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준 시인 / 베껴 쓰는 습관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3. 08:00
최준 시인 / 베껴 쓰는 습관

최준 시인 / 베껴 쓰는 습관

 

 

담장 없는 옆집

무당 할머니

지붕 위 낡은 깃발은 신통력의 은유인가

 

허리와 무릎을 앓고

보청기로 세상과 소통하나

유모차 밀 힘이 발바닥에 여즉 남아

고통의 어시스트로 집 앞 텃밭을 가꾼다

내 집 앞 텃밭에도 오이 모종 하나 심어주신다

 

내륙의 적설(積雪)이 다시

초록의 망망대해를 일굴 때까지

점 보러 오는 이 못 봤다

 

마당 구석 포도 넝쿨 아래

꼬리만 살아 있는 개 한 마리

애기 시절 신내림이라도 받았는지

마주칠 적마다 엉덩이 요령을 흔들어댄다

 

인생이 동그라미가 맞아요, 원이 맞아요?

 

지랄허네

푸성귀나 뽑아다 처먹어

 

할머니도 저와 인연인가요?

 

이년?

 

아마존강보다 긴 고무호스 끌고 나와

무당 할머니

아침을 시원스레 물 뿜으신다

 

텃밭의 장배기가 올해도 청청하시다

 

 


 

 

최준 시인 / 등나무

 

 

기차표 끊고,

 

행선지 확인하고,

 

역사(驛舍) 앞 주차장 한구석에서

기차를 기다리자면

 

귀만 열어놓고 있으면 된다

메두사의 머리칼 춤추는 뱀들처럼

꿈틀거리고 휘어진 머리맡 등나무 아래

얌전히 무릎 꿇고 앉아 계시는

 

벤치 하나

 

등나무는 시간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와

시절을 눈여겨보란 듯

보랏빛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보라!

 

이 자리에다

나를 부려놓은 지 어언 삼십 년

얼마나 많은 울음소리 들었겠느냐

웃음과 울음이

한 몸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걸 아느냐

 

떠난다는 너를 기꺼이 보내주어야겠다

언젠가 돌아올 네가

내 등을 문질러 닦아

내 등이 너를 비추는 명경(明鏡)이 될 때까지

 

기다리마

그때까지는 보라! 만으로 나를 견디마

 

 


 

 

최준 시인 / 어린이 보호구역

 

 

물풀을 다치면 안 됩니다

 

길을 내어 길이 사라져버리다니요?

 

속도와

 

유속(流速)의 교차점

 

그 수직을 가로지르는 조약돌들이

 

건너편에 마침내 이를 때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야 합니다

 

오늘을 지나야 내일이 있지요

 

내일도 오늘이지요

 

 


 

 

최준 시인 / 잠

 

 

잠든 개가 조용하다

개의 잠 속의 세상이 고요하다

잠 속의 하루 노동이 평화롭다

평화로운 세상은 풀들이 말라죽은 겨울벌판 같다

그런 벌판은 너무 허허로워

잠든 개를 바라보는 일은

허허로운 벌판을 바라보는 일처럼 무연하다

무연한 모든 것은 차가운 것

개의 차가운 잠 속으로 개의 발자국이 찍힌다

찍힌 개의 발자국을 잠든 개의 침묵이 지운다

혼자 잠든 개의 발자국이 개의 하루를 지운다

 

 


 

 

최준 시인 / 각기 걸어가고 있는

 

 

개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다

저 개는 어디서부터 걸어오기 시작했는가

무엇 때문에 걸어오고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오늘 아침 끼니는 거르지 않았는가

했다면 무엇으로 배 채웠는가

점심은 뭘로 때울 것인가

어두워지면 여관에라도 들 것인가

노숙할 것인가

영영 혼자일 것인가 동행을 만날 것인가

지나온 길을 돌아 볼 것인가

가금 지난 시절 그리워 할 것인가

뛰어가기도 하고 포복자세로 가기도 할 것인가

길을 잃어버리고 길 아닌 곳으로

접어드는 경우도 있을 것인가

후회할 것인가 굶기를 밥먹듯 할 것인가

구걸도 해볼 것인가

차라리 길에서 아름답게 죽을 것인가

고심에 찬 개가 가고 있다

저마다의 심중대로 의지대로 한 마리의 무수한 개들이

각기 걸어가고 있다

 

 


 

 

최준 시인 / 저녁 일곱 시

 

 

어둡기 전에 가야할 곳이 있다는 건

오늘의 무언가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것

이 비린내 나는 호흡기를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오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

 

다 노래하지 못한 시간이 하수구로 흘러들었다

 

천사들이 날개를 되찾으러 오르는 계단은

지난 아침을 말짱하게 반짝거리고

하루에 묶인 하루는 차양 아래 펼친 좌판 위에서

떨이 생선들의 무덤을 이루고 있다

 

알고 있다 이제는 모두 이제가 된 이야기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들

 

아, 그런데

저녁 일곱 시의 소매 속에 숨긴 게 과연 숨 쉬는 아가미인가

 

돌아갈 곳 있으니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뿐인가

 

돌아온다 다들

되돌아간다

 

 


 

 

최준 시인 / 아흔아홉 개의 표지판이 있는 길

 

 

그 울보, 당나귀를 몰고 가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먼저 데리고 갔지

비가 내렸다고도 하고

눈이 내렸다고도 하는데

길 나선 할아버지는 당나귀만 끌고 가다

집과 애인을 잃어버리고

어린 당나귀처럼 길 위에서 울었다고도 하는데

눈물이 길을 다 적셨다는데

알고 보니 이건 다 가로수가 지어낸 얘기

심심한 바람이 들려준 유머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

그렇게 지나왔다고

내가 말하면 거짓말이지

당나귀를 끌고

애인을 잃어버리고 집 나가 울던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하고

마차 바퀴에게 묻는다면 그건

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가로수는 나 지나갈 적에 이미 서 있었던 것

바람은 처음부터 길 잃었던 것

하므로, 누가 알까 이 길로

대체 몇 개의 슬픔과 절망과 욕설이 지나갔는지

얼마나 눈물겨운 사랑이 좌우로 어긋났는지

그러니 아흔 아홉 개의 표지판은 온통

거짓말투성이

길에서의 추월은

먼저 길을 지우기 위한 안간힘이었을 뿐

돌아보니, 아득히, 어쩌면 이제

알 수도 있겠네

길 위에서 만난 얼굴들

헤어진 사연들

표지판만 나풀나풀

추억으로 나부껴

할아버지 없는

그 많은 무덤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최준 시인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 1984년 《월간문학》,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등단. 시집 <너 아직 거기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칸트의 산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