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아영 시인 / 별꽃뿌리이끼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2. 08:00
이아영 시인 / 별꽃뿌리이끼

이아영 시인 / 별꽃뿌리이끼

 

​나를 탁본해 보실래요

이끼는 이끼인데

별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꽃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뿌리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나를 현미경으로 보실래요

꽃이라고 하면 꽃잎도 있고

꽃받침도 암술도 씨방도 다 있지요

다시 한번 관찰해보실래요

내 몸엔 달걀이 두 개 있어요

배와 등에 말이에요

이빨도 두 개 있다니까요

아무것도 씹을 순 없지만

뿌리, 뿌리는 아마도

못 찾으실거예요

소리 없이 웃고는 있어도

속 깊이 울고는 있어도

도대체 눈물을 모르는 내 모습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고

살다 보니 눈물샘이 다 말라버린

별꽃뿌리이끼 여기 있어요

 

-시집 <별꽃뿌리이끼>에서

 

 


 

 

이아영 시인 / 불두화佛頭花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오르는데

옆 눈짓하는 이 누구인가

 

곱슬곱슬 파마머리 은빛이슬 머금고

촉촉한 눈빛으로 날 보는 이 누구인가

 

언젠가 한번쯤 본것 같기도 한데

푸른 손바닥을 연거푸 흔든다

 

숨가쁘게 오르는 가파른 길손,

어쩌자고 날 부르는지

 

내려갈 때 보자고 손사래 친 나에게

적멸보궁이 여기라며

자꾸만 바짓가랑일 잡는다

 

 


 

 

이아영 시인 / 일출 속에 - 생명의 신비

 

 

앞산이 살아났다

연두색의 엷은 이불을 덮고

아기 숨결처럼

 

죽은 듯 숨죽여 하얀 이불 쓰고

가슴속에 얼음덩이 끌어안고

동장군 견디더니

 

부드러운 봄바람에 깨어나고

봄비가 젖줄 되어

아기손이 꼬물꼬물 기지개를 켠다

 

빈 가지를 겨우내 지켜주던

새 둥지도

푸른 잎에 가리워 포근히 쉬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생명줄이 흐르듯

메마른 가슴에 떠오르는 영감의 줄기

타는 듯 한 일출 속에 끝없이 솟아오른다

 

 


 

 

이아영 시인 / 예약 미용실

 

 

그곳에 가면

마스크 쓰고 비닐 모자까지, 덮어쓴

할머니 대여섯이 앉아 있다

모처럼 외출이니 수다를 떨 만도 한데

약속이나 한 듯이 묵언수행 중이다

 

파마냐?

염색이냐?

커트냐?

 

미용실 주인 선창을 따라

한두 마디 하고 나서 또다시

명상에 빠지기, 참선에 빠져들기

하나 같이 일자(一)로 입 다물고

 

가부좌는 틀지 않아도 된다

앉거나 서 있거나

가끔은 기지개는 켜도 된다

몸이 하자는 대로

 

누구 한 사람 불평불만 없이

달관했다 행복해 보인다

 

서너 시간 후면

칠팔십 할머니 호박꽃들이

봉선화, 분꽃, 민들레, 채송화,

그리고 나팔꽃이 되어

함박웃음 피우며 가는 뒷모습

 

곱다, 서산에 지는 저녁노을처럼

 

 


 

 

이아영 시인 / 소, 길들이기

 

 

흰 벽을 마주하고 가부좌를 튼다

눈은 반쯤 뜨고

내 무릎을 칠 번개를 찾는다

 

배꼽 밑 단전에다 숨을 멈추고 내쉬는 동안

허벅지 밑 종아리로 개미 몇 마리 스멀스멀 기어간다

 

일광욕을 즐기다 시간을 놓쳐버린 지렁일

개미 떼가 어디론가 끌고 간다

 

잠시 감기는 눈을 치켜 떠보니

처마 끝에 풍경은 잠든 지 한참인데

종각 안에 나래 펴는 그녀는 누구인가

 

청산은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데

백운은 어디까지 떠다니는지

 

천방지축 허공을 날뛰는 소의 꼬리

 

언제쯤이면 마음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몸에게 허공을 떠다니라 할까

 

 


 

 

이아영 시인 / 체중계

 

내 등에 올라설 때마다

다리가 떨리고 심장도 두근거리지

바늘이 자기 발바닥을 찌를 거야

될 수 있으면 바늘이 왼쪽으로 움직이게 하란 말이야

오늘도 친구 만나 피자 한 판 먹어 치웠잖아

커피에 시럽까지 넣어 마셨잖아

동네 앞산을 매일 다닌다고 해놓고

왜 내 말을 안 들어?

내 말 잘 들으면 S자 몸매에 옷맵시도 날 텐데

그것뿐이겠어?

편두통 만성 소화불량 잔병치레 사라질 텐데

좀 잘 봐달라는 말도 하지 마

날 매몰찬 사람이라 말하지 마

자기가 내 등 자주 오를수록 체중 관리 잘해줄게

어김없이 약속 잘 지킬게

건강 체크까지 해주는 스마트한 남자

 

 


 

 

이아영 시인 / 청령포의 뜬소리

 

 

삼면이 구비치는 서강물

등껍질 벗긴 곤룡포는

찬바람에 나뒹굴고

 

왕관 잃은 애통한 사랑이었을까

두문불출 삼일 통곡 끝에 모든 책을 불사른 설잠雪岑*

승속을 넘나드는 두타행하면서도

일거수일투족 귀명창이 된

저기 저 관음송觀音松은 왜 못 그렸을까

 

내려놓자 내려놓자 다짐하면서

거룻배 타고 강 건너가는 오늘

매월당의 묵매도墨梅圖를 붉은 놀에 묻어두고

볼멘소리 뜬소리 되뇌어본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법명,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

 

 


 

이아영(李雅英) 시인

경북 상주 출생. 본명: 이영자(李英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및 일붕삼장불교대학원 수료. 2001년 계간《자유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돌확 속의 지구본』 『꽃요일의 죽비』, 순수문학상과 열린시학상 수상. 자유문학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전통문화위원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열린시학회 이사, 불교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