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길순 시인 / 한밤의 트램펄린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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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길순 시인 / 한밤의 트램펄린
튀어 오르는 자의 기쁨을 알 것 같다
뛰어내리는 자의 고뇌를 알 것도 같다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 트램펄린을 뛰는 사람들
종아리를 걷은 맨발들이 보이고 총총 사라진 뒤
달빛이 해파리처럼 공중을 떠돈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 트램펄린이 놓여 있고
속이 환히 비치는 슈퍼문이 떠 있다
남길순 시인 / 살아남은 여자
노인의 말 속에 좁은 길이 보인다 어둠을 걷고 있는데 가느다란 빛이 보인다 백일을 굶었다는데도 흰 쌀이 보인다 뚜벅뚜벅 걸어 나간 가족사진 속 이만하면 됐다. 말하는 저 노인이 앉아 있다 소금쟁이 같은 손바닥에 꾹 눌러 쥔 것이 있다 이 마을 마지막 남은 노구(老구)가 자꾸 아름다워져서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다 저녁 무렵엔 목소리만 남게 된다 그러는 사이 별이 뜨고 하늘 구멍에서 연발 총소리가 반짝거린다 죽은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허물 벗은 매미 같은 노인이 조근조근
밤을 새워도 모자라다
-창비 2022 겨울호중에서
남길순 시인 / 보아뱀과 오후
보아뱀이 바나나나무를 감고 올라간다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엄마와 나는 발가벗고 기다랗게 누워 있다 발을 맞대고 한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누워 내가 한뼘 길어지면 엄마는 한뼘 줄어들고 있다 새들이 목청껏 지저귀는데 바나나나무 아래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차례를 기다리는 보아뱀이 졸고 있다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보아뱀이 거품 속으로 사라지면 올려다보던 또 한마리가 바나나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보아뱀은 자꾸 생겨나고 폭포는 계속 떨어지고 엄마는 자꾸 줄어들고 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나란히 누워
보아뱀과 오후와 티브이만으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세계를 궁리한다
남길순 시인 / 운주사
이곳에선 세상을 떠도는 이를 중생이라 부른다더군
곳곳마다 죽은 동생이 서 있었어
담도 없고 싸움도 없고 높은 곳도 없이 누구나 서 있으면 부처가 될 것 같은 절 마당
누가 내 곁에 와서 사진을 찍고 있네
그도 나도 작은 돌부처도 웃네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에서
남길순 시인 / 검은 짐승의 눈빛과 마주칠 때
병명도 모르는 병을 오래 앓았다
아버지 등에 잠든 사슴처럼 늘어져 보리가 익은 샛길을 지나다녔다
디룽거리는 발이 이삭에 쓸려 아프다고 신음하면 달은 어깨 너머로 다가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갔다
병원 냄새가 난다고 했다 달은 살아 있는 영혼을 조금씩 들이마시며 빛을 얻는 거라고
누가 몸에 들어왔어요 아버지는 헛소리하는 아이를 놓칠까봐 두려움에 떨고
달은 이를 부딪다 달아났다
언덕 너머 손톱만한 낮달의 눈이 매섭다
골목에는 검푸른 초록이 죽은 고양이처럼 누워 있고 아이를 염탐하는 푸른 달빛
저 아래 눈을 감은 것들은 왜 무엇에 취한 모습으로 잠드는지
잠은 쏟아지고 누군가 아픈 몸을 후루룩 삼킬 것 같은 두려움
얼마나 많은 몸들이 내 몸을 다녀갔는지 어디를 쏘다니다 돌아온 것처럼 땀에 젖어 깨어나면
숨결에 달맞이꽃 냄새가 난다
달 언덕은 환하고 그 꽃 냄새에 취해
혼곤한 잠 속으로 잠 속으로 잠 속으로
어느새 나는 아이를 낳고 누워 있다
노란 아기 냄새 온 천지가 그 꽃으로 덮여 있는데
품 안에 들어온 달이 네 발을 버둥거리며 운다
남길순 시인 / 월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요 우리는 아래서 위로 솟구치고요
소용돌이는 깊이를 만들고 원심력이 커지면 종잡을 수가 없어서
오늘 날씨를 닮은 감청색 물가에 사람들이 웅성거립니다
물새 한 마리 꽁지를 촐랑이며 건너편으로 날아갑니다
폭포 소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어요
오방색 깃발이 꽂혀 있던 자갈밭
촛농이 떨어진 어린 날의 물가로부터 나는 귀를 막고 달아나는 중입니다
안쪽 의자에 앉은 너는 무슨 일이냐고 창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묻고 버스는 공항을 지나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데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디로 막 달려가고 있습니다
포플러가 줄지어 오고 끝나지 않는 여름이 있는
월풀이 우는 소리를 들어 보셨나요?
-계간 『애지』 2024년 겨울호 발표
남길순 시인 / 전복
낮춰야 할 만큼 낮아져야 한다
이미 닳을 만큼 발바닥이 닳아야 한다
감각은 무뎌지고 몸의 문양을 따라 배를 미는 단 한 번 전복을 꿈꾸는
돋보기 너머 느린 몸을 밀어내고 있는 너를 생각한다
전복인 줄도 모르고 움츠러들다가 깜짝 놀랄 것이다 웃지도 못하고 뒤집혀질 것이다
얘야, 도마 위에선 항문과 입이 같은 말*이란다 먼저 털이 수북한 복족을 깨끗이 씻어라 평생 등에 지고 다니던 집을 숟가락으로 떼어내거라
그러고 나면 영혼 같은 오색 무지개가 껍질 속에서 울겠구나 누구나 창자를 보면 슬퍼지는 법
이제 살아온 생을 어슷어슷 썰어 접시에 가지런히 펼치면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누군가의 잇몸,
세상의 모든 길은 스스로를 뒤집는 데 평생이 걸린단다
* 전복은 원시 복족과에 속한 연체동물로 항문과 입의 통로가 길다.
—《시사사》2013년 7-8월호
남길순 시인 / 장호항 갈매기
모자가 날아갔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마, 소리치며 날아갔다 코끼리를 품고 머나먼 나라를 꿈꾸던 모자가 알고 보니 절벽 끝에 알을 품고 있다 다리 위에 서서 눈이 부신 날개들을 바라본다 허전해 뒷머리를 만지는데 카약을 탄 일가족이 고개를 들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거기 있구나 아름다운 항구는 변함없이 아기였던 네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이 온다 장호항의 푸른 미역 냄새가 이곳까지 날아오고 흰 모자 속에는 물이 마르고 있는 아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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