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희 시인 / 애인의 구조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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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희 시인 / 애인의 구조
불꽃이라도 상관없겠다 쇳덩이를 두드리는 대장장이를 떠올렸다 말랑말랑한 불꽃이 오기까지 차가운 몸을 이룰 때까지 간혹 살아있었구나 생소한 물체가 되었다 그건 오래 전에 사용했던 이야기 멀리 환할수록 깊어지다가 그러다 시들어버린 불꽃을 이해하는 것 불꽃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불꽃의 허리춤에서 입술을 꺼내 더듬다가 슬쩍 놓아주기도 하는 심장이 부르는 빨간 양말이라고 하자 양말이 타는 불꽃이라도 상관없겠다 내일은 쇳덩이로 바위를 접어야지 바위를 녹여 장난감을 만들다가 죽도록 간지러우면 다시 쇳덩이를 구겨 바람으로 되돌려줘야지
—《현대시학》 2017년 1월호
정운희 시인 / 기일忌日
12월의 억새는 바람에 잠들었다 강가에 박힌 돌에선 별 냄새가 난다 아무도 다녀간 흔적이 없는 평면의 바닥 강 건너 묶여 있는 배 한 척 그 풍경 속으로 건너갈 수 없어 돌멩이만 만지작거린다 네모지거나 굽이쳤거나 옛집을 떠돌던 혼령의 이빨들 노래할 수 없는 시간을 물고 있다 물의 주름이 잡힌다. 고요는 또 다른 풍경으로 곁을 내준다 나의 안부를 전하고 싶어 큰 돌멩이 힘껏 던져본다 빈 가지를 지키고 있던 새들이 날아오른다 제상에 소복했던 흰밥에 새 발자국 난다 정박한 배 내부 속으로 흐르는 달빛 그곳에도 그리운 것들이 있어 별처럼 쏟아지는 노을을 쥐었다 놓는다 억새풀에 베인 자국처럼 강가에 피멍이 드러난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오 년째 되는 날이다
- 시집 <안녕, 딜레마>에서
정운희 시인 / 왜 네가 아니면 전부가 아닌지
내 몸속에는 견고한 생각주머니가 산다
장소도 새도 주머니 속에서 기생한다 곱씹으면 씹을수록 장소가 번지고 기분이 웃자랐다
주머니의 입구를 만지작거리자 새 한 마리 푸드덕 날아오른다
공중은 한없이 굴절되어 몇 날 며칠 새를 낳느라 까만 울음을 토했다
녹슨 꼭지를 틀어놓고 방목하는 새들을 헤아리는 아! 지긋지긋한 날것의 입냄새
그것은 내 두개골을 파먹는 부리 긴 새의 오래된 다정이기도 하고 종결어미가 없는 생의 파노라마 같은 것
그러니까 새는 내 몸속에 끝없이 알을 낳았던 것
신호등이, 신호등이 아니고 새인지 딱정벌레가, 딱정벌레가 아니고 왜 새인지 감은 눈 속에 떠 있는 새라고 자꾸 우기면서 목을 잡고 입을 맞추는지
왜 네가 아니면 전부가 아닌지
정운희 시인 / 완강한 여름
집 나간 언니는 소식이 없다 열흘도 훌쩍 넘기면서
폭염은 계속되고 있다 타들어가는 돌멩이들 옥상들 십자가들
소음과 함께 날아온 먼지를 뒤집어쓴 기념일 약속한 터미널
창틀에 놓인 화분에 초록이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이 전부인 초록을 뒤집어쓴 초록 손수건 같은 비밀만 키워가고 있다
소음과 먼지에 대한 분쟁이 시작됐다 서랍 속, 밀봉된 언니는 흑백의 단발머리 사진으로 웃는다
완벽한 공휴일 같은 흠잡을 데 없는 영수증처럼 층층이 치솟은 창문들 현수막에 새긴 결심들
생물들은 빠르게 몸을 뒤섞고 우리는 생경한 단어를 피해 각자의 방으로 기어들었다
정운희 시인 / 독립만세
독립은 자유다 라는 우직한 신앙심으로
나 홀로 독립을 외치는 날
와르르 넘어지는 불면의 목 웃자란 뿔이 뿌리 채 뽑힌다
옮겨가는 모양들 표정을 찾은 색깔들
있거나 없는 아들은
준비된 장화처럼 목이 늘어진 셔츠의 시간으로 넘쳐흐를 것만 같은 물병의 입구에서
걸핏하면 문을 잠갔다
연애하는 악어처럼 연애하다 죽어도 좋을 악어처럼 구름이 뒤엉킨 밤이 오면 달빛에 몸을 씻기도 하면서
비로소 혈색을 찾은 벽과 바닥 나는 차를 끓이다가 노래를 줍다가 웃음을 흘리는 허벅지를 꼬집는다
어제와 다른 문장을 깃발처럼 흔들며 경쾌하게 보다 더 힘차게
아들을 태운 이삿짐차가 골목을 빠져나간다.
독립은 만세다!!
정운희 시인 / 혼잣말
목욕하는 내 옆자리의 여자 중얼중얼 날아오르네 중얼중얼 돌에 넘어지거나 중얼중얼 유리창을 통과하거나 쫓기거나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는 여자를 보네 발에 걸려 넘어진 촛불처럼, 잘못 건드린 농담인 듯 실을 뽑아내는 어둠 속 거미의 자세로 쉼 없이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네 곧 꺼지고 다시 부활하는 알 수 없는 세상의 고요한 외침을 보네
모두가 흘낏거리는 죽은 별들을 장황하게 쏟아내고 있네 고개를 끄덕이고 허공을 찌르기도 하면서 그녀의 몸 속 저장된 칩 속에는 꽃들이 충돌을 하거나 집 나간 고양이가 내걸리듯 오른쪽 귀가 먹은 금붕어의 한낮이 있고 사랑을 놓친 봄날이 피어나네
정운희 시인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뒤 돌아 보는 사이, 서로는 꽃을 꺾거나 죽음을 맞이하고 잡은 손을 놓치기도 한다
계단을 거쳐 지상으로 올라오는 동안 다섯 살의 아들이 사라졌다 아들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는데 없다 행인들은 서로를 모른 체 빗겨가고 술래의 감은 눈 속으로 바람을 불어 넣었다 벼락 맞은 시 공간에 풀이 자라고 나비가 날아들까 잡은 손을 놓치고 허공을 걷는 사이 무궁화 꽃은 피지 않았다
무궁화 꽃은 시간을 멈추고 딱딱한 공기가 되었다
아이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어디고 간다 낯선 공간을 들여다본 적 없어 새로운 그림카드를 맞춰가듯 자신에게 집중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길의 품은 넉넉하고 아이는 하나의 점으로 흡수된다 이탈한 퍼즐 한 조각이 구름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술래가 돌아서서 무궁화 꽃을 피우는 사이,
따듯한 밥이 놓인 식탁 밑으로 발이 모아지고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푸른 햇살이 내려와 있다 열손가락이 도레미 송을 부르며 우는 아이를 달래고 열매를 맺기도 하고 그 달콤한 감각에 걸려들기도 한다
스무 살이 된 아이는 광장의 시계탑 밑에서 목이 긴 수많은 애인들의 입술을 훔치고 있다
ㅡ 2010년 계간 《시에》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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