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비담 시인 / 양파의 인식론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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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비담 시인 / 양파의 인식론
빛이 중첩된 정오 둥그런 중천은 간신히 툭 터지지 않는 희디흰 기분이었지
백색 실명에 걸린 수정체도 끝없는 착시로 지속되며 진실도착증을 앓는 눈물 같은 기분이었지
다 잠든 새벽 기분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우리라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누웠지
네 안에 꼭 맞는 눈이 없어 나는 걸핏하면 우리에서 미끄러진다. 미끄러진 나의 투명한 집중은 미끄러지는 나의 뿌연 물성에 골똘히 발각된다
깊이가 이해를 곰곰이 하얗게 한다는 느낌 생각에 들어있는 눈동자가 투명해진다는 느낌
탄생하는 순간 닫히는 숙명이 탄생하는 문 열리는 순간 닫히는 운명이 열리는 문
문은 거듭거듭 여는 벽이 되다가 만취한 이웃이 고래고래 질러대는 소리에 벽의 생각이 철거되다가
한 꺼풀씩 벗겨지는 한 뭉텅이 투명하고 아무도 없음
또 투명하고 뿌염
이해도 오해도 거짓도 진실도 그 어느 것도 아닌 것들과 그 어느 것도 아닌 것이라고도 볼 수 없는 왜소가 끝없이 까발려지며 열리는 문의 벽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그리스신화
전비담 시인 / 공중의 이월
그동안 도무지 무얼 쳐다보고 있었습니까
겨울 외투의 내부에 때 아닌 봄이 하르르 떨며 피지만 땟국 전 껍질을 벗어나질 않네 예의도 없이
달아나고 폐쇄되어 솟아 있었지
겨우내 정오의 음악이 고공에 몰려 있었다 목숨을 빌어다 썼으므로 삶처럼 찌직거렸지 저 장송곡의 희망 살도 죽도 않은 깃발이 창궐하며
앉아 있으면 으슬거리고 걸으면 식은땀이 났다
소란한 플랑 묵묵한 플랑 바람 부는 이월에 빨간 우산을 쓰고 갖은 플랑 앞에 작게 서 있었다
떠들던 말의 말할 소용을 혀 짧은 이월이 낚아채었으므로 입에 이어 귀를 걸어 잠글 때라 했다 그때도 벤츄레이터가 바람을 썰고 있었다
길흉의 패가 뒤섞인 공중을 그리며 까마귀 한떼 수군거리며 지나갔다 돈키호테의 창이 십자가 시늉을 한다고
주먹을 꽉 쥔 채 쪽이 팔린 낮을 저녁이면 어깨에 파묻고 유월을 넘어 일월이 지나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달력에서 변질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모르는 새 맹목에 반죽된 구호들 수요일에 정치공학처럼 비낀 비가 불어닥쳤고 고층 건물의 상점에는 몽땅 세일이 진열되었다
캄캄한 새의 깃털이 절룩이며 하강했다 바겐세일된 공중아 얼른 내려오렴
우리는 이제 공중의 멱살을 잡고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벗어날 우리가 되었습니다
더러워져서 벗어난다 각자의 방식으로 더러워지기 이전을 견뎌온 자의 특권으로
우리는 바람의 맛이 아니라 사람의 맛을 알았고 감정에 묻은 피를 닦아야 한다
까마귀의 징조가 툭, 떨어졌다 공중은 발치로 이월되었다
이제 허공이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볼 것이다 이게 공중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전비담 시인 / 그라인다드랍
고래를 잡고 있는 것이다 저 일몰 피를 흘리는 초록바다 시계탑을 튕겨나와 내리꽂는 붉은 작살
찢어발긴 바다가 어둠의 근육질로 굳어가고 우리는 날마다 시청 앞 잔디광장의 의식(儀式)을 분배받는다
스스로 부추겨 제물이 되는 초록의 붉은 파도 매캐하구나
각자의 번제 기름진 저녁을 뜯어먹으며 혁명할 줄 모르는 고래 고기 되지 시계의 사타구니를 기어다니는 한신이 되지
구호(口號)와 호구(粉口)의 저녁식탁 사이에 암청록 시민의 카니발 낭자하다
*그라인다드랍: 대서양 페로제도 뵈우르(Bur)와 르스하운(Trshavn) 해변에서 열리는 고래사냥 축제 *한신 : 중국 한(漢)나라 초의 무장.
