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선균 시인 / 추모의 노래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2. 08:00
이선균 시인 / 추모의 노래

이선균 시인 / 추모의 노래

 

 

밤공기 부드러운 잔디광장에

노란 리본 눈이 부신 나무기둥은

미친 세상의 슬픈 불기둥

생명의 돛대

영원히 잊지 말아요.

세월호 텅 빈 갑판처럼 푸른 광장은

거친 파도 헤쳐 가는 포세이돈의 배

엄마 아빠 동생 언니들 가득 손 흔들어요.

폭풍우 속에서도 촛불로 타올라

어둠을 물리쳐요.

엄마 아빠 동생 언니들

가만히 있지 말아요.

침몰하는 이 세상 평형수 되어

희망의 노를 저어요.

 

-<시인정신> 2014년 가을호

 


 

 

이선균 시인 / 생강을 달이며

 

 

하얗게 추운 소설(小雪) 저녁

독감으로 찾아든 당신

생강을 달이며 묻습니다

 

당신, 천국과 지옥을 하루에 다 앓아본 적 있으신지

 

내 모세혈관을 순회하며, 오한으로 스며들어

알몸을 훌치고 돌아누운 당신

그리고 나

 

매운 침묵의 회오리…

몸서리치며 끓어오르는 제트기류의 블로킹!

 

유리잔 속 우련히, 저녁빛 붉은 향으로 번지는 당신

아찔한 내 몸속 냉기도 녹여주시는지

생은 이리 우려낼수록 깊어지고 은은해지는 것인지

순하게 타오르는 밤 속의 밤

따뜻한 겨울이 쏟아져 내릴 듯한

 

 


 

 

이선균 시인 / 11월의 書

 

 

 밤하늘 못박혀 있는 당신은 이미 천 년 전에 사라진 별자리라지요 가장 아름다운 빛을 뿜으며 유성우를 뿌리며 가깝고도 머언 먼 천 년의 거리에서 당신이 내게 와 닿은 계절은 내가 당신을 느끼던 밤 깊은 강가였지요 당신을 올려다볼 때마다 내 눈 흐려진 까닭은 없는 당신을 오래오래 바라본 때문이었나 봅니다

 

 이제 그만 헤어져 서로 다른 강줄기 속으로

 바다로 허공으로 우주 밖으로 휘어들자하는 취기어린 음성도

 천 년 전에 엎질러진 찬란일까요,

 

 삭월의 밤

 살빛으로 내려온 수면 위 당신은 11월처럼 아득해지는데

 침묵의 메아리는 점점 더 또렷하게 강심으로 흐릅니다

 

 이제 곧 강물은 또 얼고 다시 풀리겠지요 그리고 밤이면 더욱 큰 소리로 흘러내리겠지요

 빛으로 맺은 천년의 약속을 그렇게 속울음으로 노래하겠지요.

 

 


 

 

이선균 시인 / 이명

 

 

1

내 몸속으로 갠지스 강이 흘러요

 

고요를 베고 누우면

골관피리 구멍마다 끊길 듯 이어지는 선율

외계에서 날아드는 간단없는 모스부호

가수면 뇌리 속 켜켜이 일렁이는

 

잠들 수 없는 잠의 성지에서

누가 쪼그리고 앉아 젖은 빨래를 꾸욱 짜고 있는지

어떤 간절함이 신접살림을 차리고 있는지

순례객처럼 밀려드는 리듬과 멜로디

 

2

당신, 뼈로 만든 전생의 피리소리 들어본 적 있으신지

통증이 깊을수록 아름다운 소리 흘러나오는

우주의 선율 실어 나르는

 

기댈 곳이라곤 돌무덤 아래뿐인,

울음이란 울음은 모두 뼛속에 쟁여넣은

 

나, 다음 생애엔 당신을 울러가겠지요

알 밴 모래무지 강바닥 돌 고르는 모습으로

혹은, 내 늑골로 만든 나른한 피리소리로,

 

 


 

 

이선균 시인 / 새벽, 바닷가에서

 

 

문고리 잡고 엄마 혼자 동생 낳았듯

저 바다 홀로 산고를 치른다

새벽안개 덮어쓰고 온몸 뒤트는 소리

이슬 비친 불안 출렁거리는 소리

 

나 어릴 적 창호지 마른꽃잎 밖으로

엄마의 신음소리 아스라이

아기의 첫 울음 세상을 찢도록

할머니 데리러 간 아버지 안 오시고

석류꽃 짓밟으며 달빛 아래 나 혼자 아스라이

 

일출을 기다리던 사람들 하나 둘 돌아가고

파도소리에 잠 기대어 내 두려움 쓸려가고

바다 홀로 밀어올린 태양, 구름 사이 찬란할 때

하늘 구름 뒤섞인 바다 발갛게 젖물 들 때

 

그 많은 물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

뻐근하게 젖가슴 부풀어오른다

봉긋한 구름 젖꼭지마다 햇살 자글거리고

젖은 내 몸에 붉은 꽃 핀다

 

 


 

 

이선균 시인 / 헛꽃

 

 

배경만으로 존재의 이유가 된다.

 

향낭도 씨방도 없이

난분분 흐드러지다

 

혼자 울 곳을 찾아

하얗게 말라간다.

 

천치 같은

저,

보살 꽃.

 

 


 

 

이선균 시인 / 라미 만년필

 

 

이 황금 발톱으로 날아가는 새를 낚아챌 것인가

백지를 찢어발길 것인가

 

숫돌에 벼린 초승달 낫으로 아버진 파꽃을 피워

해마다 천 평 연작시를 지으셨다.

독한 향기의 파 행간에서 나는

풀꽃을 따거나 나비를 쫒거나.

어느 겨울 아버지 그 낫으로 꿩의 목을 베기도 했지.

그런 밤이면 피 묻은 초승달이 대추나무에 걸리고

뜨거운 김이 오르는 방으로

또 다른 발톱들 모여들었지.

낫 놓고 기역자를 겨우 아시는 아버지

팔순 발톱이 세월처럼 무지러지도록

낫을 벼리고

정신을 벼려

추운 그 방에서

불후의 전집 엮으셨는데

너는

 

너는 이 빛나는 발톱으로 무엇을 이룰 것인가

이 밤을 깨부술 것인가,

얼음벌판에 구덩이를 팔 것인가.

 

 


 

이선균 시인

1961년 경기도 포천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졸업. 2010년 《시작》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언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