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미 시인 / 할머니뼈다귀해장국집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4. 08:00
정미 시인 / 할머니뼈다귀해장국집

정미 시인 / 할머니뼈다귀해장국집

 

 

뼈다귀해장국집 앞을 지날 때

무쇠가마솥에서 노파의 손짓이 솟아올랐다

 

처음엔 그것이 어떤 신호인 줄 몰랐다 그저 찾아오는

허기거나 노파의 빗자루에 쓸리던 푸념이려니 생각했다

 

골목길 가로등을 지나면 떠 있는 붉은 글씨

할머니뼈다귀해장국 간판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키 작고 깡마른 할머니가 거기에 서 있었다

 

시간을 잡아 틀고 역사를 각 뜨고 있었다

핢너니의 비트는 힘이 허연 뼈다귀로 버둥거렸다

 

달려가 말리려 하면 할머니는 간데없고

커다란 가마솥에 김만 무성했다 그런 저녁이면

해장국집 앞에서 내 팔다리를 만져보곤 했는데

기침하는 할머니의 뼈들이 욱신거렸다

 

불현듯 해장국집 노파가 나와 가마솥 뚜껑을 닫으면

멀리 평화비 늙은 소녀의 맨발이 통점으로 깜박거리곤 했다

 

-시집 『우리가 우리를 스쳐갈 때』에서

 

 


 

 

정미 시인 / 무적

 

 

 사막이 펄럭이면 벌떡 일어나요 뛰어가요 죽은 잡목과 엉켜서 옷자락 휘날리며 춤춰요 춤사위는 매번 다르지만, 가 닿지 못한 비닐봉지인 내 체념이 다른 세계로 향할 때 온몸이 뒤틀린 듯 꽃으로 변신한 듯 바람결 따라 막춤을 추다가 널브러져 잠들어요

 

 당신과 손잡았던 기억은, 무언가를 쑤셔 넣었다가 토해낸 악천후예요 당신의 손가락을 이상향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라 믿었는데, 누구에게나 쉽게도 여닫히는 봉지의 출구는 개미지옥을 감춰둔 사막이 분명하죠 덤프트럭의 악다구니에 퉁겨진 비닐들의 막장,

 

 이곳을 무도회장이라고 부르며 회오리쳐 오르는 비닐꽃 되어 탱고를 출래요 무대에 한 트럭의 비닐 더미가 내리쳐질 때마다 우리들의 찢어진 치맛자락들이 나뒹구는 여긴, 너무나 멀어서 당신조차 희미한 사막의 일이겠죠? 그러니 당신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그만 놓아도 좋아요

 

-월간 『모던포엠』 2023년 8월호 발표

 

 


 

 

정미 시인 / 가시엉겅퀴

ㅡ차도르여 안녕

 

 

 평생 빈약한 연민을 키우느라 세월을 탕진했다, 이제 나는 겨우 가시엉겅퀴

가시로 자존을 지탱한지라 세상과 소통하는지라

 바람결이 좋다가도 싫고 싫다가도 좋다, 간혹 꽂히는

 먼 나라의 나비날갯짓에 신경 곤두세우는 전사로 꼿꼿이 늙어갈지도 모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차도르의 말과 시위자들의 격앙된 숨소리와 발소리,

 보이는 안과 보이지 않는 바깥 사이에서 불붙은 이국의 뉴스에 눈살을 날린다

 

 종교의 위태로운 편향을 지나 테헤란의 광장을 지나 불타는 차도르를 지나

엄한 율법의 굴레를 뛰쳐나온 나는

 번뜩이는 햇살독기로 치켜세운, 살갗에 솟은 가시로 날카로운 숨을 몰아쉰다

 그곳엔 있으나 마나한 한숨으로 헛바퀴를 돌리겠지만

 