전비담 시인 / 돌의 경전
예기치 않은 글자를 몰아쉬며 굴러간다. 다녀온 돌의 절벽을 만나러. 커다랗고 조그맣고 삐죽삐죽하고 이끼가 미끌거리는 바위길을 디디며 내려간다 발목에 물을 끌고. 올라가는 길은 뒤에 묻어 있고 누군가 와치유얼백! 하고 소리친다. 뒤돌아보는 일은 조심해야 하므로 뒤돌아보지 않고 내려간다. 왜 갑자기 누워버렸는지 모르게 누운 나무 한 그루를 본다. 잎새들로 칭칭 감겨 누운 새가 된 나무. 나무속에서 비어지는 초록색 몸을 보았으나 아무 짓 하지 않고 내려간다. 비어져 나오는 것은 무서워, 초록의 무자비란 그런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길게 끌고 온 제 몸을 끊고 벌떡 일어선 벼랑이 나타난다. 무모한 발목이 나타난다. 이곳의 끊김에서 저곳의 이어짐이 되는 발목. 어떤 발목을 신을까 고민하는 사이 구르던 돌이 멈춘다. 시간의 망부석이 생기는 순간. 길은 오래전에 멎었는데 아닌 척 여기까지 왔구나 절벽이 돌의 바닥을 접어올린다. 돌은 미리 다녀간 돌이 된 채 하염없이 앉아 다시 내려올 돌을 기다리고 있다. 아킬레스건을 죽죽 찢는 물소리가 흘러온다. 어디까지 가야 이 길이 길이 아니었단 것을 알게 될지 모르는 채
-『양주작가회의』 (2018년 상반기)
전비담 시인 / 나비를 따라 간 소년
부서진 구두통을 든 소년이 있었네 땅이 밀어낸 끝이 있었네
구정물의 희망이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 위에서 흰 나비가 둥둥 날고 있었네 ‘허연,주먹보다 약간 큰’나비 한 마리 날지 못하는 시조새처럼
허기진 소년은 바다로 갔네 나비는 멀리멀리 달아났네
소년의 퀭한 눈 속으로 뉘엿뉘엿 붉은 해가 지네 붉은 해를 삼킨 바다는 소년을 토해놓았네
이글거리는 소년은 바다의 끝으로 밀려나와 절조망을 넘었네 무언가에 이끌려
법과 질서와 규범과 훈계를 넘어 나비와 나비를 따라간 소년 자신을 넘어 주멱보다 큰 허연 양배추잎을 넘어 구두통을 넘어
노동법을 넘어 노동자를 넘어 풀들어 되돌아서지 않고 짓밟히며 이지러지며 추방되어
철조망의 매트릭스를 넘었네 바다가 삼킨 해를 살려내고 소년은 불타올랐네
오로지 인간을 만나보려고
전비담 시인 / 폭포
목이 아픈 하루가 지나간다 부풀어오른 말들이 부서진다
흩어지는 포말들이 나비의 날개를 적신다 젖은 날개가 햇빛을 접는다 비뚤어진 햇살은 진심을 불러 모으지 못한다
그 많던 말들 다 어디 갔나 물거품만 허둥거리는 허공
광장에 가지 못한 초대장이 접혀서 마른 침을 타고 성대의 내벽을 긁으며 굴러떨어진다 아픈 말의 살점들이 떨어져 푹푹 빠지는 바닥 그것을 심연이라 부른다
마침내 나비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텐데 신음에 젖은 진심들이 아직 무겁다
모래시계를 몇 번 더 뒤집고 얼마나 짙은 어둠에 닿으면 접혔던 것들은 화산구처럼 피어오를까
목이 아픈 하루가 지나가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날들이 뛰어내려 깊은 어둠 속으로 차곡차곡 당도한다
전비담 시인 / 골목에 다녀간 바람 한 장
그가 사라졌다. 원통할 것도 없다, 불빛 눈부신 이곳에서 그가 없어졌다고 골목이 축나진 않아, 그는 원래 없었다 해도 된다, 자기 빛에 눈이 먼 골목은 그를 보지 않았으니 그가 회전문을 지나듯 한 칸 한 칸 한 방향으로 떠밀려온 건, 짊어졌던 무게를 차례로 벗어놓으려 했던 거다, 돌아갈 허공을 위해 가벼워지려 했던 거다
지고 있던 보루박스 한 겹에다 마지막 남은 무게를 구겨넣고, 그는 거기서 꿈을 꾸었을까, 이것은 꿈이 벗어놓은 외투라 하는 게 맞다, 그의 꿈은 이곳에 주소지가 없다 그가 이곳에서 꿈을 풀어놓았을 거라 말하는 건 골목의 말, 꿈이란 바닥을 딛고 꾸는 거고 이런 건 그에게 원래 없는 감정, 비둘기의 깃털 하나가 공중에서 팔랑이듯 그는, 시간에 섞여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눈꺼풀을 닫고 돌아선 골목에서 누가 서늘하게 걸어 나온다, 그는 슬쩍 골판지의 한 귀퉁이를 들추더니, 나뒹구는 검은 비닐봉지 한 장을 주워들고 모퉁이를 돌아나간다, 그의 표정이 얇고 평평 하다는 것도 골목의 구차한 변명
봐, 그가 사라진 후에도 그를 담았던 외투는, 한 방향으로 걷는 골목의 뒤축에 밟혀 까맣게 으스러지고 있잖아, 골목은 여전히 눈감은 채 걸어가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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