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재혁 시인 / 시와 누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3. 08:00
김재혁 시인 / 시와 누드

김재혁 시인 / 시와 누드

 

 

시도 좋아하고 누드도 좋아한다는

깡마른 그 여자를 보면

나는 여름 폭포가 생각나

아니면 파도와 구름 속에

제 몸을 내팽개치면서

미친 듯이 달려드는

초가을 태풍이 생각나

어쨌든 자꾸만 물이 생각나

그 여자 얼굴에 가득 고인

갈증을 나는 손바닥에 받아

단숨에 들이켠다. 순간

내 몸속 버드나무 가지가 축 늘어진다

벌거벗은 마음들이 서로 부딪치며 한데 어울려

내 몸 어딘가에 물이 용솟음치는가 보다

목마른 그녀를 알게 된 후로

나는 버드나무를 한 그루 키우게 되었다

 

 


 

 

김재혁 시인 / 그냥

 

 

밀양에서 올라온 오후

건대 앞 골목을 걷다가

조선주막에 들어와

혼자 막걸리와 두부김치를

시켜놓고 하이데거를 읽는다.

나의 언어는 늘 그 무엇을 배태하고 있다.

한창인 시간의 처녀 셋이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는다.

그들의 목소리가 스피커 음악에 섞인다.

하이데거가 막걸리에 섞인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가깝고도 멀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젊은 고개를 넘는다.

나의 사랑은 가깝고도 멀다.

잠이 가깝고도 멀듯이.

하이데거를 왼손 날로 살짝 누르고

두부김치 한 점을 입에 넣고

막걸리 한 잔을 털어 넣는다.

내 입이 뭔가를 배태한다.

내 입에 물리는 것은 약간의 공기와

여물지 않은 먼 사랑이다.

 

 


 

 

김재혁 시인 / 하얀 히잡의 여인

 

 

엊그제

달이 떠서 들여다보던

빈 공간에 오늘은

가을안개들이 조잘대고 있다.

바로 같은 시간대

엊그제는 달이었던 것이

오늘은 다리 밑에서 자고 일어난 듯

푸석한 얼굴의 안개들이다.

계절이 히잡을 뒤집어쓸수록

오랜 길 흔들려 온 듯 멀미가 심해진다.

고향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나이를 재고 돌아온 새벽엔

먼 길 걸어온 듯 다리가 뻐근하다.

가까운 앞산은 그새 늙어 키가 작아졌고

멀리 화전민들만 옮겨 다니던

이름 모를 검은 산은 여전히 검다.

어릴 적 흐르던 개울을 보고 돌아와

하얀 히잡을 한 여인들의

뜻 모를 말들만 창 너머로 듣는다.

거주지를 떠나 설거지통에 발을 담근

국화들은 어제 옷차림 그대로이지만

모두 무슨 색 속에 잠들고 싶은 건지

이곳의 창밖에도 하얀 말들뿐이다.

 

 


 

 

김재혁 시인 / 소리

 

 

산책로를 걷다 보면

여름의 주머니를 뒤지는 소리들,

딱따구리는 제 골머리가 터지도록

나무의 속에다 딱딱딱 공허를 털어놓고

날아가던 구름은 귀를 열고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나무들은 발가락으로 땅속을 헤집고

안 보는 듯 슬쩍 남의 허벅지를 훔쳐본다,

가끔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낙엽송들,

땀에 묻어나는 진하게 꿍친 생각들,

민들레는 고양이 눈을 노랗게 뜨고

입을 오므려 동그랗게 야옹 소리를 내고

돌멩이는 바람에 몸을 비비며

발꿈치를 돋운다.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

무수한 소리들 사이로 전류가 흘러

세상의 정적에 불이 들어온다,

수첩을 꺼내든 나무들 소리를 끼적거린다

 

 


 

 

김재혁 시인 / 인터뷰하는 거닐니우스*

 

 

그의 덥수룩한 머리에 늦은 봄비가

떨어지던 날 나는 보았네

얼굴에 스치는 빗방울에

어리는 철쭉의 붉은 빛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깊은 생각 속에서 붉은 혀를 꺼내

핫도그 같은 마이크를

맛있게 아작아작 깨물며

지나가는 나를 향해 슬쩍

미소짓던 그의 그 시커먼 동굴에서

이처럼 쏟아지던 하얀 낱말들을.

 

이젠 걷지 않고 서서

농경민족이라도 된 듯

고대의 정기를 온몸에 받는다며

하루 종일 걸어다니던 구두를

잠시 벤치 옆에 쉬게 하고

지금까지 발로 번

낱말들의 수를 헤아려

마이크 속에 집어넣던,

잠시 이상해진 거닐리우스,

 

정말 따의 정기를 느끼려면

구두를 벗어야 하리.

거닐리우스여,

맨발로 거닐어라.

서 있지 말고 걸어라

주머니에 들어올 낱말들의

보상을 생각하지 말고

거닐리우스여

니힐리스무스여

밟은 땅마다 붉은 꽃을 피워라

차라리 옷마저 벗으면

노란 호박꽃이라도 필까

 

 * 거닐리우스: 고려대학교 안암동 캠퍼스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베회 하는 턱수염 덥수룩한 한 중년의 사내에게 붙여진 별명. 최근에는 MBC TV에 고려대학교의 명물로 소개된 적이 있음.

 

 


 

 

김재혁 시인 / 책

 

 

구름보다 더 늙은

책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내 얼굴을 들이마시고 어루만진다,

내 마음을 제본하여 읽어 보라고 내민다.

책의 손가락이 내 속을 더듬으며

뒤틀린 내 영혼의 손목에 봉침을 놓으며 웃는다.

병원 복도에서 소리 지르는

반 귀머거리 노파,

귀먹은 책이 나를 향해 소리친다,

생의 계절은 늘 그늘이었다고,

앞을 못 보는 책은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면

낡은 귀를 쫑긋 세운다,

책의 행간을 바람이 지난다,

책의 밭고랑에 시간이 흐르며

물결친다, 책에 해일이 일어

사랑이 묻히고 죽음도 묻히고

책에 눈이 내려 어둠이 진다.

 

 


 

 

김재혁 시인 / 꽃의 향기를 맡으려 구부린 여인의 그 허리

 

 

꽃의 향기를 맡으려 구부린 여인의 그 허리,

선명하다. 차라리 사랑을 염하여

내 눈망울을 긁은 그 허리,

어지럽다.

바람,

입술마다

꽃잎을 물었다.

바보라고.

바람이 세차게

날아와

뚫고 간

옛사랑의 망막,

꽃의 향기를 맡으려 구부린 여인의 그 허리.

 

 


 

김재혁(金在爀) 시인

1959년 충북 증평 출생. 고려대학 독문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릴케 연구로 박사학위. 독일 퀼른대학 수학. 199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 『아버지의 도장』 『딴생각』. 현재 고려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