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현 시인 / 물의 문장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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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현 시인 / 물의 문장
한낮의 태양이 부끄러운 허공을 비우고 저녁 어스름이 가면처럼 깔리는 어디쯤일 거야
벌써 몇 바퀴째 돌고 있는 검푸른 호수 위로 네온사인 불빛들이 말풍선으로 눕기 시작하고 있어
어둠이 사라진 하늘에서 갈 곳을 잃은 별들이 내려와 앉은 것이라고 애써 타협하는 나를 발견하곤 해
갑남을녀의 논에 흘러들던 도란도란을 잃어버리고 어둠의 뿌리로 내려앉기 시작한 저 깊은 물의 침묵
물은 궁창이 둘로 나뉘는 순간부터 늘 아래로 흐르고 깊이로만 가늠되었지
열 길의 깊이를 끌어안고 한 길의 속성을 끌어내는 어두컴컴한 메타포
저 호수 끝 빗장 열어젖힌 수문을 지나 서늘한 몸을 던져 나락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비릿한 살점들도 통증을 느낄까
살눈을 이고 버석거리는 갈대 울타리 사이로 뜨거운 눈물들이 모여들어 수런대기 시작하고 있어 울음을 품어주는 괄호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만 싶어
물은, 물은 밤에도 잠들지 않고 접속문으로 흐르고 있는 중이야 -계간 『문학청춘』 2022년 가을호 (53호) 발표
오지현 시인 / 아날로그 찾기
우리의 서사는 향수 핥기를 좋아한다
무대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배역이 주어지면 구제 옷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선 말바우 장거리에 간다 서로 껴안은 채 무화를 견디고 있는 층층의 허물들
너는 철없어 가벼운 건달 반들거리는 양가죽 재킷과 바람 붕붕거리는 나팔바지 콧날 번쩍이는 에나멜 구두, 빨간 스카프는 덤 너의 분장은 침 한 번 뱉는 것으로 가볍게 끝난다
나는 니 에미다 힘없어 무엇이나 버거운 어미 늙은 어머니는 시장 귀퉁이 노점에서 푸성귀를 판다
고무줄 늘어져 헐거운 빤스 쪼그려 앉은 굽은 생을 보여줄 무릎 튀어나온 몸뻬 빛바랜 털실 스웨터를 찾지만 옷 가게에 舊製는 많아도 나를 구제하지 못한다
힘센 놈 앞에서는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어미 앞에서 힘자랑하는 건달풍 아들을 끝내 무릎 꿇리는 혼신의 눈물 연기 좌판에 놓인 시금치 뿌리는 조명을 받아 붉어지고 때 이른 봄동 겉잎은 호객 소리에 시들어간다
객석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훌쩍거리는 소리들 오늘도 불효자들의 눈물샘은 뚫렸다 떠다니는 별들의 고향은 마음속에서 자란다
내 분장의 산실은 팔순 노모의 장롱 속 한 칸 서랍 그곳에는 어머니의 옛날이 아직 숨 쉬고 있다 건달의 어미로 내 어머니의 한 때를 입어보는 지금 스포트라이트는 여전히 나를 비추고 마지막 대사가 방백으로 흐르고 있는 중이다 -계간 『문학들』 2024 봄호 (75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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