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병진 시인 / 웃음의 측면과 이면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0. 08:00
이병진 시인 / 아찔아찔한

이병진 시인 / 아찔아찔한

 

 

등산로에서 맞닥뜨린 계단이 아찔하다

저 아찔한 계단이 없으면 얼마나 아찔할까

 

계단을 밟으며 무수한 아침이 일어섰고

또 저녁은 내려왔을 것이다

산사 어귀에서 나를 툭 치고 간 바람과 새소리도

계단의 척추를 낭창낭창 딛고 왔으리라

 

가난한 아버지가 뚜벅뚜벅

쇳덩이 같은 허공을 짊어지고 하늘로 가신 날도

오늘 문득 그리움이 화르르 내려온 것도

계단의 배려가 있어 수월했으리라

 

세상의 높이는 계단 한 칸 한 칸을 쌓은 거라서

무게 중심을 낮추고

차곡차곡 순리를 밟아야 비로소 길은 열리고

결국, 산다는 것은 무릎을 부지런히 접는 거라고

 

생을 주름 낸 저 아찔한 참선

 

산은 엎드려 합장하고

계단은 등골이 아찔해도 허리를 펴지 않는다

 

구도求道의 마디마디가 아찔하다

 

 


 

 

이병진 시인 / 웃음의 측면과 이면

 늦은 밤, 이대팔 남자가 정면에서 웃고 있다. 고개 쳐든 명함 사진이 너무 반듯해 잘생긴 너도 실실 웃는다. 방안은 실없는 웃음들로 가득찬다

 

 이력서 빈칸에 쓴웃음 넣었다가 빼낸다. 「없음」이라고 두 글자 배시시 써넣으면 허탈할까. 인물값도 못 한다고 웃음이 툭 터져 나올까

 

 자소서에 걸터앉은 헛웃음이 너덜너덜하다

 

 돌부리에 나동그라진 배달 자전거

 입꼬리를 흘리며 굴러간 빈 그릇

 그때 깨진 웃음도 붙이면「첨부」가 될까

 

 고쳐 쓰고

 쓰고

 속까지 게워 덧붙이면

 속을 몰라, 겉만 보고 속은 그네들은 너털웃음 터뜨릴까. 소리가 꽉 차도록 파안하고 대소할까

 

 웃음이 빠져나간 빈칸마다 저벅저벅, 채워지는 새벽

 잉크를 뭉갠 자리엔 측면이 벗겨진 웃음

 웃음의 무게가 쏟아져 곤두박질한 사진

 

 사진으로는 끝내 웃음의 이면을 보지 못한다

​​

-계간 『시산맥』 2025년 여름호 발표

 

 


 

 

이병진 시인 / 샐러리맨의 변辯

 

 

 내 옷장엔 흰 와이셔츠가 가득하다

 다림질된 종족들과 희멀겋게 대면하는 것으로 무늬 없는 나의 일상은 시작된다

 흰색에 길들어진 단조로운 습관은 상습투약의 부작용 같은 것

 하루 업무도 숙고 없이 적당히 건조된 흰색 정도로만 처리한다

 누구는 흔들리는 버스에서, 책상머리 샐러리맨의 숙명이라고 메모했다

 옷장엔 옷걸이라는 눈치 없는 놈이 오래 각을 잡고 있다

 가끔은 힘없는 척하고 셔츠를 툭 놔버리면, 구겨진 옷을 핑계로 회사 땡땡이 칠 텐데

 철사같이 질긴 시간을 외팔로 본업에 열중이다

 

 내 옷장은 불가사의하다 믿거나 말거나

 누가 착란을 사주하는지 새벽 옷장은 안개로 가득 찬다

 안개는 옷장을 뛰쳐나와 목을 조르고 눈꺼풀을 겁박하고 급기야 내 작은 눈을 가려버린다

 누구는 약봉지에, 번아웃 증후군 혹은 헛것이 보이는 섬망* 증상이라고 메모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환장할 폭력인가

 그럼에도, 매일 불확신의 단추를 끼우고 더듬더듬 안개 본진으로 출근한다

 집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저항인가 비겁인가

 내 삶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한때, 셔츠를 찢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적 있다