 나비날갯짓에서 쏟아진 것은 그들의 눈빛, 차도르의 안과 밖은 핏빛 신앙, 부글부글 끓는 눈물이 접점으로 내 꽃방에 배어서 가시를 키운다 품을 수 없는 것들이 모여 뾰족한 분노가 되는 것, 차도르가 세상을 덮칠수록 함께 타는 분신으로 비로소,

 

-계간 『시인정신』 2022년 가을호 발표

 

 


 

 

정미 시인 / 영혼처럼

 

 

오후 세 시를 가르는 노래는 셔츠단추 두 개가 풀렸다

 

바람에 비비적대는 차창 밖의 풍경들

나무들은 몸의 먼지를 털어대고

꽃들은 쪼그려 앉아 머리를 묶었다 풀기를 반복한다

 

소슬한 허공에서 새털구름을 가위질하는 바람들

툭 툭 잘리어 바다 위로 쓰러지는 주홍빛 구름들

파도는 손톱발톱을 세워 모래사장을 잘라댄다

 

잘리기 위해 자라거나 계속 자라기 위해

가르는 풍경들의 손톱 깎기, 고양이의 손톱발톱 같은

 

햇발이 가닥가닥 빗금 긋는 바닷가의 차창

너머로 보얀 구름커튼 사이의 잡티 하나

 

차창에 묻은 티끌일까 손바닥으로 훑다가 손톱으로 긁다가

손톱 위에 뜬 낮달을 자르다보니 아뜩한 하늘에

아, 숨어 사는 영혼처럼 날고 있는 한 마리 새였다

 

포옹해주지 못한 하루와도 손톱발톱 같은 관계라서, 늘

셔츠단추 한번 제대로 채워주지 못한 채 헤어졌다

통점을 온 힘으로 밀고 절단하는 방식으로

 

잘라도 잘려도

집요하게 오늘이라는 새만 자라다가 날아가고는 했다

 

-월간 『모던포엠』 2022년 9월호 발표

 

 


 

 

정미 시인 / 비 내리고

 

 

우산이 운다

찢어진 하늘처럼 쫙쫙

갈라터진 시멘트 길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그치지 않고 우산이 운다

오래 우는 우산의 등짝 끝에서 길이 끊긴다

주욱 그어 내린 낭떠러지다

외마디 곡이 들려온다

검은 우산이 주저앉은 이유일까

머리꼭지에서 등짝벼랑으로 한 발씩 내디딘 울음

내리꽂히는 길바닥까지

갈라진 틈새 가맣다

그 어떤 낙담이 저기에 꿇어앉은 걸까

비를 업고 컴컴한 제 안의 울음통을 터뜨리는

투두둑 튀어 오르는 눈물의 뼛조각들

다 떠내려가도록

우산이 전신을 떨며 운다

절벽 까무룩히

 

-시집 『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 2021 상상인시선

 

 


 

 

정미 시인 / 눈에게로 가는 사람

마당을 찾아온 눈의 시간을 읽는다

​허공과 땅으로 펼쳐진 눈동자와

​검은 소요 아래로 젖어든 시선들을 헤아린다

​눈빛과 소요가 하얗게 엉겨 붙는 오후

​자라나는 번빈처럼

​눈보라 웅성거린다

​내가 흐르기 전에 꽝꽝 얼음이 되는 고체눈물

​눈빛이 스러진다

​회한이 나를 덮쳐 시간의 무덤이 되곤 한다

​지상에서 반쯤 지워진 나는

​이름을 절반쯤 잊어버렸지만

​아곳에서 얼음동상으로 마냥 서 있을 수도 없다

​무럭무럭 시산이 늙어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미아처럼 시간이 길을 잃었을 때

​한 사람을 품었다가

​한 사람으로 줄줄 녹아내리기도 한다

​​

-시집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 (상상인, 2021)

 

 


 

 

