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성희 시인 / 비치코머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0. 24. 08:00
김성희 시인 / 비치코머

김성희 시인 / 비치코머

 

락일락이 피는 시점에 귀 기울이세요

바람이 발끝을 모으고 바다를 서술하면

싱싱한 삶의 냄새를 맡기 위해

이웃도 모르게 해변으로 갑니다​

그때 새가 되고 싶은 꿈을 꾸지 않아요

물빛이 깨뜨린 구름은 더더욱 줍지 않죠

그건 바다의 일이잖아요

​ 가능한 한 멀리 바라보기

점심은 건너뛰고 뺨은 조금 야윈 채

저녁 별빛에 수즙어하기

그러나 파도 소리에 부서지지 않기

​ 농담이 입술에서 녹을 때까지

파랑의 터널을 통과하는 유쾌한 플라스틱들을 기다려요

완전한 것을 동경했던 불완전한 시절에

늘 먼 바다를 읽었어요 그 짙푸른 언어를요

눈물이 흘러가는 바다

거기에 하늘이 비친다면 눈동자가 넓어지고

가장 먼저 슬픔을 발견하는 사람이겠죠

​ 이상하죠, 해변으로 밀려온 쓰레기를 줍는데

왜 바다보다 우리 영혼이 맑아질까요

​​

-계간 『문예바다』 (2022년 여름호)

 

 


 

 

김성희 시인 / 달 항아리

 

 

어릴 적,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할 때면

숟가락들이 달아나려고 달그락거리던 소리

장판 밑에 지폐도 자꾸만 달아나서

엄마 한숨에 방구들이 꺼지는 소리

그때 둘째 오빠도 종종 달아났다가

빈 주머니의 바람으로 돌아오던 소리

 

있던 것이 없어지거나 붙어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는

어린 내 귓가에 슬픈 허밍이었다

 

햇볕은 저 먼 하늘에서 달아나

우리 집 마당으로 떨어진 것일까

봉숭아 꽃잎에 제 빛깔을 숨기면

손톱에 곱게 물들여 주었지

 

숟가락에 얹을 것도 없는 수제비는

어머니의 미안함에 끓었다가 식었다가

씻을 것도 없는 그릇들을 마당에 들고 나가는 것도

숟가락을 세면서 가족을 헤아리는 것도

수돗물처럼 콸콸 넘치는 어머니 애정의 소리

 

장독대 위에 달빛 한가득한 정화수

내내 두 손 모아 자식들 잘 되게 비시다

어느 날 훌쩍 달님 곁으로 달아나버리신 어머니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시던 어머니 눈동자는 달 항아리였지

이제 달의 뜨락에서 달덩이 같다던 당신 자식들을

눈에 그득 담고 계실 것이다

 

아, 달아나셨던 어머니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희끄무레하던 먼 곳이 달처럼 환해졌네

 

 


 

 

김성희 시인 / 는개

 

 

어제의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슬픔의 흰 뼈를 오리는 눈물 속에서

 

검은빛을 이해하는 머리카락은 올올이 과거입니까

 

멀리 간 것들을 불러들이는 바람의 발성법은 누대의 습입니까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도 노출되지 않는 비밀

 

바닥에 깔리는 아침 햇살은 어제의 술래입니까

 

사실과 다른 기억의 음영을 어디다 둘까요

 

골목을 접었다 펼쳤다 호흡을 줄이는 밤이 오면

 

풍경의 불순물이 잠으로 가라앉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녹았던 시간입니다

 

잘 녹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앙상한 척추는

매초 혀를 날름거리는 괘종시계의 추처럼

쓸데없는 마음을 내일로 꼬박꼬박 넘기는군요

 

몰랐습니다

내 안에 어둠을 태우느라 자정 넘도록 불면이 반짝이는 것을

 

다행입니다

는개같이 새벽이 오고, 그립지 않은 것은 젖지 않을 테니

거기 어제의 나를 두고 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김성희 시인 / 막걸리 한잔

 

 

초승달아래

밤이슬 맞이하니

 

빙글빙글 맴돌다

부딪히는 잔

 

잔 기울일 때마다

또렷해지는 님

 

