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 시인 / 기름 짜는 장인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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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 시인 / 기름 짜는 장인
뜨거운 깨를 포옹하며 사랑은 도착 모정에 안겨 등을 토닥여 재운다 숙명은 견우직녀의 이별가 채움과 비움의 끝없는 결투 속에 장인의 삶으로 포복한다 오십 년의 신사답게 전설을 걸치고 이슬이 된 향기 만세 부르며 성스러운 황금빛 유향으로 찾아온다
최인숙 시인 / 풋 밤
밤꽃향 대포로 쐈는가 온사방 구석구석 헤맨다 풋밤을 보채시던 어머니 기다림의 미학을 잊으셨나보다 딸년이 있어 좋은데 넌 어쩌냐 벽에 붙은 사진 그리운 부재중이다 작은 위성들 거룩함 매달고 장침으로 성을 쌓고 새벽녘 보물찾는 손에 인생 소설의 단맛을 준다 풋송이 회소리에 멍들고 닫혀진 입 열어준다 가죽 치마 속 푸른구슬들 내살 먹고 울지마라 하네 때는 철을 알고 들이닥치는데 어머니 글자는 박힌 가시같구나.
<23년 봄호(46기) 등단작품>
최인숙 시인 / 참 오래된 희망
언 강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강에 배를 띄웁니다 배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배 위에서 노를 젓고 있습니다 얼음 밑 깊은 곳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바람이 붑니다 돛을 올립니다 보이지 않는 배가 서늘하게 출렁거립니다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도 배는 보이지 않습니다 흐르지 않는 강 위에 배를 띄우고 돛을 올리고 나는 노를 젓습니다 버들강아지가 내 등을 밀어줄 때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다가옵니다 깨져서 흐르는 소리가 바닥 깊숙이 상처를 내며 긴 꼬리를 달고 흐릅니다
최인숙 시인 / 거짓말
바쁘다고 했다. 그럴 수 있겠지. 너무 멀리 있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지. 힘들면 잊자고 한다. 그래!
최인숙 시인 / 나의 바람이 너의 등 뒤에
당신과 나는 너무 오래 만났어요.
내가 불이었을 때 물이었던 당신
내가 나무였을 때 바람이었던 당신
순간에 멈춘 우리랑 달리 꽃은 피고 나무는 허공으로 가지를 뻗었지요.
너무 오래 생각만으로 집을 지었어요.
어디에도 멈추지 못하는 나그네처럼 꽃의 안쪽이거나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뒤에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이번 생에도 언젠가 한 번은 스칠 테니까
최인숙 시인 / 팝콘
뜨겁게 뒹굴어야 꽃이 되는 폭립종 단단하고 냉정한 성격을 가졌다 웅크리고 있을 때는 소심해 보이지만 그럴 때마다 몸 뒤척이며 반전 준비 나는 내가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다 불안하다는 것은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인데 허공에 높이 오를수록 내 불안은 한 번 더 흔들린다 나는 뿌리 자른 꽃을 피운다 비명을 지르며 탈피의 순간을 맞는다 뒤집힌 나는 참을성도 없다 밋밋한 입술을 보면 참지 못하고 뭉텅 뛰어들어 안긴다 나의 관능이 하얗게 부서질 때까지
최인숙 시인 / 너 때문인 줄도 모르고
꽃이 피어서 좋은 줄 알았다
커피가 향기로워서 좋은 줄 알았다
너 때문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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