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주택 시인 / 기억에 바치는 조사(弔辭)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1. 08:00
박주택 시인 / 기억에 바치는 조사(弔辭)

박주택 시인 / 기억에 바치는 조사(弔辭)

 

 

산책이랍시고 길을 걷고 있는데

나뭇잎이 툭, 떨어졌다

비가 조금씩 내렸던가, 잎들이 물에 젖어 있었다

여름의 저것들도 낙엽이라고 불러야 하나?

무어라고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이 꿈에 나타난다

꿈에 나타나 약속 없음을 두려워한 뒤

半旗를 내리고 있는 공터에게로 간다

아직도 자신을 먼지로 가두고

手中의 손금들은 운명처럼 얽혀 있는데

이름도 없이 곁을 스쳐가 초라한 소문으로

흩어져 있는 수많은 기억들이여

발아래로는 빗방울이 차이고

아름다움의 먹이가 되었던 쓰라림이

서로의 소리 안에 울음을 감추는 저녁

자신을 들여다보던 문 하나 늘어뜨린

어깨를 세워 흐르는 불빛을 여닫는다

 

 


 

 

박주택 시인 / 주거지

 

 

 거기 누군가의 밤이 되자 여름이 시작되었다 약수동에서도 밤이 온다 가장 늦게 제과점은 문을 닫고 생선 가게 청년은 기면증을 앓는지 생선과 더불어 곪아간다 전생애의 계단을 바치는 2층 당구장 그것보다 많은 휠체어들 평온도 없이 가게들은 문을 여닫고 아무렇게나 핀 풀들은 시멘트 사이를 메우고 있다 이것을 지나치고 좁은 길을 넓히며 가는 차들 한쪽으로 비켜서며 무르익는 공포들

 

 끝끝내 우리가 살았듯이 우리가 없어도 우리가 쓰지 않아도 골목 골목은 빛나고 구역구역 죽은 자들만이 시들는 시장 입구로 몰리며 여기서 고기를 사고 떡을 사고 혼례처럼 사랑을 옮겨 퍼뜨렸다고 술에 젖어 발자국마다 노래를 흩부렸다고 이렇게 내가 살던 곳이라고 펴지지 않는 손가락 마디를 편다

 

 844번지 우뚝 솟은 아파트 그 많은 집을 헐고 쿠테타의 함성처럼 이토록 밝게 거대한 그 아래 납작 엎드린 가게들은 이마 위에 전구를 달아 놓았다 노인 복지 회관을 실어나르는 버스 한 대 정거해 있는 좁은 틈을 빠져나온 한 아이 처량한 마음을 몸채로 들여놓았는지 새로 쓰는 노트와 같이 동네를 환하게 만들며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박주택 시인 /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여행자처럼 돌아 온다

저 여린 가슴

세상의 고단함과 외로움의 휘황한

고적을 깨달은 뒤

시간의 기둥 뒤를 돌아 조용히 돌아 온다

어떤 결심으로 꼼지락거리는 그를 바라다 본다

숫기적은 청년처럼 후박나무 아래에서

돌멩이를 차다가

비가 내리는 공원에서

물방울이 간지럽히는 흙을

바라다 보고 있다

물에 젖은 돌에서는 모래가 부풀어 빛나고

저 혼자 걸어갈 수 없는

의자들만 비에 젖는다

기억의 끝을 이파리가 흔들어 놓은 듯

가방을 오른손으로 바꾸어 들고

느릿한 걸음으로 돌아 온다

저 오랜 투병의 가슴

집으로 돌아 온다

지친 넋을 떼어 바다에 보탠 뒤

곤한 안경을 깨워

멀고 먼 길을 다시 돌아 온다

 

 


 

 

박주택 시인 / 지상의 노래

 

 

 이 거리만큼 오세요 나도 없이 너도 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처음인 그대로

 여름도 가을도 비도 눈도 그 가벼운 것도 없이

 이곳에 오세요 아무것도 이곳엔 없지요

 어둠도 빛도 없고 그 흔한 갈증도 없습니다

 죽음도 하늘도 신도 내일도 없는 여기는

 그 뼈저린 밤도 말도 없습니다

 

 여기는 아무것도 내리지 않습니다, 달빛도 붉은 담장의 수도원도 외지에서 온 벽화도 채색이 덜 된 결심과 은밀함도 오로지 제 가운데에 들고 이내 잠들어 버린 얼음들은 스스로 녹아 있습니다

