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시인 / 시 안 쓰는 시인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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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시인 / 시 안 쓰는 시인들
무의도 섬마을에서 문학교실을 하는데, 갯벌에서 박하지 잡다 오고 산밭에서 도라지 캐다 오고 당산에서 벌초하다 오고 연필 대신 약통 메고 긴 지팡이 짚고 왔습니다
저 고개 너머, 자월도 살던 대님이라고 있어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 모냥 갸름한 게 여자는 여자여
내가 죽으면 어느 누가 우나
산신령 까마구 드시게 울지요
일본 말루다 그렇게 슬픈 노랠 했어
첩으로 살다 아이 하나 낳구는 덕적도로 시집가 죽었어
공중에 펼쳐진 넓디넓은 종이에 한 자 한 자 새겨지는 까막눈이 시 속으로 대님이가 까악 까악 날아왔습니다 이 땅에 시 안 쓰는 시인 참 많습니다 명녀 아지 은심이 숙희 승분이 경애 춘자 상월이 이쁜이, 시보다 더 시 같은 생애 지천입니다
김해자 시인 / 꽃기린*
내 생의 절반은 가시면류관 가시 자리에서 살지고 빛나는 잎 솟았고 가시 자리에서 붉고 빛나는 꽃 돋아났다 내게 낮은 너무 눈부셨으니 가시로라도 빛 되돌려주어야 했으니 내게 밤은 너무 추웠으니 가시 활처럼 구부려서라도 견뎌야 했으니 내 영혼의 태반은 헛꽃 꽃 속에 작은 꽃 숨겼느니 꽃 밖에 큰 꽃 흘렸느니 내 사랑 혹 보이지 않을까 붉은 입술 한껏 벌리어 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보드라운 길을 내었으니 모래알만한 꽃이여, 생략이 생존이었으니 작아지는 길이 내겐 진보였으니 스스로 그림자 되어 그늘 드리우니
*가시면류관이라고 불리는 선인장
-시집 <집에 가자>에서
김해자 시인 / 아마추어
20년 가까이 시를 쓰고도 누가 시인이라 소개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숨어 있는 시의 가느다란 팔목이라도 잡아보려 내뻗는 실핏줄 돈은 손들 앞에서 고개가 숙여진다 부끄러운 듯 쓰다듬는 아마추어의 눈빛이 난 좋다 처음 살아보는 이생 앞에 우린 모두 아마추어다 삶의 연습은 아니지만 사는 동안 마주치는 것들 동사로 싣고 가는 자는 이미 아마추어가 아니다 맞춰보다 맞추다 처음인 듯 입 맞추는 황금 문장 서툰 대로 온전하다 죽음조차 난생처음인 우린 모두 아마추어다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표가 찍힌다
-시집 <집에 가자>에서
김해자 시인 / 인연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과 주황빛이 만나 제법 그럴싸한 타올로 팔려온 이 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을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온 이래 목욕한 내 딸의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 번 젖고 젖은 만큼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럽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도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 쓰다 놓아버릴 내 몸뚱이
-<당대비평> 2002년 여름호
김해자 시인 / 내일의 날씨
오늘의 날씨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대부분지역에 한파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기온이 낮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 매우 춥겠는데요, 오후부터 동쪽은 중국을 중심으로 폭우가 내리고 곳에 따라 사과만 한 우박이 쏟아지겠습니다. 해일이 덮쳐 물바다가 된 도시로 배와 고래가 헤엄쳐 다닐 것으로 예상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서쪽은 태풍과 토네이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후에 눈과 얼음으로 뒤덮이겠습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북반구는 영하 50도까지 떨어져 건물이 얼어 고드름처럼 떨어져 내리겠으며, 항온동물은 밖으로 나오는 즉시 얼어버릴 염려가 있으므로 강아지나 고양이는 외출을 삼가시길 바랍니다. 내일의 날씨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 밤 날씨로 인해 내일이 사라질 수도 있으며, 지표면이 바뀔수도 있으니, 각자 알아서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건물과 아파트가 너무 많아 고민인 분은 오늘 집없는 사람들에게 싼값에 세를 주시고, 등락 폭이 높은 주식과 가상화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분들은 오늘내로 안심과 단잠 쿠폰으로 교환하시길 권유합니다. 돈을 시간과 바꿀 시간은 오늘밖에 없으니, 부디 오늘 내로 시간을 구입해서 친구들과 나누고 함께 먹고 즐기시길 바라며, 전기가 끊기고 통신이 두절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자정 즈음이면 사지가 얼어 심장이 정지할 수도 있으니, 지식과 지폐를 태우거나 서로의 가슴을 끌어안아 체온을 유지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 날씨 예보였습니다.
김해자 시인 / 종이거울
오랫동안 난 지나가면 지워지는 유리거울의 신도, 변절했다 난 이제 오늘과 어제그제만이 아니라 전 생애가 비춰지는 영원의 거울을 원한다
글은 아무도 말을 가로채지 않는 대화 같아요, 식당 전전하던 그는 글로 말했다 글 쓰다보면 종이에 얼굴이 훤히 비친다 했다 커피 병에 소주 담아 틈만 나면 피시방 달려가 구겨진 종이거울 펼치던 그는 거울에 비친 얼굴 팔지 못했으므로 돈도 이름도 벌진 못했지만 종이거울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는, 그가 나보다 시인답다 생각하는 나는 지금 그일까 나일까,
길이를 잴 수 없는 종이거울의 뒤란에서 잠자고 있던 이름들 하나씩 불려나올 때마다 난 다시 태어난다 난 나무이자 벌목꾼이자 사슴이자 사냥꾼, 산사람이자 죽어간 모든 사람, 맞아 죽은 자이자 때려눕힌 자, 독재자이자 매파이자 창녀이자 야만적인 인류사, 이 모든 이름들이 종이거울 속에서 날 부르고 있다
까맣게 비춰지는 종이거울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나를 벗긴다 내가 아닌 것이 떨어져 나가고 바로 너인 것이 내가 될 때까지
-시집 <집에 가자> 에서
김해자 시인 /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에서 헤매는 것은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The JoongAng plus / 시(詩)와 사색』 202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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