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세영 시인 / 젖은 첼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4. 08:00
김세영 시인 / 젖은 첼로

김세영 시인 / 젖은 첼로

 

 

안개의 주정酒精을 밤새 마셔

만취된 깃털의 날개로

심해어처럼 유영한다

심저의 음자리 C2 현 위로

안단테의 보폭으로

 

흉통을 움켜쥔 손으로

아프게 두드려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던

심장의 방문들을 이제사

모두 열어 보인다

 

손금처럼 잔잔히 갈라지는

거울 검색대 위에

검은 피톨들, 엉킨 피딱지들을

모두 내어 놓는다

 

텅 비어버린 울림통의 결을

바람의 손끝이 짚어가며 소리를 낸다

어릴 때, 귓불을 만져주던 우물 속 울림 같은

태아 때, 알몸을 휘감아주던 양수 속 해조 같은

혼령 때, 춤사위로 흐르던 파동 속 율려律呂 같은

 

 


 

 

김세영 시인 / 강

 

 

당신의 탯줄 속으로

스며드는 안개의 젖빛,

저 몽유의 숨소리

 

하상河床의 수초를 헤치고

뻗어가는 붉은 연어,

저 팽팽한 원형질

 

이제야 허물을 벗는

부드럽고 촉촉한 단전의 속살

저 농밀한 살풀이

저 끈적한 점액

 

몸짓에 감겨

꿈틀거리는, 파닥거리는

흰 세포들의 군무

 

팔랑이는 나비들

날갯짓에 출렁이는,

저 원류의 물소리

 

끝없이 흘러도, 다 호명할 수 없는

저 물결의 이름들

 

꿈속에서 보았던, 아득히 젖은

저 모성의 목소리!

 

 


 

 

김세영 시인 / 얼음골에서 견디다

 

 

적도의 심장이 화차처럼 이글거려도

내 몸이 녹아내리지 않는 것은

북해의 냉류가 등줄기를 냉각코일처럼 감고 내려와

골짜기에 얼음골을 이루고 있음이다

 

산짐승의 울음소리에 달뜨지 않는 것은

정수리 위 오로라의 서기瑞氣가

온몸을 감싸고 있음이다

 

열기의 박동소리가 능선의 나뭇잎을 흔들어도

뜨거운 핏물이 윗계곡의 바위를 달구어도

암반의 고드름은 흰 건반처럼 가지런하다

 

저물녘 암벽의 견고한 그림자로

골짜기 저수지의 얼음판 위로

별빛의 징소리를 내며 건너오고 있다

 

열대야의 밤에도 남극의 펭귄처럼

불면의 맨발로 빙판 위에 서서

몽당날개지만 파닥이며 그를 기다린다

 

 


 

 

김세영 시인 / 성소

 

 

1

사랑을 할 때는 죽림에 들어간다

미이라가 된, 첫사랑의 심장을 뚫고

죽순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그 파릇한 불꽃의 정점에서 뿜어 나오는

숨비소리, 그 가파른

수직의 소리에 흔들리는

댓잎의 끝에 서서

맹인 검객처럼 죽순을 자른다

 

매 순간의 절편들을 죽통에 채워서

폭죽을 쏘아 올려, 클레이 사격하듯

영원을 사냥한다.

 

2

이별을 할 때는 바닷가에 나간다

절단의 아픔을 숙명으로 사는

바다민달팽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잠시나마 함께 소유했던

살돌기 한 조각을 증표로 남긴다

 

부식되고 마모되어, 부표처럼 떠다니는

매 순간의 흔적들을 수평선에 꿰어

저 꼬치가 귀신고래의 흰 등뼈로 남을 때까지

 

내 심장의 새장이 수중 산호초가 될 때까지

썰물의 모래섬 위에 누워

독배毒杯를 든다.

 

 


 

 

김세영 시인 / 나미브의 양서류

 

 

바다와 사막,

그 끝없는 전선

바다의 파도는 모래를 밀어 올리고

사막의 바람은 모래를 쓸어 내린다

그 전선의 해안에

나미브의 양서류가 산다

 

아득한 시절

양수 속의 태아처럼 살았지만

아가미가 굳어

어깨뼈가 된 지 오래인지라

바다로 돌아갈 수 없다

 

새벽안개 속, 소수스플라이의

붉은 모래언덕 위의 스테노카라처럼

물구나무서지도 못한다

 

수십 개의 위버 새둥지를 품은

에보니 나무처럼 수십 미터 깊이

모래 속으로 뿌리내리지도 못한다

 

제의를 올리듯 앞발을 치켜들고

해 뜨는 수평선과

해 지는 사구의 능선을

방울눈으로 바라본다

 

축복처럼 비가 내려

잠시 황무지에 풀이 돋을 때,

페어리 서클 안에 들어가

그의 어깨뼈를 묻는다

바다와 사막이 함께 잠드는

태반 같은 무덤이 된다

 

 


 

 

김세영 시인 / 해우

 

 

공양소의 굴뚝 연기가, 흔들림 없이

수직으로 올라가는 것을 벽면의 창으로 본다

바람에 날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벼움으로 올라가는 것이리라

 

내 몸의 근심 한 덩이가, 농익은 홍시처럼

바닥의 창으로 수직으로 낙하하는 것을 듣는다

중력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거움으로 내려가는 것이리라

 

수직 상승하는 연기가 대침처럼 동공을 뚫고 들어와,

머플러처럼 용을 쓰는 항문까지 관통한 꼬치가 되어

내가 바베큐처럼 꿰여 버둥거린다

 

해우소의 공간을 공중부양 하듯 오르락내리락하는,

거미가 엄청난 먹잇감을 어리둥절 쳐다만 본다

 

해우 공양을 끝낸 빈 대장이 부레처럼 부풀어,

가뿐히 배앓이 없이 산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세영 시인 / 안단테 칸타빌레*

 

 

초승달로 돋아나서

잠자는 호수의 등을 밟고 가듯이

 

한 달을, 백 년을 걸려서 건너가듯

달맞이꽃 봉오리, 차오르고 이울어질 거야

 

동백이나 목련처럼

부푼 가슴살, 단칼에 도려내지 않고

 

밤마다 별리의 가슴앓이로

촛불처럼 조금씩 야위어져 갈 거야

 

달빛에 삭은 벼랑의 소나무,

천궁처럼 등뼈 휘어지게 하듯

 

정선아리랑 실은 동강의 거룻배,

첼로 활의 안단테 보폭으로

달빛 잠방이며, 강을 건너갈 거야

 

그믐달 실눈, 한 올만 남을 때까지

한 잎 한 잎. 천천히 야위어 가듯이

 

민들레 홀씨, 한 톨 한 톨 날려 보내 듯이

깨금발로 소리 없이 퇴장할 거야

 

극락강 건너가는 솜털구름처럼

노을의 바람에 실려, 안단테

아니. 아다지오의 보폭으로 사라질 거야

 

*"천천히 노래하듯이" 라는 음악용어이며,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현악4중주곡 제1번 D장조 작품번호 11)의 제2악장이기도 하다.

 

 


 

김세영 시인

1949년 부산에서 출생. (본명: 김영철). 2007년《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하늘거미집』 『강물은 속으로 흐른다』 『물구나무서다』가 있음. 계간 『시담』 편집인, 한국의사시인회 회장, 성균관의대 외래교수, 시산맥시회 고문,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인권위원. 제 9회 미네르바 작품상, 제 14회 한국문협 작가상, 김영철내과의원을 개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