 본 사람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사람은 어느 때에 가 있을 것입니다

 이곳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두 개의 거룩하고

 단단한

 총

 서로의 감정을 향해 겨누는

 전부가 있을 뿐입니다

 

계간 『시현실』 2019년 여름호 발표

 

 


 

 

박주택 시인 / 출판기념회

 

 

70여 편이 넘는 시 가운데

「예감」「6층 피부과」「호적」세 편은

시인의 생애를 그린 것이어서 비교적 이해가 용이했다

시는 어려워서, 는 지금까지 들었던 가장 많은

말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눈엣 것을 옮긴다는 것은

이사와 같은 것이다 치킨 집에

음악이 퍼지고 적나라한 닭들이 바싹

튀겨진 채 냅킨과 함께 전체가 되도록 노력할 때

시집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돌리는 것이 아닐까?

일생이 존재한다는 자조적인 사실, 재현된 불만들, 지루한 양식과

고투가 지불한 하염없는 기름기 같은 것

첫 연애편지는 언제 썼지? 지리를 익히려고

왁자지껄한 소리는 건배를 만나고

숙소를 나서는 여행자처럼 비는 가을을 주선한다

댄서들처럼 창은 물방울을 출간한다

그 중 몇은 뼈째로 보도 위에 누워있다

 

 


 

 

박주택 시인 / 운명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3

 

 

너의 눈에는 황량한 모래의 풍경이 깊이 잠겨 있다.

너의 입에는 전염병에 누워 있는

물고기를 달래는 말투가 들어 있다.

너의 손에는, 너의 손에는

깨진 창문이 달려 있다

꽃나무를, 허파의 정원에 심어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는가, 부서진 의자의 수기를 읽으며 꽃나무의

잎사귀를 뻗게 할 수 있는가,

해는 닳고, 부서지고, 미끄러져 흘러내린다

모래가 있는 길 위에, 너는,

비스듬히 갈라진 나무의

틈새를 보고 있다,

깨진 창문 사이에 끼어 너는, 서 있다

 

 


 

 

박주택 시인 / 히로시마를 기억함

 

 

1

히로시마에 서서 보았다

시가지가 불타고 검은 구름이 솟아올랐다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들 터져 나가는 유리창들

비척거리는 개 곁에 아우성이 들렸다

나는 폭탄이 터지는 히로시마에 있었다

비행기가 떠 올 때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 장소에 구속되는 또 하나의 감옥인 길

내가 전적으로 내가 되는 일은 지금도 살고 있는

이곳에서 기억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산다

이제 나는 공공의 장소가 되었다

 

2

잎사귀가 바람에 자동차 유리창으로 달려든다

겨울이 오기 전 남은 가을이 가고

오늘 지나온 거리를 읽는 벽은 하얗다

외래어 표기 용례집과도 같이

집은 한 바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돈다

나는 지구에 있다

나는 위치를 자꾸 바꾸었지만

나 스스로가 장소였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했을 때

여기가 내가 되는 것처럼

히로시마는 불타고

전쟁을 모르는 소년이었던 나는

기억이 된 채로

누구나 부르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나는 히로시마에 산다

 

2022년 문예지<시와 시학>겨울호에서

 

 


 

 

박주택 시인 / 장수하늘소를 찾아서

 

 

노인은 의자에 앉아 붐비는 전철을 기다린다

지팡이를 세우고 낭패한 세월의 익사한 꿈들을

발로 비벼본다, 그는 그래서 외롭다

모자를 집어들고 전철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그의 오랜 적막을 섞는다, 유령처럼 흐물거리는

그의 몸 속으로 삶의 잔뿌리가 뻗쳐온다

그는 비누 냄새가 나는 여자의 엉덩이에

몸을 붙인다, 발밑에 바위가 깨져 쌓이고

살을 뜯는 냄새를 풍길 때

독말즙 퍼지듯 무엇인가 그의 배꼽으로부터

짜르르 올라가며 그를, 생애의 중심에 세운다

그가, 시간의 즙을 짜 만든 붐벼오는 꿈에 눈을 감는다

 

 


 

박주택 시인

1959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꿈의 이동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시간의 동공』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등. 시론집 『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과 평론집 『반성과 성찰』 『붉은 시간의 영혼』 『현대시의 사유구조』 등. 현대시 작품상, 이형기 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