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만섭 시인 / 파적도(破寂圖)를 보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3. 08:00
이만섭 시인 / 파적도(破寂圖)를 보다

이만섭 시인 / 파적도(破寂圖)를 보다

 

 

적요의 한낮이 황급하다

 

복사꽃 만개한 뜨락에

화들짝 고요를 깨뜨리고 달아나는

검은 고양이의 눈빛,

 

봄이라야 오는 봄으로 치자면

저 혼비백산에도

버선발로 쫓아가는 노구의 몸은

한갓 꽃이 피는 줄만 알았겠지

 

바람이 아니어도

철없이우듬지를 꺾고 가는

어처구니없이 속는 봄날이 야속하다

 

쩌억,대를가르듯

한바탕파적으로깨어나는 봄은

어찌 그르침만일까,

 

*파적도: 긍제 김득신의 그림

 

 


 

 

이만섭 시인 / 가을산

 

 

푸른 날들이 깊어지면

수목은 등걸에 이끼를 피워내고

이파리마다 紋章을 색인한다

추억이란 반드시 한곳으로 모이는 거라고,

그리하여 더욱 투명해진 그리움으로

가슴에도 산 하나 우뚝 세운다

 

그대, 꽃이 진다고 서러워하던 때가 있었던가.

뒤따라 나선 푸름도 어느덧

골짜기마다 산그늘 비켜 세우고

저리도 숨죽여 메말라가는데

다시 꽃 때를 찾아왔구나,

 

그대와 나의 거리가

혹여 붕새의 날갯짓만이 헤아린다해도

추억 저편의 향기를 어찌 무심히 지나치리,

지느러미 같던 등뼈는 굳어갈지라도

가슴에 들끓던 열망의 아우성은

탁본처럼 종이의 배면을 물들고

유폐된 옛사랑의 오솔길을 열고 오느니

 

그대와 내가 간직한 그리움마저

먼산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이만섭 시인 / 실밥

 

 

허름한 옷에서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난다

한 몸 가리어 풍상을 견디다 보니

타개진 솔기 사이에서 앵돌아 나오는 밥,

기제사에 메를 짓고 내오듯

밥은 끈기 잃어 퍼석퍼석하다

그간 옷은 말 못할 거식증에 시달린 것일까,

육감적으로 부끄러운 표정이다

몸의 접경지대에서 오랜 세월 부지하며

어미의 탯줄 같은 실을 빌어 옷을 먹여 살리더니

이제 저렇게 고스레처럼 문 밖에 내놓는다

산목숨인들 밥 거두면 그만일 진데

아무리 옷인들 아니 그럴까,

세월마당에 낡아진 옷이

실밥을 지어놓고 도대체 후줄그레하다

 

 


 

 

이만섭 시인 / 나무의 詩

 

 

숲길을 지나다니면서도

나무 아래를 걸어다니면서도

여태껏 몰랐던 것이 있다

나무와 나무가 이루고 있는 간격이

한 편의 시라는 사실을,

나무는 서로 비켜 자라며 바람에 흔들려도

한결같이 나무만의 개성 있는시를 쓰고 있다

멀리서나 지근거리에서나

가지마다 잎마다 팔을 벌려 관계하는 사이를

하나의 문장의 행간으로 마음 나누며

씨줄과 날줄로 짜여도

솔기마다 부딪힘이 없이 매듭짓는 피륙처럼

서로 물 스미듯 가지런히 닿아있다

관계로 놓인다는 것은

서로 사이에 조화로움을 갖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가 그들 사이를

시처럼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이만섭 시인 / 생의 저녁에 깃드는 불빛은

 

 

가끔은, 아주 가끔은

생의 저녁이

일상의 것보다 더 극명했으면 좋겠어

 

노을이라면 화염처럼 붉게

서녘 하늘을 태우는

매우 극사실적인 채색이면 더욱 좋겠어

 

하루가 지났다고

할 수 없이 오는 저녁이 아닌,

네모난 창에 갇혀

겨우 천정에 매달린 알전구나 켜는

이기적인 저녁이 아닌,

 

주렴 같은 어둠을 헤집고 뜨는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으로부터 호명되듯이 깃드는,

 

그런 저녁은 생각만 해도

자분자분 웅숭깊다

 

 


 

 

이만섭 시인 / 오래된 서가(書架)

 

 

먼지 수북이 뒤집어쓴 채

케케묵은 책들의 색인번호를 다시 쓴다

빛바랜 표지를 뒤적일 때마다

세월에 짓눌린 활자들의 비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좀 먹은자국에서는

볼모로 잡혀온 세월을 탓하듯 눈을 흘기고

오랫동안 방치된 까닭인지

사상도 사라진 무정부주의자처럼

주인의명령에도 저항한다

손에 닿지 않은 그늘에 갇혀

풍장을 치르듯 적멸에 든 책들에

빛을 쏘이고바람을 불어넣으려

부스럭부스럭 손끝에 올려보는 책장 소리

위편(韋編)*을 흉내 내는

내 위험한 독서

 

* 위편삼절

 

 


 

 

이만섭 시인 / 풍경이 길을 만든다

 

 

굽은 길을 생각한다

당착에 빠진 길도 길이었다

협착과 구릉 사이를 지나서도

길은 언제나 풍경을 찾아다녔다

때로 아주 멀리

발길 닿지 않은 곳까지 가서

입때까지 감춘 모습을 찾아내고 풍경을 익힌다

발에 밟힌 들풀들도 누웠다가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는다

바람이잦아드는 빈터의 길이나

산그늘 사이에 나있는 호젓한 산길이나

산, 내, 들, 강, 호수,

물가에서 갈대를 날리는 높새며

다 길의 행방에서 자취를 보인다

삶의 행여에 오른 길 저편

어디에도 변함없이 풍경은 기다린다

길에서 멀어질수록 삶은 아득해지고

길은 매번 그 사용법을 일러준다

풍경이 길을 만든다

 

 


 

이만섭 시인

1954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201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5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