 미래를 눈 가리고 걷는다는 건 너무도 가혹한 맹목盲目

 안개 뱃속이라도 갈라 길을 내겠다고 미친 무사처럼 칼을 휘두른 적 있다

 가당치도 않은 객기, 숟가락 네 개를 볼모로 잡혔으니

 안개와의 싸움은 애초부터 기울어진 승부였다

 소매를 바짝 걷어붙여도 세상의 속내는 볼 수 없었고 대신, 몽유병 환자처럼 걸어가는 낯익은 이웃들을 보았다

 그건 거대한 절망, 완벽한 공포

 누구의 말처럼, 엄청 센 놈과 맞닥뜨리니까 본능적으로 온순해지더라

 내가 꼬랑지 내린 수캐처럼 넥타이 줄에 끌려다닌 이유다

 

 셔츠의 반란, 점점 더 배를 죄어오고

 내가 슬림핏을 거부하고 일반핏을 고집하고 있을 때, 누군가 흰 셔츠의 남루와 고 지식함에 대해 숙덕거렸다

 아, 표백제로도 지우지 못할 허무

 나는 지금 작심하고 셔츠를 솎아낸다

 옷걸이 어깨에서 깁고 꿰맨 세월의 통증이 드러난다

 나프탈렌이 안개처럼 퇴각하고, 스멀스멀 빠져나간 자리에 허물 몇 개가 이력처럼 흔들거린다

 물먹는 하마가 잠방잠방 무거운 몸을 뒤척거린다

 만감萬感이 옷장에 고꾸라지면서 뱉은 말,

 천지 분간을 못 하던 때가 그리울지도 몰라

 

*착각과 망상 등을 하는 의식장애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이병진 시인 / 물고기의 신분

물고기도 반상班常이 있어

숭어 농어 민어는 귀한 몸이라 어魚가 붙고

갈치 멸치 곰치는 제사상에도 못 오른다는데

그딴 신분을 가르는 게 비늘의 유무라고 하더라

세상사 예외는 있어

용왕의 역린을 건드리면 비늘 있어도 상것이 되고

먹물 먹은 오징어는 비늘 없어도 양반이 되더라

넙치가 광어로 개명한 이유는 신분 세탁일지도

제사상 앞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양반님보다

꽁치 참치 같은 상것들에게 끌리더라

한 성깔하는 가물치나 황새치

수면을 박차고 나르는 날치가 눈을 확 끌더라

내 몸을 샅샅이 뒤져봐도 비늘 흔적은 없고

뾰족하고 도발적인 물고기가 감칠맛 나니

앙칼진 사랑이 좋은 걸 보니

내 전생은 ‘어’가 아니라 ‘치’였을 것 같다

-계간 『다층』 2024년 봄호 발표

 

 


 

 

이병진 시인 / 어떤 흙이 되려나

 

흙이라고 다 같은 흙이 아닐진대

흙의 성질이 도자기의 질감을 바꿀진대

딱딱해서도 물러도 안 되고

입자가 거칠거나 색이 도드라져도 안 되고

1300℃의 불을 무던하게 견뎌야 하고

가마의 시커먼 손장난에도 진득해야 한다

혹여 귓불에 뜨거운 바람이 들어오더라도

몸을 비틀거나 마음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

그래야 매끈한 세상을 만나고

나무처럼 버티는 힘이 생기고

한낱 질그릇과는 결이 달라질 터

저 흙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것

풍파에 뒤틀려 불순한 나는

어느 화장터에서 몸을 뜨겁게 굽더라도

반듯한 자기磁器 하나 못 얻을 나는

죽어 어느 골짜기에서 어떤 흙이 되려나

-계간 『애지』 2024년 여름호 발표

 

 


 

 

이병진 시인 / 바람

 

바람 소리를 기억하십니까

과자봉지가 경망스럽게 기웃거리는 소리 따위 말고

웅- 참새가 전깃줄에서 발을 헛디딘 비명입니다

바람 소리는 혈관으로 들어야 제대로입니다

입간판이 불콰한 가게에선 삼겹살 기름 소리를 내고요

인부들 혈관에선 황사 부스러기가 우수수- 합니다

바람이 수직으로 낙하한 공사판은 고혈압 투성이고요

살갗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달려오는 바람도 있습니다

바람이 오는 방향은 옆구리마다 다르지만

새바람의 목소리는 탄탄한 권력자입니다

핏줄이 허약한 골목은 헛기침에도 깜짝 놀라 붕괴됩니다

나뭇가지나 풀잎이 부산한 것은

딸랑거리거나 혹은 납작 엎드리기 때문이죠

나무는 대동맥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박수를 치고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혈관이 뻣뻣해 호송된 소나무를 봤잖아요

