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희 시인 / 애기사과 꽃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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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 시인 / 애기사과 꽃
서로에게 기대어 더 붉어지는 하루가 있다 말은 하얀 마음일 때 물들기 시작하고 눈빛은 서로의 동공에 터를 잡아야 익어간다 함께 있어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커지는 햇볕에 그은 웃음만이 작은 그늘을 녹이고 둥글게 자란다 꽃이 꽃을 버릴 때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앞마당에 소란스레 잔치를 벌인 꽃들 향긋한 속살 펄럭이며 작은 어깨 들썩이며 잇몸 붉은 잔을 기울이고 있다
-시집 <자오선을 지날 때는 몸살을 앓는다>에서
김미희 시인 / 모래시계
빤히 들여다보이는 속 확 뒤집는다고 왈칵 쏟아지는 시간 아니다
요리조리 뒤집어도 모래는 한 알씩 결국은 공허를 용납하기 위해 아래로부터 쌓이는 시간의 입자들이 갇혀 저만한 우주 안에서 저만한 낮은 음역을 저만하게 낮도록 두지 못한 채 저만의 속도로 공간을 파내고 저만한 크기로 메워야 하는 모래 한 알만 한 가치의 질긴 노역은 아무리 엿 보아도 오르내리며 화약 냄새를 고루 바르고 있는 음모다
쉽게 뒤집히고 가볍게 쏟아지는 저도 영문을 모른다는 시늉으로 살금살금 가는 모래바람을 압축하며 그 음역 쉴 새 없이 뒤집어야 유지되는 무한의 크기 생각은 생각을 파먹다 갉아버린 높낮이
저를 풀어놓은 곳에 저를 모으고 마지막 한 알의 존재가 다시 정상을 점하는 순간 조종간은 다시 유한의 한계를 넘기 위해 저를 가라앉히지만 단 한 번의 예리한 파음(破音)을 꿈꾸는 음모를 우리는 품는 것이다
공백의 탈출은 음역에서 이루어져 저마다 제 크기만 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김미희 시인 / 유리
광년의 세월만으로는 있으면서도 없는 없으면서도 있는 투시의 존재에 이르지 못한다
없는 줄 알고 있는 줄 알면서도 부딪히고 있는 모래바람 지금도 와 닿기만 하는 끊임없는 기억의 아픔일 뿐이다
뜨겁게 녹아져야 다시 일어나 닮아지는 투시 담아지는 포옹 드디어 나는 없고 하나인 너와 나
맑다
- 계간 《시마(詩魔)》 제16호(2023년 여름)
김미희 시인 / 세월이란 거 객쩍은 소리 하며 한잔하고 들어와 보니 빼꼼이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텀벙 잠에 빠진 그가 보이데요 세월이란 거, 그거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질게 흔들고 간 태풍 같았어요 생뚱맞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머리맡에 서서 숭숭한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휙 돌아누우면서 몸을 가재처럼 웅크리데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더라고요 큰아들 백일 사진 품고 역마살을 쌍으로 가진 마누라 찾아 달라스 공항에 내릴 때는 햇빛에 잘 익어가던 탱탱한 빨간 사과였는데 그 모습은 간데없고 나무에서 내쳐져 구석에서 시들어가는 쪼글쪼글해진 벌레 먹은 사과가 심한 폭우에 몸을 숨기려고 이불 틈에 끼어 있었어요 가슴이 마구 저리데요 자세히 보니 검은 꽃이 피기 시작하더라고요 머지않아 상실해버릴 거라고 생각하니 막 안아주고 싶데요 세월이란 거, 그거 사람을 가마솥에 끓이다가 엿처럼 졸이다가 결국엔 작은 점으로 만드는 마술인가 봐요 눈물이 나데요
김미희 시인 / 풍경 소리
바람 없이는 그 무엇도 울지 못한다는데 풍경이 운다 뒤꼍 배롱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온몸이 운다 빛을 쫓다 허기져 돌아와 방구석에 처박힌 걸레처럼 갈래갈래 나누인 기억의 몸짓에 아직 무게를 갖지 못한 시어로 몸짓을 바꿔가며 돌아눕는 밤 다 비워져 비로소 가벼워진 무심의 빈속이 운다 가슴은 이렇게 바람 없이도 댕그랑 댕그랑 그대 닿지 못하는 울음을 울고 있다
- 계간 시마(제7호, 2020.3)
김미희 시인 / 자오선을 지날 때는 몸살을 앓는다 자오선을 지날 때는 냉골 흐르는 왼쪽 가슴이 잎보다 먼저 핀 꽃으로 차디찬 작두날에 얹힌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섬뜩하기만 한 진공 속을 빠져나가 너를 찾아야 하는데 시간의 검은 망토에는 이미 너의 조각 난 그림자들이 검붉은 꽃이었다가 목이 잘린 꽃들의 말라붙은 핏자국인 그저 착시이기만을 바라는 어둠이다 아직 선 저쪽에서는 너의 잘린 몸통 쪽의 기진한 기척 있어 너를 펄펄 끓고 있는 나는 잠시 네 오른팔에 누웠던 기억 하나로 바늘구멍을 찾는다
김미희 시인 / 항해 오래된 사 층짜리 여관 지붕 위 하루치의 순항을 나서기 전에 바람의 일정을 더듬는지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사내가 움찔거린다 인력시장에서 뽑혀온 날품들이 바람의 조준을 피하여 경사진 갑판에 무릎을 박고 노를 젓기 시작한다 한 세기의 차고 음습한 바람을 담고 있던 옹관甕棺의 뚜껑이 열린다 정박하지 못한 이들의 짠 내로 녹이 슨 지붕을 걷어내고 있다 제 등에 겹겹이 들러붙은 가난을 뜯어내고 있다 바람을 잡는다는 건 흔들릴 수밖에 없는 법 놉 일에 달구어진 팔로 바람의 가지를 쳐내며 순풍을 꿈꾸는 미생들 덫에 걸린 짐승이 되어 물러서지 않으리라고 바닥에 매달려 버텨보지만 아무 때나 몰아치는 아리고 매운 북풍으로 기울어진 땅에 내린 뿌리는 늘 한쪽 발이 시리다 가슴 깊이 담아온 아메리칸 드림은 제 늑골 어디쯤에서 풍화된 지 오래고 날이 저물기 전 불빛 찰랑대는 섬에 닿을 수 있을지
김미희 시인 / 신발 수선집 그 남자 부채꼴 모양의 뒷문 없는 성 그는 등 돌리고 앉아 신발 굽을 뜯고 있다 잉카제국의 후예답게 허물어진 한 부족의 신을 일으키고 있다 밑창까지 내주고도 중심은 잃지 않으려 뒤축을 채운 나이테 삶의 궤적을 보며 떠올리리라 몇 겹의 국경을 넘어오던 고무 탄내 나던 그 밤을 기어코 찾고 말리라 거친 숨을 삼키며 떠올렸을 전사들의 말발굽 소리를 어디서든 삼천 개의 계단만 오르면 마추픽추 성에 닿으리라고 믿었던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끌어안고 홀로 견뎌야 했을 허기진 수많은 밤을 기도하듯 지문도 없는 손으로 본드를 칠하고 구두약을 바르고 가끔은 테킬라로 삭혀 낸 침을 뱉어 공들여 광을 낸다 밑바닥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힘을 실어 줄 길이 되어 줄 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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