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숙 시인 / 바다의 뱃가죽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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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숙 시인 / 바다의 뱃가죽
퇴근길에 사 온 꽁치를 손질하려고 꼭꼭 묶었던 검정 비닐봉지를 풀어본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 물씬 흘러나온다. 소금에 절인 몸으로 얼마나 몸부림 쳤던지 비닐봉지 속, 꽁치의 핏물로 흥건하다. 핏물로 범벅이 된 꽁치를 흐르는 물에 씻는다. 물길을 쫓아 이동하던 지느러미와 꼬리 물에 닿자 잃어버린 수평선 위를 유영한다. 잡히는 순간, 돌아가는 길을 포기하지 못했다. 바다를 향해 가듯 꼬리가 흔들린다. 바다를 받치고 다녔던 반듯한 뼈대와 등지느러미, 꼬리가 가위에 싹둑 잘려나간다. 잘려나간 통증이 붉은 꽃잎으로 피어난다. 깊은 바다 산호 숲속을 누비고 다녔던 꽁치의 기억이 내 콧등을 타고 파도치기를 한다.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듯 아가미를 벌리고 있다. 이젠 나를 바치는 일이 포기보다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임을 알았다. 물컹한 바다의 뱃가죽을 가른다. 찬란했던 바다의 지퍼가 열린다. 핏빛 가득한 바다가 꽃물처럼 번져간다.
한숙 시인 / 단단하게 두껍다
단단한 것들, 돌로 껍질을 톡톡 깨다보면 두꺼운 편견 속에 감추어진 비닐막 같이 여리고 부드러운 속살을 발견할 수 있다. 호두의 단단한 껍질을 깨면 그녀의 부드러운 속살같이 뽀얗고 매끈한 알맹이가 나온다. 허투루 속살을 보이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한 대 두드려 맞고 정신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속을 열어 보이는 단단한 자존심 그 자존심 뭉그러져 바스러지고 나면 오만과 편견의 경계는 그녀의 껍질이 된다. 단단하고 두꺼운 것일수록 부드럽게 살살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방법에 익숙지 못해 버려야 할 것이 많았고 알갱이를 찾지 못해 당황해하는 순간도 있었다. 단단하게 나를 키우는 일에만 몰두하다, 정작 안으로 키워야 할 것들은 놓치고 말았다. 내 안의 알갱이들이 모래알을 씹은 것처럼 서걱거리자 밤의 질감 사이로 보름달이 순하게 여물어가고 있다. 나는 아직 단단하고 두껍기만 하다
한숙 시인 / 굽은 등
비릿한 포구 입구에 앉아 각굴을 캐고 있는 아낙의 굽은 등으로 눈길이 쫓아간다. 여유를 부리는 말랑말랑한 생각들이 넌출거리는 파도와 잠시 한 통속이 된다. 마음 드러낸 갯벌에 엎드려 움질대는 찰나 굴 바구니를 채우는 아낙의 허리가 암추에 붙은 따개비처럼 단단해져간다. 비밀이란 오래 가지 않는 철칙을 가졌듯이 함묵한 굴의 입이 조새의 날 끝에 벌어진다. 매달린 하얀 살점들이 굴 바구니에 채워지고 채취한 하루치 품삯이 굽은 허리를 일으켜 세운다. 곧추세운 허리의 통증이 저녁이면 짭조름한 생굴 맛으로 식탁에 오를 외통수의 길이다. 뉘엿뉘엿 그녀의 꼬리뼈에 매달렸던 주름진 포구의 썰물이 지느러미 흔들며 다가온다. 밀물처럼 밀려들고 썰물처럼 비워지며 포구를 돌아 나온 말랑한 생각들이 곡예사처럼
굽어진 허리를 펴고 돌아와 식탁에 앉는다
한숙 시인 / 마지막 오선지 여자의 항암치료가 있는 날, 허기진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감나무 잎을 붙잡고 허공을 가득 채운다. 가만히 들어보니 맴맴맴, 맵다고 우는 소리다. 여름 한철 짧게 살다가는 터무니없는 운명이 서러워 더욱 치열하게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따라 매미의 생처럼 매콤해진 여자도 눈물이 난다. 물방울 원피스에 꽃무늬 모자를 눌러 쓰고 전신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어다본다. 마음 텃밭에 심어 놓았던 여자의 꿈, 희미한 거울 속에서 선명하게 자라고 있다. 어차피 삶이란 목숨을 담보로 잡아 놓은 자유, 이 초라한 몰골, 허물 벗는 매미의 껍질이라면 그건 새롭게 거듭나는 거룩한 고통 아니던가. 여자의 몸에 음표를 그려 넣은 세포들의 반란 덤으로 한 박자 쉬어가는 마음의 귀를 얻은 여자 쉼표 없는 악보, 음악을 망치고 마음까지 무력하게 한다. 그렇다면 쉼표 없이 가는 인생도 건조하고 삭막하겠다. 한 여름밤의 긴 꿈을 꾸는 여자, 씨앗 불려 싹 틔운 음표 하나 오선지 위에 그려 넣는다.
-계간 『열린시학』 2014년 가을호 통권 72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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