따귀 한 대 맞고 정신을 번쩍 들어 올린 전신주도 있죠

바람 앞에서 대나무는 빈혈을 앓는 노련한 승부사고요

갈대는 유연제를 복용해서 근육이 부드러운 겁니다

갈피를 못 잡는 바람은 찻잔 속의 태풍이고요

지나가는 바람은 찻잔 테이블에 앉지도 못합니다

사그라지는 바람의 혈당은 참 가소롭죠

하찮은 낙엽 몇 장이 하찮았던 날을 바스락거리니까요

바람이 하혈하면 소문은 고개를 바짝 치켜듭니다

칼바람 앞에서 당당하게 맞섰다고

수런수런 갈대밭이 한동안 무용담을 퍼 나릅니다

바람보다 무서운 건 바람 앞에서 살아남은 혈전입니다

요란한 회오리는 저들이 일으키는 겁니다

​​

* 김수영 <풀>에서 따옴​​

-계간 『다층』 2024년 봄호 발표

 


 

 

이병진 시인 / 애매와 모호

 

 

언어는 참 애매하고도 모호합니다

나뭇잎을 푸르다고 말하는 건 애매하고요

연두와 초록, 청록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선은 무수한 점으로 이루어진 가상이지요

점과 점 사이에는 또 다른 점이 위치하지요

고로 점은 곧 선이라서 애매하고, 경계가 모호하죠

말하자면 점과 선은 애매모호합니다

 

이렇게 프리즘으로 보면 언어의 색은 예민하게 굴절하죠

경계를 찾던 말은 문을 닫아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까탈스런 애매와 모호 사이에서도 불편하지 않은 것은

색을 구분하는 결핍이 있음에도 그러려니 퉁 치고 사는 것은

당신과 내가 점으로 부대끼면서도 선을 이루는 것은

이해라는 개념으로 담합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광교산은 애매와 모호가 동거 중입니다

점들이 우거져서 곡선입니다

나무와 숲은 서로의 경계를 덮어버렸습니다

 

뭉뚱그려 그냥 푸른 오월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이병진 시인 / 일방통행

 

 

서로 마주 본다는 것은 애당초 편도 일차선의 환상이다

시선은 차선을 넘지 못하고 경적을 울리며 날아간 눈빛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기적이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그 꽁무니에 전조등을 켜고,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서

어쩌면 내 등 또한 누군가의 눈빛으로 얼룩지듯이

마침내 가까이 갈 수 없는 그리움은 일방통행이다

급발진할 수 없는 그리움은 지독한 환상통이다

어떤 가속페달로도 설득할 수 없는 아픔, 결코 U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쫓아가는

그리움은 정지선 없는 막무가내

의외로 환상과 현실은 외사랑의 장력보다 간격이 좁아

그가 돌아서는 순간, 내가 그리움의 트렁크를 여는 순간, 아니면

그 누군가 내 등을 잡고 세우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이 되고

우리 사랑은 거기서 불타버릴 것이다

 

-월간 『모던포엠』 2025년 1월호 발표

 

 


 

 

이병진 시인 / 분명한 것에 대한 견해

 

 

귀가 부드러워진다는 이순耳順에 접어들었는데

아직도 귀가 따가우니

달팽이관이 녹슬었거나

나이를 겉으로 먹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낮고 부드러운 소리는 걸러지고 고음만 들어와

슬그머니 함께 들어온 꼰대가

달팽이 몸에서 부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정도 살았으면 말귀를 알아들을 만도 한데

아내의 잔소리가 두근두근하니

지독한 사랑꾼이거나

어설픈 난청인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귀를 뗄 수도 귀를 막고 살 수도 없으니

못 들은 척 능청스럽게 보청하거나

조금 더 까칠하게 살아야 함이 분명하다

 

-계간 『리토피아』 2024년 겨울호 발표

 

 


 

이병진 시인

경북 포항 출생. 경북대 철학과, 고려대 문학석사. 2022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는 폭이 없는 길을 간다」.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모던포엠 작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