정미 시인 / 이별밥

 복을 먹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복집에서 살기로 합니다 그 때문이었죠 불현 듯 퍼붓는 폭우 속에서 헤엄치고 싶다거나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복어의 뻐끔뻐끔을 알아듣고 싶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죠 뜬금없이 그는, 복이 곧 독이라 하면서, 죽음의 경계까지 갔었다는 말을 느릿느릿하면서, 복어가 돼보기로 한 걸까요 유리창을 맹렬히 때려대는 빗방울을 바라보지 않았어야 했을까요 그랬다면 배불뚝이를 삼킬 수 있었을까요 복어는 늘 무언의 말을 하죠 독이고 나발이고 복이나 먹고 싶었는데 돌연, 그가 이별밥이라 합니다 복의 편린을 먹는 그는 볼록 배를 갖고도 무엇도 담지 않은 밥공기입니다 늘 부푸는 게 복어의 혈통이므로 커다란 수족관을 복어의 집이라 믿고 싶습니다만, 복과 집을 나눠도 복을 대접한 그의 이별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오리무중의 죽음을 들은 식당에서 묵묵히 머물다 사라지는 복어가 되어버린듯이요 그러므로 독은 복의 밥입니다 복과 독이 공존하는 복집이 그의 기거공간이죠 난독성의 삶과 비통의 복 사이에 집을 지은 그가 까마득한 혼잣말을 합니다 공기 방울을 말주머니라 여기니 그가 대접한 복이 고봉밥이 됩니다 매끼가 생이고 누구나 눈앞의 밥이 마지막이고 한 생의 내력이 된다는 그의 말이 부풉니다 지금도 비는 치명적으로 쏟아지고 비로소 나는 복을 먹습니다 독이 되거나 복으로 스밉니다 독은 늘 가면을 쓰고 있죠 알 수 없는 복의 속내, by

​​

-계간 『시와산문』 (2023년 가을호)

 

 


 

 

정미 시인 / 잠자리 혹은 잠:자리

 

 당신 어제 그제도 술타령이더니 애들 얼굴 보기 미안하지도 않아요 난 몰라 간밤에 작은 애가 아빠 얼굴 잊어버렸대 저리 가 왜 이렇게 들러붙는 거야 아유 마늘냄새 파냄새 술 짜증 나, 저리 가라니깐 너, 아버지가 결혼 반대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애들 때문에 난 몰라 먼 대수야 물러 내일 법원에 가자 지난번처럼 바쁘다고 해봐라 일어나 발은 씻고 자야 할 게 아냐 애들은 자 아유 무거워 이리 좀 와봐 저 잠자리

 노을빛을 무드 조명으로 아는지

 창문가 커튼 끝자락에서

 잠자리 두 마리가 찰싹

 엉겨 붙어

 천연스레 일을 벌이고 있다

 마치 한마리인 것처럼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없어서

 툭툭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보고

 다른 곳에 옮겨 놓아도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글쎄 내가 마시고 싶어 마시나 세상이 술을 붓는 걸 당신 고상한 지능은 싸나이들 술 마시는 이유자알 알 텐데 이리와 내 얼굴 찍어봐 다 니가 이뻐서 그렇지 이게 사람 냄새라고 날 좋아했잖아 제엔장 니도 나한테 너라고 그랬짢아 지금도 늦지 않아 물러, 애들이 먼 대수야 내일은 절대루 안 바쁘지 회사도 훅 날려버릴 거야 뜨거운 입김으로 한가해질-아냐 애들은 알았고 이리 와 자자 여기 펼쳐졌잖아 잠:자리

​-시집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 (상상인, 2021)

 

 


 

정미 시인

경기도 안양 출생. 본명: 정미경.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전공. 200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스쳐 갈 때』.  장편동화 『이대로도 괜찮아』 『공룡 때문이야!』 등. 청소년 장편소설 『마음먹다』(공저) 등. 2009년 아테나 아동문학상 대상 수상. 2013년 경기도문학상 아동소설 부문, 양평예술대상, 2018년 한국문학비평가회 작가상 수상 및 창작지원금 다수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