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태수 시인 / 아침햇살처럼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4. 08:00
이태수 시인 / 아침햇살처럼

이태수 시인 / 아침햇살처럼

 

 

새였으면 좋겠어"

 

새였으면 좋겠어. 지금의 내가 아니라

 

전생의 내가 아니라, 길짐승이 아니라

 

옥빛 하늘 아득히 날개를 퍼덕이는,

마음 가는 데로 날아오르고 내리는

새였으면 좋겠어.  

 

때가 되면 잎을 내밀고

꽃을 터뜨리지만, 제자리에만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 아니라, 걸을 수는 있지만

 

날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몸에도

 

마음에도 퍼덕이는 날개를 달고 있는

새였으면 좋겠어.  

 

그런 한 마리 새가 되어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는, 동도 서도 없이

 

저쪽이 이쪽이 되고, 북쪽이 남쪽이 되는

 

그런 세상을 한없이 드나들고 오르내리는

 

나는 하염없이 꿈꾸는 풀, 아니면 나무

 

아니면, 길짐승이나 전생의 나, 아니면

 

지금의 나도 아니라, 새였으면 좋겠어.

 

언제까지나 아득한 허공에 날개를 퍼덕이는,

 

 


 

 

이태수 시인 / 덧없이

 

 

멀리도 온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제자리걸음 같다

가도 가도 거기가 거기다

 

반세기에다 스물다섯 해

구부러지고 이지러진 길

 

돌아보면 그런 무명 길을

속절없이 떠돌고 헤매온 것일까

미망의 꿈결 같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간다

다시 돌아온 봄날

아지랑이 저 너머로 가보려고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간다

 

거기가 거기라고 알아도 간다

꽃이 피고 이내 지고

흐리다 개다가 다시 흐려지는

이 풍진세상 길을

나는 덧없이 오늘도 간다

 

 


 

 

이태수 시인 / 차의 속도를 붙이다가

차의 속도를 붙이다가 문득

기계는 무섭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고장이 나지 않는 한

기계는 정직하기 때문에. 정직한 건

무섭다는 생각을 굴리면서

차의 속도를 줄이다가

정직하지 않은 것은 더욱 무섭다는 생각과

마주친다. 날이 갈수록 이지러지면서도

이즈음은 결벽증이 농도를 더하고 있음을,

이 세상이 점점 더 뒤틀리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급커브를 꺾는다. 차는 정직하게

급커브를 돈다. 세상에는 뒷문도 있고,

사람들이 이따금 안개 너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도 정직한 건 무섭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정직하지 않은 것은

더욱 무섭다는 생각을 떨굴 수가 없다.

차의 속도가 붙는 동안

고장이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갈 곳이 없으면서도 달리고 또 달리면서

나는 그 아슬아슬하고 풀리지 않는

거짓말 사이에 말뚝을 박는다.

차의 갖가지 부품들이 하얀 눈을 뜨고

내 생각의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시집 『꿈속의 사닥다리』에서

 

 


 

 

이태수 시인 / 산딸나무

 

 

집을 나설 때마다 마주치는 산딸나무,

계절 따라 몇 차례 몸을 바꿔도

느낌은 언제나 그대로다

 

사람의 아들 예수와 산딸나무 십자가,

그 기막힌 골고다 언덕의 사연 때문일까

귀가 때도 어김없이 나를 굽어보는 산딸나무

 

늦봄에 흰 십자가 꽃잎턱에 맺히던 열매는

어느덧 영글어 검붉은 핏빛,

잎사귀들도 붉게 물들었다

 

산딸나무 꽃은 왜 꽃이 아니고

열매를 받치는 십자가 모양의 꽃잎턱일까

잎도 열매도 때 되면 성혈처럼 붉어지는 걸까

 

꽃피우기보다 오직 열매를 받치기 위한

꽃잎, 그 받들어진 열매 빛깔 따라

붉게 타오르다 지고야 마는 잎들

 

집을 나서거나 돌아올 때마다

나보다 먼저 나를 굽어보는 산딸나무,

단풍도 열매도 이젠 다 비워내려 하고 있다

 

 


 

 

이태수 시인 / 새장 안의 새

 

 

새장 안의 새가 창살을 쪼아댄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부딪는다

 

방에 갇혀 있는 나는

 

하늘을 날지 못하는 새와

 

무엇이 어찌 다를까

 

하늘로 비상하려 고투하는 새를

 

나는 유리 벽 안에 갇혀 바라본다

 

 


 

 

이태수 시인 / 옛 우물

 

 

나무 그림자 일렁이는 우물에

작은 새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간다

희미한 낮달도 얼굴 비쳐보다 간다

 

이제 아무도 두레박질을 하지 않는 우물을

하늘이 언제나 내려다본다

내가 들여다보면

나무 그림자와 안 보이는

새 그림자와 지워진 낮달이 나를 쳐다본다

 

흐르는 구름에 내 얼굴이 포개진다

옛날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던 물맛이

괸 물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이태수 시인 / 바다 이불

 

 

노을은 바다의 무늬 고운 이불일까

 

수평선에 조금 걸려 있던 해가

그 이불을 끌어당겨 뒤집어쓴 것일까

 

달이 뜨고 별들이 흩어져 앉아,

더러는 이마 맞대고 서서 깜박이면서

 

그 이불 무늬를 바꾸어 놓는다

 

해가 수평선 너머에서 잠자는 동안은

달과 별들이 바다 이불의 무늬,

 

바다와 해의 꿈결이라고 해도 될까

 

 


 

이태수(李太洙) 시인

1947년 경북 의성 출생. 대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림자의 그늘』 『우울한 비상의 꿈』 『물 속의 푸른 방』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 『꿈속의 사닥다리』  『그의 집은 둥글다』 『안동 시편』 『내 마음의 풍란』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 『회화나무 그늘』 등. 대구시문화상(문학)과 동서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대구예술대상 수상. 매일신문 논설주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