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시인 / 장미와 고양이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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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시인 / 장미와 고양이
지붕 위에서 며칠 전 태어난 새끼고양이가 마당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는 날이면 장미넝쿨도 새 잎을 틔우고 무섭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비가 이틀쯤 고즈넉이 내리면 한 사나흘 비가 내리면 그 다음 날이면 그 전날 밤이면 나도 내가 외로워져서 계단 위에 며칠 그대로인 고양이 밥그릇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목덜미가 젖어서 처마가 짧은 계단에 서서는 소년에게 받은 장미를 들고 그 소년의 묘지에 찾아가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읽는다 누런 줄무늬 고양이가 골목을 지켜보다 간 자리에 장미넝쿨이 지붕으로 뻗어 오르는 그 사이에 뭔가 있다
-시집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거야》에서
김태형 시인 / 바람의 각도
추위를 몰아올 땐 예각으로 날카롭게 소문을 퍼트릴 땐 둔각으로 널따랗게 또 하루 각을 잡으며 바람이 내닫는다
겉멋든 누군가의 허파를 부풀리고 치맛바람 부는 학교 허점을 들춰내며 우리의 엇각인 삶에 회초리를 치는 바람
골목을 깨우기 위해 어둠을 밀치는 것도 내일을 부화시키려 햇살을 당기는 것도 세상의 평각을 꿈꾸는 나직한 바람의 몫
- 2013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김태형 시인 / 공유 프로그램
깊은 숲에 불을 놓던 원주민들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만 잠시 땅을 빌렸을 뿐 때가 되면 밭은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이제 막 나온 동영상과 얼굴 들을 공유하는 동안 고라니가 뛰던 시간은 느릿느릿 길 건너던 누룩뱀은 찢어진 타이어 자국으로 돌아갔다
-시집 『코끼리 주파수』 창비, 2011
김태형 시인 / 소행성
먼 하늘을 올려다보니 심장 한 쪽이 무너지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나에게는 아직 한 쪽의 심장이 남아 있다 남은 심장 한 쪽으로 나는 돌이킬 것인가 그 힘으로 얼음덩어리와 운석들이 가득하 곳으로 저 암흑까지 조금 더 가볼 것인가 선명하고 밝은 심장 한 쪽이 거대한 운석의 충돌 때문에 생긴 것이라니 내게 남은 한 쪽의 심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했지만 정작 사라진 사람은 나였다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나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 것을 기키려고 보이지 않아야 했다 남은 심장 한 쪽 얼어붙은 대평원이 없었다면 한 쪽의 심장마저 잃고야 말았을 것이다 궨도를 끊고서 떠돌다가 먼지가 되거나 파편이 되어 다시 돌이키려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영원토록 어둠이 되었을지 모른다 다행이다 내게 심장 한쪽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힘으로 섣불리 돌이키려 하지 않고 어딘가로 훌쩍 건너가 버리지도 않고 궤도를 돌고 있다 보이지 않은 채로 나는 그 힘으로
김태형 시인 / 절벽 사원에 부리가 노란 까마귀가 산다
눈 녹은 물줄기조차 흐르지 않는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설산은 그 뒤에 멀리 있을 뿐이다 나는 고대의 세계관을 믿는다 세상의 끝은 절벽이다 이곳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 사원이 있어야 할 것인가 가장 마지막에 신을 찾는다고 했던가 나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세례를 받았다
기어오르기도 힘든 가파른 곳에 진흙을 이겨 벽을 세웠다 방을 만들고 작은 창을 내어서 절벽은 그 아래를 건너다보는 곳이 되었다 절벽까지 찾아온 이들을 세상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곳이 되었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다 숨이 차서 뒤돌아보니 아래층 지붕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 부리가 노란 까마귀 둘러봐야 아무것도 없다 걸어서 갔다 오면 하루는 족히 걸릴 만한 곳에 설산이 가로놓여 있다 눈표범이 자취를 감추는 동안 며칠 만에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또 설산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어디든 다 황량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부리가 노란 까마귀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황량한 고원에서 까마귀들이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까마귀는 사원 뒤쪽이 아니라 멀리 개울이 흐르는 골짜기 쪽을 향해 앉아 있다 그러다가 바람 한 자락을 끊어서 무슨 영혼인 듯 날아간다 그곳이 세상이라는 듯이 사원도 그쪽으로 계단을 내려놓는다 와서는 다시 되돌아가야 할 곳이 저기라는 듯이
-제4회 <시와사상> 문학상 수상작
김태형 시인 / 허물
닿을 수 없는 것은 왜 저렇게 푸를까 얼마나 말을 하지 않았으면 발음조차 되지 않는지 아래로만 다시 삼켜지는 묵직한 것들 동굴 속으로 둥글게 등을 웅크린 목소리가 들려 누렇게 굳어버린 손바닥처럼 벗어놓고 간 허물이라면 다음에 어느 늦은 오후의 볕살처럼 흩날릴 텐데
나무 등걸 뒤로 바람이 되고 빗방울에 떨어져 비린 흙냄새 진흙덩이가 되고 지렁이처럼 주억거리다가 어느 발자국에 짓밟혀 마른 바닥으로 깨어나서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앉으면 좋으련만
자는 듯이 죽을 수만 있다면 단 한 줄로 지평선으로 펼쳐지는 곳으로 그리하여 죽을 수만 없다면 말문이 트여서 문득 생각이 나서 언덕으로 돌아앉아서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23년 봄호
김태형 시인 / 지갑이 돌아왔다
불룩한 호주머니 속에 무엇이 있는지 맞춰봐라 내 손바닥을 펼쳐봐라 언젠가 한 번쯤 맞잡았던 잘 마른 반듯한 손들 가을 숲 도토리상점에서 마음껏 뿌려댈 수 있는 낙엽이 몇 장 구름도서관 회원증 하나 그리고 또 길고 슬픈 일련번호가 한 줄
얕은 시냇물 속 둥근 돌처럼 무릎을 맞대고 차를 한 잔 나누던 때가 있다 앉은뱅이 인도 할머니가 시장 바닥을 기어올 때 머뭇머뭇 십 루피 한 장 꺼내들던 그런 기억이 들어 있다
신축공사장 앞에 쌓인 붉은 벽돌처럼 오늘 하루도 추억이 없는 자여 굳게 닫힌 지갑을 열어라 지갑은 그때서야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뚱뚱해지고 모서리가 닳아도 빈털터리 먼지와 쓸모없는 것들뿐이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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