짜릿하게 온몸을 휘감으니

천국이어라

 

뽀얀 속살 그대의 입술이 닿을때

가슴이 떨려와 빠지고 싶은 내 마음

 

그대의 사랑 마시고

이슬처럼 떠났어요

 

아무일 없지

짜증이 용광로처럼 끓을 때

속상함이 폭포처럼 솟아오를 때

차라리 높은 산이 되리

 

괴로움 파도처럼 일렁일 때

차라리 넓은 바다가 되리

 

아무 일 없는 듯이

눈 지그시 감고 꿀꺽 삼키고 뱉으리

눈 지그시 감고 부처처럼 두 손 모으리

 

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그러면 아무일 없지

 

 


 

 

김성희 시인 / 부인사 뒷마당에서

 

 

팔월 한 낮

한세월의 고독 인내하고

 

이승의 향기 그리워

차마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다 맴돌다

살포시 내려앉은 노랑나비 꽃

힘겹게 나풀 거린다

 

산바람 향기 사이로

내 너를 느끼니

노랑나비야 힘겨워마라 서러워마라

 

나선형 바람타고 온 엄마나비

함께 길 떠나는 노랑나비 꽃

흐르는 세월은 그 누구도 막지 못 하는구나

 

 


 

 

김성희 시인 / 모감주나무

-축축한 잠에서 깨어나면 아름다운 너는 없다

 

 

늦은 저녁을 짓느라고

된장을 풀고 매운 고추를 썰고

도마를 탕탕 두들겨 마늘을 찧으면

눈물을 믿지 않는 나이에 얼마쯤 울 수 있는 알싸한 재료들이다

 

예스런 생각과 방금 돋아난 생각을 버무린 저녁

소화되지 않을 결핍에 처방전 없는 구름무늬 알약을 삼킨다

 

이제 달을 보는 일이나 별을 헤아리는 일보다

삼가 알약을 삼키는 일이 경건해진 지 더 오래

열 길 물속보다 한 길 사람 속에서 곡진한 캡슐이 내가 믿는 신이다

 

풍어제가 시작된 어느 바닷가

그때 풍파를 달래주는 주술같이

거친 바다 위에 오방색 같은 모감주꽃

 

간헐적 두통에도 가팔라지는 불안

꽃잎을 빚은 듯 세세한 빛깔의 알약들에

파도치는 나를 주술처럼 달랜다

 

 


 

 

김성희 시인 / 낙타가 걸음을 멈추면

 

 

날씨는 구체적인 촉감을 원하지

마른 시간을 견뎌낸 모래는

아직 미래를 맛보지 못한 여행자들 틈에서

깨달음을 얻은 견고한 알음 알갱이다

 

바람이 굳센 제 의지를 밝혀놓으면

우리 앞에 인생이 사소하여 흩날릴 걸 알지만

모래는 안다고 말하지 않고 모른다고 흩어지지 않는 침묵을 쌓는다

 

비교적 밝은 태양 아래에서 명료와 명상에

발음이 꼬이는 걸음으로 걷다가

단추를 꼭꼭 채워도 느린 걸음이고

느림에 밟혀서 둥글어지는 세상의 저편

어쩌면 사라지는 이슬의 투명한 구에서

차가운 표정을 잘게 부수는 연습은 진행 중이다

 

화씨에서 섭씨로 전환하는 새벽의 반짝임은 얼어붙고

얼었던 물질에서 낮술 한잔 따라 마시면

어디에도 없는 궁전이 신기루로 피어오른다

 

그때 와르르, 또는 와장창

한때의 견고한 형태가 의태어로 무너지는 모래언덕

모래의 아우성을 들었니, 들리니

흰 모래에 밟히면 흰 바람의 술래가 되지

술래는 누룩 같은 슬픔이 있어 차갑지만 뜨겁게 부풀어 오른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술빵처럼 부풀었을까

어떤 마음을 텅 빔으로 오래 뜸을 들이는 것일까

낙타는 두 개의 물음을 허공에 싣고 가다

문득 답을 내려놓는 사막이다

 

 


 

김성희 시인

부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15년도 계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나는 자주 위험했다』.