에겐

-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이런 말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해요

이 불가항력의 4월엔

 

 


 

 

문성해 시인 / 흙 필요한 분

 

 

"흙 필요한 분"

마사토 흙집을 지나다 보았네

 

내게도 흙이 필요해

열 손가락 사이로 따듯하게 흘러내릴 흙들이

 

가슴이었고 뼈였고 단단한 허벅지였던

뿌리였고 허물이고 돌멩이 같은 맹세였던

 

내게도 접붙일 흙이 필요해

연골연화증의 무릎을 감쌀

캐시밀론의 무릎 덮개 같은 흙들이

 

올망졸망 붉은 화분들이 필요해

얽히고 섞인 뿌리들의 집이

 

떠올려본다

화분 하나 없었던 집

흙 하나 없었던 베란다와

광합성을 모르는 노오란 낯빛

 

아버지,

 

화분을 안고 나오는 젊은 부부

저들의 뿌리가 든든하게

엉켜가는 뒷모습을 돌아본다

 

흙이 흙을 받쳐 들고 간다

 

-<시산맥> 2023년 여름호

 

 


 

 

문성해 시인 / 풀

― 수원이에게

 

 

작고 여린 입술이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벌써 다섯살이라고 제 아픈 것을 다스리려 한다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약도 마다 않고 잘 받아먹는다

 

다섯살이면

바람에 풀이 흔들리듯

제 몸의 흔들림을 아는 나이

제 몸을 누가 대신해

흔들릴 수 없음을 아는 나이

 

물로 닦아주고 해열제를 먹이고 보릿물을 마시게 하고 나니

이제 좀 자야겠단다

열에 달뜬 동굴 속을 홀로 걸어가겠단다

 

이젠 내가 네게 몸을 주었다고 말할 수 없다

자운영 잎이 제 빛깔을 찾아 연녹빛 색깔을 띠어간다

 

 


 

 

문성해 시인 / 결이라는 말

 

 

결이라는 말은

살짝 묻어 있다는 말

덧칠되어 있다는 말

 

살결 밤결 물결은

살이 밤이 물이

살짝 곁을 내주었단 말

와서 앉았다 가도 된단 말

 

그리하여 나는

살에도 밤에도 물에도 스밀 수 있단 말

쭈뼛거리는 내게 방석을 내주는 말

 

결을 가진 말들은

고여 있기보단

어딘가로 흐르는 중이고

 

씨앗을 심어도 될 만큼

그 말 속에

진종일

물기를 머금는 말

 

바람결 잠결 꿈결이

모두모두 그러한 말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 2012

 

 


 

 

문성해 시인 / 혼자만의 버스

시외버스를 탔네

차창에 레이스 달린 분홍 커튼이 쳐져있었네

 

구중궁궐 같은 버스였네

승객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네

 

어여 기사님아,

썬글라스와

뽕짝 노래로

나를 어디로 모셔가나

 

앞머리를 커튼처럼 자른 나도

오늘은 이 버스의 기분을 알 것 같아

 

마음속에 들어 앉아

저를 멋대로 몰아가는

저 기사님이 이끄는 대로

잉잉거리고 끽끽거리고 짓까부는

이 버스처럼

 

나도 마음속에

수벌처럼 붕붕거리는 기사님 하나 들어앉아

나를 출렁출렁 저 태양까지 몰고 갔으면

 

앞머리가

찰랑찰랑

커튼처럼 흔들리는

이 아침에

 

 


 

 

문성해 시인 / 한뎃잠

 

 

장례식에서 돌아와

아침에야 밤잠을 잔다

돌아온 잠이 있고

돌아오지 못한 잠도 있다

어젯밤 병풍 앞에 둘러 앉아

누군가의 한뎃잠을 지킨 사람들

그가 낯설게 뒤척이는 잠 속에 앉아

늦은 육개장을 집밥처럼 말아 먹어주고

(밤잠이 이리 환해도 될까!)

그가 켜둔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꽂혀 있었다

 

장례식이란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한뎃잠을 지척에서 지키는 일

돌아 올수 없는 잠에 대해 함구하는 일

생전 그와 같이 한번도 누워본 적 없는 이들이

길고 지루하고 온전하게

(오, 하루치의 잠을 보시한 채)

한 개의 한뎃잠을 조문한 뒤

이 아침 방으로 돌아와

끊어진 밤잠을 다시 잇고 있다

 


 

 

문성해 시인 / 시를 쓴다

 

 

돌잔치에 다녀와서

어떤 날은

문상을 하고 와서

시를 쓴다

 

코 푼 손으로

다시 시를 쓴다

 

가래를 뱉고 와서

다시 시를 쓴다

 

이별을 하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다시 시를 쓴다

 

달보다 늦게까지

어떤 날은 해보다 일찍부터

시를 쓴다

 

다친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와서

전투적으로 시를 쓴다

 

일주일 만에

두 달 만에

삼 년 만에

시를 쓴다

 

꽉 다문 입술로

몇 시간째 앉아 있는 나를 위해

힘든 배설을 하듯

단발마로 떨어지는

 

쓰레기장보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힘줄보다

질기디 질긴

 

시를 쓴다

 

 


 

문성해 시인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매일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자라』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입술을 건너간 이름』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내가 모르는 한 사람』. <대구시협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산맥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